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의 조병창, 애스컴 시티, 캠프마켓
5. 기지촌과 ’양공주·양색시‘라 불리던 여인들
‘기지촌’은 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을 말합니다. <신동아> (1966. 9) 에서는 1966년 당시 부평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수를 5,00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외기노조 20년사>에서는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1960년대 중반에 애스컴 시티 내의 한국인 노동자가 3,000여 명에 육박한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클럽, 미용실, 세탁소, 사진관, 양복점 등 미군을 위한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부평의 경제는 풍요로웠습니다.
주한미군 소속 한국인 노동자들은 4주 단위로 월급을 받았으니 1년에 13번의 급여를 받는 셈이라고요. 당시 다른 직업에 비해 급여수준이 월등히 높았답니다. 군표는 부대 내에서 통용되는 화폐인데 외부 유통은 불법이었지만 기지촌에서는 흔히 사용되었고요. 부평에는 신촌, 삼릉, 백마장, 관동조, 다다구미 등의 기지촌이 있었는데요. 유통기간이 지난 군표는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달러로 받으려는 기지촌 상인들과 미군 사이의 실랑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양공주, 양색시, 양부인, 달러부인, 유엔레이디’ 등으로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몸이 아픈 부모의 약값을 위해 혹은 속거나 납치되어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은 대한민국 가부장 가족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쓰였지만 가족들조차 이들을 손가락질했습니다. 혼혈의 아이들이 태어나지만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부평의 보육시설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국으로 입양되는 것만이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라 믿었다지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인즈 인수 펜클(Heinz Insu Fenkl)은 그의 소설 <Memories of My Ghost Brother>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평 기지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들의 얼굴에서 허리를 지나 다리까지 눈길을 훑었다. 그 날은 유난히 추워서 얇은 옷을 입은 그 여자들은 아주 추웠을 것이다. 어떤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여자들은 길 아래에 있는 제6대대의 한국군을 고객으로 하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한국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돈은 덜 벌었지만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들을 멸시해서 가끔씩 양색시가 자기 동네에 들어오면 다른 양색시에 대한 경고로 흠씬 두들겨 패곤 했다.”
그녀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화대를 깎으려는 미군에 대항하는 규탄 시위도 있었고요. 미군에게 버림받은 동료의 자살에 상여를 메고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여 사과를 받아내기도 합니다. 2014년 6월 25일 한국의 미군기지 주변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이때 ‘원고’는 1957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 내 각 지역 소재 기지촌에서 ‘위안부’로 미군 상대 성매매에 이용되었던 여성들을 말합니다. ‘피고’는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하여 성매매를 조장함으로써 원고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배상 책임이 있는 국가를 지칭하고요.
소송인들의 기자회견에 의하면 정부는 미군 위안부제도를 만들고 철저히 관리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외화벌이로 이용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불법이었던 성매매를 기지촌에서 용인하고 여성들을 상대로 한 미군 범죄까지 묵인했으니까요. 기지촌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교양교육을 받으며 ‘민간 외교관’, ‘경제 건설을 위하여’,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는 애국자’ 등으로 불리며 외화벌이를 독려 받았다고요. 2020년 5월 전국 최초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고,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일부 승소 판결 등으로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는데요.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처럼 미군 기지촌의 위안부 또한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