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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22. 2020

#49.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보딩스쿨은 치테제라고 하는 마을과 길리메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 치테제 보딩스쿨에 들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길리메에선 교장선생님을 만나 늦게까지 설득하고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두 학교 모두 아이들을 받아주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치테제 보딩스쿨은 1년간 아이들을 맡아 줄 수 있다고 했으며 길리메 보딩스쿨은 3년간 맡아줄 수 있다고 했다. 공짜는 아니었다. 치테제는 아이들을 맡는 대신 낡은 도서관을 리모델링해달라고 했고 길리메는 도서관 자체가 없기에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전부터 SNS를 통해 내 활동을 지켜봤던 몇몇 분들이 조지의 집을 만들어 주는 데 함께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주셨었다. 나는 집 대신 학교와 마을에 도서관을 설립해주고 아이들을 보딩스쿨에 들여보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메시지를 주신 분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모두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을 짓기에 이 분들만의 도움으로는 부족했고, 그만큼의 부담을 드리기도 죄송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고, 다시 남미에서 학교를 하고 있는 형(이하 꽃거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형은 간단한 솔루션을 줬다. 우선 글을 쓰고, SNS에 올려라. 그럼 알아서 해결될 거다,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엔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일에 후원금을 보낼까 싶었다. 형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까짓꺼 안되면 본인이 도와주겠다며 우선 써보라고 했다. 나는 형의 말을 믿고 글을 썼다.


치테제 보딩스쿨과 길리메 보딩스쿨에서 요구한 조건과, 아이들 중 누구누구가 학교에 갈 수 있는지,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학교는 어떤 곳인지, 그러면 얼마가 필요한지 등을 써서 글을 올렸다. 후원자 모집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누군가 땀 흘려 힘들게 번 돈을 받는다는 것, 자신의 이익을 생각함도 아니요, 순수하게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이들에게 받는 돈이 귀하다는 걸 알기에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형의 말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용기를 내서 후원 글을 올렸다. 올리자마자 핸드폰을 무음에 둔 채 침대와 멀리 떨어트려 놓고 잠에 들기 위해 애썼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부담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이런 글을 직접 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꾸역꾸역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 새벽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누가 후원은 해줬을까. 댓글이 달려 있을까. 얼마가 들어왔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고 쿵쾅대는 마음으로 SNS를 열었다. 응원한다는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다. 지인들 몇 명과 SNS상에서만 아는 분들이 65만 원을 보내주셨다. 아니 진짜 후원을 해주셨네. 어떻게 돈을 이렇게 보내줄 수가 있는 거지? 따듯한 마음들에 감동해 감사하다는 댓글을 남기고 혼자 뭉클해했다. 건축에 필요한 돈은 400만 원이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이 정도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 날에 다시 확인을 하니 250만 원이 채워져 있었다. 감사가 끝없이 나왔다. 


다음 날부터 바삐 움직였다. 나 혼자만의 생각과 의견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기에 현지인 친구들 여럿과 함께 보딩스쿨을 찾았다. 계약 전에 혹여나 문제가 될 만한 요소들을 찾고, 다시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둘러본 후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친구들은 도서관을 짓는 비용이면 말라위에선 엄청 큰돈이라며 3년보다 더 길게 케어해주셔야 한다고 열성을 다해 말했다. 이곳도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이고, 다른 아이들이 내는 기숙비용 또한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조사한 친구들은 당당히 설득했다. 교장선생님은 긴 대화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케어를 해주겠다는 계약을 해주셨다(말라위는 중학교가 없다). 현지 엔지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나 대신 사인을 했고 내가 떠나고 난 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진료를 일찍 마치는 날과 주말에 학교를 갔다. 길리메 마을까지는 빠르면 2시간, 느리면 5시간까지도 걸렸다. 자차가 없던 나는 이 나라의 미니버스를 타고 움직였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명 정원인 버스에서 22명이 타기도 하고 자리가 없을 땐 손님이 내 무릎에 앉기도 했다. 찜통 속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올 때면 우르르 모두 내렸다가 우르르 다시 몰려 탔다. 5분마다 한 번씩 누가 내리고, 탈 때마다 우르르거렸다. 깊은 인내가 필요했고 평정심이 필요했다. 택시를 타면 3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한번 귀찮음을 감수하면 돈을 아낄 수 있었다. 나 편하자고 매번 택시에 돈을 버릴 순 없었다. 값비싼 돈이었다. 


지인에게 관리감독을 소개받았다. 말라위에선 정직한 사람이면 반은 먹고 들어갔다. 그 사람을 통해 필요한 건축 자재들과 인부들을 고용했다. 사람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감사히 받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나가지 않게 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했고, 자재들을 바가지 쓰지 않고 잘 사야 했다. 결국 내가 이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다. 밤낮 시간이 나는 대로 공부하고 현장으로 갔다. 잘 모르는 풋내기가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일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불편할 수 있었겠지만 감사하게도 좋은 분들을 만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기초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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