안개가 많은 지역입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내비게이션 속 여인의 음성. 오늘의 날씨는 미세먼지 나쁨이네요. 가을이 무색하게 더워서 차창을 닫고 싶지는 않습니다. 흐릿한 빛 덩어리 바다, 갯벌 가득한 물결의 발자국, 깊은 물이 우는 소리. 저는 지금 인천대교를 건너서 영종도에 가고 있습니다. 제목의 ‘나나나나’가 무엇이냐고요. 이 바다에서 부르던 「나나니 타령」의 받는 소리입니다. 곧 소개해드릴게요.
1. 인천대교기념관에서 그려보는 노래
이 바다는 하루 두 번 바뀌는 조수 간만의 차가 평균 9.27m, 안개 끼는 날이 많고, 수시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바뀝니다. 세계 최초, 우리나라 최고, 우리나라 최대 등의 기록을 경신한 인천대교의 세세한 이야기가 인천대교기념관에 담겨 있습니다. 이토록 우아하고 웅장한 다리라니, 악천후 속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요. 바다의 바닥이라니, 바닥의 바닥이라니 출렁거리는 물결의 부드러운 피부 밑 단단한 뼈대를 뚫고 세운 다리라니. 이것을 만든 분들에게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분들의 아이들의 대대손손,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이건 나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만든 다리라는 이야기가 이어지겠지요.
기념관에 설치된 망원경에 두 눈을 대고 이리저리 살피던 참이었습니다. 왼쪽으로는 월미도 그 옆으로는 송도, 하면서 렌즈를 돌리는데 갯벌 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동그란 점들이 보였습니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구부리고 앉아 조개를 캐시나요. 아름다운 다리가 세워지고 섬이 뭍이 되고 바다가 메워지고 갯벌이 줄어들도록 물의 숨구멍에 집중하기를 멈출 수 없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 바다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갯가에서 굴이나 조개를 채취하면서 궁시렁거리며 부르는 소리라 「군음」이라 하는데요. 혼자 부를 때는 받는 소리가 없지만 둘 이상이 부를 때는 한 사람이 메기고 다른 사람은 “응 으응 (또는 에 에) 왜 생겼냐” 하며 받는 소리를 합니다. 선창자가 숨이 차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기구한 삶을 살던 여성에 대해 시간 순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고난으로 시작해서 고난으로 끝이 납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듣다가 눈물 콧물 흘리다가 젖은 손등으로 닦아야 했겠지요. 여성이라는 공동 운명 속에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가사입니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시집살이 노래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심난 심난 구심난한데 오라버님 오셨구랴/일점혈육 사춘 오라버니 내 서름을 들어보소//초세살에 어머니 잃고 초다섯에 아버지 잃고/초일곱에 삼춘집에 얹혔더니//밥이라고 주는 것이 알강조밥에/국이라고 주는 것은 구데기 둥둥 뜨는 된장국이요//동지섣달 설한풍에 쥐구녁에 눈드릴 적/삼베 것이 웬 말이냐 것발 벗고 살았구나//그럭저럭 먹은 것이 초아홉이 되었구나/허구헌날 밭두덕에 갯바닥에 내몰더니//웬수로다 웬수로다 알락조개가 웬수로다/날 밀어낸 사춘 오라버니 삿대가락이 웬수로다//떠내려가네 떠내려가네 내가 떠내려가네/한자 세치 내 머리칼 갈기갈기 헤쳐지며//배꽃 같은 흰 살결은 바위마다 부딛혀서/갈기갈기 찢어지네 양치기배에 건져져서//이 집 저 집 안잠배기 그럭저럭 먹은 것이/삼오십오 열다섯에 중신에미 들락날락//시집이라 갔더니만 서방이라고 육십이진동/부엌이라 들어가니 게딱지로 솥을 걸고/명아주 뿌리로 불붙이고 바가지 한 쌍 없구나//외틀비틀 시미잡년 깬죽깬죽 시뉘잡년/범난 골에 