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학교에 자주 오게 되니 옆에 있는 마을 사람들과도 친분이 쌓였다. 나는 일종의 직업병으로 사람을 만날 때 치아를 가장 먼저 보는데(아마 모든 치과의사들이 그러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치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들에게 국립병원으로 와서 진료를 받으라고 해도 진료비가 너무 비싸다며 부담스러워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치아를 볼 때마다 오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병원의 혜택을 받기가 더더욱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집의 형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서민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땅 곳곳에 존재했다. 그들은 짚으로 지어진 집, 뻘간 진흙으로 대충 바람만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집에 살았고, 간간히 옥수수를 재배하며 끼니를 때웠다. 에티오피아에서 말라위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허허벌판에 정차할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봤다. 그들은 주로 땅바닥에 앉아 먼지 한 점 없는 평야를 바라보다가 버스가 정차하면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그때마다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그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버스가 곧 출발했기에 그들의 시선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먼 훗날,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덴탈 버스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다니며 문명과 멀리 떨어진 오지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것.
나는 이곳에서 취득한 자격증으로 아프리카 7개 나라(케냐, 잠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마다가스카, 레조또, 모리셔스)에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러 나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덴탈 버스를 타고 한 달, 두 달 마을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진료해주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선 치과의사뿐 아니라 치위생사와 치기공도 필요할 테고, 집을 보수하거나 좀 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건축가가 필요할 수도 있다.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벽화를 그리는 아티스트가 필요할 수도 있고, 사진작가나 문화 활동가들이 와서 황량하기만 했던 이들의 삶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선 많은 돈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따른 헌신과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을 할 때도 있기에 예민해진 신경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말라리아에 걸릴 수도 있고 강도를 만날 수도 있기에 그만한 담대함과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일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을 것이며 계획 하나하나가 삐걱거릴 것이다. 그 삐걱거림 속에서 우리가 꿈꿔왔고 추구하는 가치를 이뤄내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 일이 이뤄질 수도, 뻐그러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런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돈도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에 지내며 돈, 돈, 돈 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사느라 잊고 있었는데, 예전 기억을 회상하며 글을 쓰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를 다시 찾은 것 같다. 아, 나 이런 꿈을 꾸고 있었지.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전 세계에 나 혼자일까? 말라위에서 마을 진료를 하며 포스팅을 올리니 세계 각국의 치과의사들에게 연락이 왔다. 미국, 이란, 필리핀, 한국, 캐나다, 남아공,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치과의사라며 본인도 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들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어디서 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사실 이 활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시작하면 됐다.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다 보면, 방법을 찾게 된다. 방법을 찾고 나서는 그냥 시작하는 것이다. 계획이 틀어지는 걸 걱정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틀어짐을 받아들이고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먼 나라의 아프리카 사람들만을 도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먼저 찾아보고 활동을 진행한다면 훗날 아프리카에서든 어디에서든 봉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을 국경 없는 의사회를 보며 생각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2015년 기준 치과의사를 뽑지 않는다고 했다. 재난 현장이나 테러가 일어나면 파견을 나가 급박한 상황의 환자를 돌봐야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레진치료나 크라운을 씌우고 있을 수 없어 치과의사를 뽑지 않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단체를 하나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 'Dentist without border', 'Dentist, cross the border'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다 보니 도서관을 짓는 3주째에 조그마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다. 건축 현장에 자주 오다 보니 인부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과 자주 대화했고 그들의 좋지 않은 치아를 발견했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했기에 나는 같이 근무하는 병원 의사들을 마을로 데려갔다. 교장선생님의 요청하에 인부들 외에도 기숙하고 있는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진료를 봐주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나중에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봐주었고 빛이 없어 핸드폰 불빛으로 진료를 봤다.
한 켠에는 도서관 건축을 하고, 한 켠에는 진료를 보는 모습이 내가 꿈꾸던 덴탈 버스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렇게 한, 두 달간 마을에 머물며 진료를 해준다면 집도 지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가르쳐 줄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인생을 조금 더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색깔들로 채워 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며 사탕수수와 옥수수, 시마를 가져와 선물해주었다. 돈을 번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일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엔 벅찬 무언가가 뜨겁게 뭉클거렸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무엇이든 어렵게 생각지 말고 한 발자국씩 내딛는 것, 그게 중요했다. 결과의 성패는 알 수 없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아마 처음엔 실패할 확률이 크겠지만 그 실패가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성공이라 부르는 곳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성공의 기준은 너도 나도 다르기에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누군가는 100억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고 누군가는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다. 내가 느끼는 성공은 물질적인 것과 보여지는 것에 기반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느낀 수많은 경험들이 내 성공의 정의를 조금은 다르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보여지는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공허하다. 내면이 단단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쉽사리 무너진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끊임없이 스스로 물으며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