다잡아 들이랐더니/이구십팔 열여덟에 홀과수가 웬말이냐//서방 죽고 내가 살면 열녀가 되는가요/애구애구 내 팔자야 애구애구 내 팔자야//못살겠네 못살겠네 나는 못살겠네/이렇게 속상해서 나는 못살겠네//한번 가신 우리 님은 돌아올 줄 모르고/꿈속에만 오락가락 애간장을 태우누나//대동터의 소뼉다귀 털이 나면 오시나요/평풍 안에 그린 닭이 꼭꾜하면 오시려나//시렁 아래 삶은 팟이 싹이 나면 오시려나/가마솥에 삶은 개가 뚜껑 열고 멍멍하면 오시려나//산이 높아 못오시나 물이 깊어 못오시나/산이 높아 못오시면 말을 타고 오시고요/물이 깊어 못오시면 배를 타고 오시지요//못살겠네 못살겠네 나는 못살겠네/우리 님 보고파서 나는 못살겠네
-「군음」
여성들의 삶에 쌓인 슬픔과 아픔을 해학적으로 바라보는 노래가 「나나니타령」입니다. 인천을 포함 용유도, 덕적도, 백령도, 연평도에 이르는 지역의 어촌여성들이 부르는 것으로 「새연평소리」, 「나이나소리」 라고도 합니다. 자배기에 물을 담아 바가지를 엎어 띄우고 나무막대 등으로 두드리며 경쾌하게 부르고요. 전문 소릿군들이 부를 때는 「소연평 수심가」 또는 「소연평 난봉가」라는 명칭을 쓰기도 합니다. 빠르게 부를 때면 명랑하게 들리지만 느리게 부르면 신세타령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요. 노랫말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변주하였답니다. 모두가 흥겨워하는 놀이판에서 섭섭했던 마음을 노래로 전하면 상대는 해명이나 사과의 뜻을 노래로 화답할 정도로 노랫말이 가변적이었다고요. 받는 소리는 “나나나나 산이로구나 아니나 놀고 뭘 할소냐”입니다. 제가 제목으로 한 ‘나나나나’가 바로 이것이지요.
이팔은 청춘에 소년몸 되고 살자나 하니 요렁해야 살겄네//살림살이를 할려니 바가지 한 쌍 없고 도망질을 할랴니 가자는 임이 없네//날 데려가려마 날 다려가려마 한양에 내 낭군 날 다려가게//소연평 꼭대기 실안개만 돌고 요내나 맘 속에 정든 닌만 돈다//소엔평산은 칡산이요 엔평산은 춤산이라//저 산에나 지는 해 지구나 싶어 지나 나를 두구 가는 임은 가고 싶어 가나//떳다나보아라 한 쌍이 떴구나//사람마다 벼실을 다 한다면 농부나 될 이가 어데가 있다더냐//네 사랑 내 사랑을 몽땅 걸머지고서 천리나 만니라 도망질하고 말지//단발령 꼭대기 넘어가는 저 차는 그 누굴 못잊어 갈지 자 걸음 걷나//날 다려가게 날 다려가게 한양에 내 낭군 날 다려가게//떴다나 보아라 떴다나 보아라 우체국 마당에 임 소식 떴네//사랑 사랑 하길래 무엇이 사랑인가 했더니 한 품에 들구 보니 요것이 사랑이라
-「나나니타령」
다른 버전의 가사 중 배(船)를 배(腹)로 부르며 성(性)을 코믹하게 풍자하기도 합니다. ‘저년의 배는 한강의 나룻밴지/이눔도 타구 저놈도 타요/.../속지말자 쏘련놈 믿지말자 미국놈/삼팔선이 그였는데도 정신들을 못차리나/.../떴다 창공엔 안창남이요/달려라 뛰어라 손기정’ 이렇게요.
다음의 사진은 인천시에서 재연한 뱃노래 장면입니다. 「군음」과 「나나니 타령」은 1988년 인천광역시 지방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아래의 낡은 사진은 조개 씨앗을 심으러 가는 어촌계 여성들의 모습입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겠지요. 지친다 싶을 즈음에 노랫가락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까요. 나나니타령의 즐거운 버전 ‘창공엔 안창남이요 달려라 뛰어라 손기정’하다 보면 웃음이 났을 것 같습니다.
2. 영종역사관에 담긴 섬 이야기
영종역사관은 영종도 동쪽에 있습니다. 씨사이드파크 레일바이크 타는 곳, 영종진공원, 구읍뱃터 등과 지근거리입니다. 역사관 마당 여기저기 체험학습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어요. 전시관에는 이 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크고 작은 사건과 장면들이 채록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신석기 마을인 운서동 유적, 불 땐 자리가 남은 송산 유적과 화덕자리 3기가 설치된 삼목도 유적, 청동기 문화 교류 흔적이 남아 있는 중산동 유적, 한반도 내륙과의 교류 흔적이 남은 운남동 패총, 해양교류의 흔적이 남은 운북동 유적 등으로 이어지는데요.
영종도가 '자연도'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송나라와의 무역 항로는 등주항로(登州航路)와 명주항로(明州航路)가 있었는데요. 왕래 초기에는 등주항로를 이용했지만 이후 요(遼)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예성항에서 출발하여 서해의 섬들을 거쳐 중국 밍저우(明州)에 도착하는 명주항로를 이용합니다. 영종도에는 상인과 사절단이 머물 수 있는 숙소인 경원정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123년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방문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영종도가 ‘자연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정박했는데 (...) 관사는 산에 의지했고 써 붙이기를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 그 산의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아 그렇게 이름(紫燕島)을 지은 것이다.”
해가 질 무렵의 이 섬을 상상합니다. 검고 흰 제비의 몸이 석양빛을 받아 붉게 보였겠지요.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번지고요. 아이를 부르는 어미의 음성이며 대답하는 아이의 음성이 들립니다. 파닥파닥 제비 날갯짓 소리와 함께 타닥타다닥 달리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도 들립니다. 저는 자연도(紫燕島)가 자연도(自然島)인 줄 알았지 뭐예요.
송나라의 사절단이 고려로 왔던 항로를 추적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천일보 2020.09.23.) 송은 고려와의 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특별히 ‘신주(神舟)’라는 거대한 배까지 만들어 고려에 사절단을 보냅니다. 인원도 700명에 달했다고요. 서긍 일행은 태안반도 마도에서 풍도와 영흥도, 팔미도와 월미도를 지나는 항로로 영종도에 정박하고 영종도의 경원정을 출발하여 예성강을 올라가 개성의 벽란도에 도착, 닝보 출발로부터 14일 정도 소요되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고려는 송의 환영 못지않게 극진히 맞이했고요. 사절단이 고려 왕궁으로 갈 때는 1만 명의 군졸들이 에워싸고 행진, 사절단에게는 5일에 한 번씩 연회를 열어 환대했답니다.
‘시루 저부편’이라는 토기 조각을 보았습니다. 원삼국시대의 것으로 운남동 영종하늘도시 2구역 유적인데요. 시루의 바닥 부분이고 상부는 사라져서 전체 형태는 알 수 없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이 시루로 떡을 쪘을 텐데요. 필시 좋은 일이 있었겠지요. 귀한 손님이 오셨을까요. 혼인을 했을까요. 아이가 태어났을까요. 생일이었을까요. 어떤 떡이었을까요. 팥시루떡도 좋고 호박시루떡도 좋고 콩시루떡도 좋겠지요. 떡시루에서 흰 김이 무럭무럭 오릅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출렁출렁 술 단지도 내오고요. 권 커니 자 커니 얼큰한 술잔이 몇 번이고 돌겠지요. 자연도의 흥겨운 잔칫상에 슬그머니 끼어 앉고 싶습니다.
자연도가 영종도가 된 것은 조선후기 때입니다. 해양방어의 요충지인 영종진을 옮겨 왔기 때문인데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제물량 서쪽 수로 3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인데, 나라의 말 3백58필을 놓아먹이며,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가 있는데 모두 30여 호’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또한 실록은 영종도를 영험한 땅으로 전합니다. 세종 11년 예조는 국가 제사를 지낼 영험한 지역의 하나로 영종도를 아뢰었고, 가뭄이 극심했던 중종 22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유사시 임금이 거할 행궁을 설치했고, 병선의 재료가 되는 소나무가 잘 자라 이를 보호해 왔으며, 숙종 이전만 해도 사슴을 사냥해 진상하는 등 산수가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영종도 앞바다는 인천 개항 전후 프랑스, 미국, 일본 함대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함대의 내침인 신미양요 때 그들의 배가 정박했던 곳도 영종진 앞바다였고요. 1875년 일본의 계획적 도발인 운요호사건과 이로 인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이후 일본은 영종도 토지 수탈을 본격화하였고, 영종 주민들은 3·1운동과 함께 항일운동에 가세합니다. 1950년 이후에는 친일염전이 들어서고요. 영종도와 용유도는 1970년대 부속도서인 삼목도, 신불도 등을 포함하여 연육교가 개통되면서 하나로 연결되었고요. 신공항 건설 발표와 함께 영종도, 용유도, 삼목도, 신불도가 공항부지로 합쳐지면서 네 개의 섬이 하나의 섬이 되었습니다. 2000년 영종대교, 2001년 인천국제공항, 2009년 인천대교가 준공되면서 대한민국 교통의 핵심지가 되었습니다. 파란만장과 변화무쌍의 시간입니다.
3. 구읍뱃터의 작약도 아니 물치도
영종역사관에서 본 구읍뱃터 전파선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영종5호 여객선과 구읍뱃터 선착장을 오가며 탑승객을 이동시켰다고 해요. 1957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영종 구읍뱃터와 인천 만석부두 간 운항을 하였던 선박이라고요. 전파선이라는 말은 이제 사어가 되었는지 검색이 안 되는데 아마도 ‘구를 전(轉)’에 ‘물갈래 파(派)’를 써서 ‘물살을 타고 사람들을 옮겨주는 배’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읍뱃터에 이 배가 당도하면 신발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올랐겠지요. 큰 배가 정박하지 못하여 작은 배를 운행한 것일 텐데요. 모자를 멋지게 쓴 저 여인은 여름휴가를 다녀가는 모양입니다.
구읍뱃터는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올 수도 있습니다. 갈매기와 새우깡 한 봉지를 나누어 먹다 보면 금방입니다. 요번에는 차로 와서 그런지 섬이라는 실감이 덜하더군요. 바다 앞으로는 은하수 광장이 있고, 광장 옆으로는 조개구이집이며 횟집이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자그마한 섬이 보이는데요. 저 섬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저렇게 작은 섬도 이름이 있을까요. 제가 짐작하는 그 섬이 저 섬이 아닐까요. 궁금증은 파스타집에서 풀렸습니다. 테이블에 설치된 태블릿 메뉴 중에 저 섬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메뉴 이름은 ‘물치도 김치빠에야’, 동그마한 김치볶음밥 위에 칼집을 넣은 햄 옆에 스크램블 계란 위에 고소한 치즈가 녹아 흐르는데요. 작은 섬 ‘물치도’가 흰 접시 안에 소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 섬 이름은 물치도, 원래 이름은 작약도입니다. 해안선 길이 1.2km, 최고점이 57m. 월미도에서 해상 3km 거리,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이라 물치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요. 일제 강점기 때 섬을 사들인 일본인이 작약 꽃봉오리 같다고 작약도라 불렀습니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의 이름을 따서 부아제(Boisee)라 하였고요. 신미양요 때는 섬 전체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미군들이 목도(Woody Island)라고 불렀답니다.
물치도 남쪽 해식애 앞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여름에는 송도, 팔미도와 함께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높았다지요. 해식애(海蝕崖)란 해식과 풍화 작용으로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를 뜻하는데요.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이 세워졌다가 6·25 전쟁으로 인해 폐쇄되었고요. 그 후 수차례 소유주가 바뀌다가 개발 논의가 번복 중입니다.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 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 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랫소리
해미海味가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꼽 소리
어느 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Aloha Oe」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나 언제까지나 「Aloha Oe」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Aloha Oe」 또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한하운, 「작약도芍藥島- 인천여고 문예반과」
「Aloha Oe」는 하와이 왕조 마지막 여왕이었던 릴리우오칼라니가 지은 노래입니다. 공주 시절 오아후섬을 여행하고 돌아올 때 동행했던 소령과 하와이 아가씨의 이별 광경에서 영감을 얻었다고요. ‘알로하 오에’란 하와이 말로 ‘연애, 애정, 친절’ 등의 의미여서 환영의 인사 혹은 작별의 인사말로도 쓰이는데요. 릴리우오칼라니는 사랑의 노래로 지었으나 하와이 마지막 여왕이라는 서사 때문에 슬픈 노래로 오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하운 선생님은 영종도에서 작약도를 보셨을까요. 작약도까지 들어가셨을까요. 그때는 이 섬이 조금 더 컸을까요, 오히려 작았을까요. 안에서 바깥을 보는 것과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를 텐데요. 선희며 미자는 문예반에서 열심인 소녀들이었겠지요. 저도 그 소녀들에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Aloha Oe, Aloha 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