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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21. 2020

#48. 애들 학교 한 번 보내보자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토요일마다 만나는 아이들 중 제일 마음이 쓰였던 아이는 조지였다. 한 번은 조지가 물병을 줍고 있는데 덩치가 조금 더 큰 아이가 다가와 조지를 때리는 게 보였다. 심하게 때리진 않았지만 조지가 가지고 있던 물병을 다 빼앗았다. 그들의 세계에도 그들만의 룰이 있었다. 약육강식, 강약약강. 뺏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했다. 화가 났지만 그 아이 또한 불쌍한 아이였다. 나는 조심히 다가가 둘을 앉혀놓고 얘기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아이는 잘 듣는 것 같진 않았지만 물병을 다시 돌려줬다. 답례로 마켓에 들어가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빵을 사줬다. 나중에 조지에게 들으니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덩치가 큰 아이들은 덩치가 작은 아이들의 물병을 뺏고, 그날 번 돈을 빼앗는다. 뺏기지 않으려면 힘센 아이 밑에 들어가야 하거나, 그 아이들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찌나 이리도 비슷한지. 한국이나 말라위나 파이의 모양과 크기만 다를 뿐 결국 똑같았다.


조지에게 잠을 어디서 자냐고 물었다. kfc 근처는 아니라고 했다. 조금 걸어야 한다고. 같이 가보자고 했다. 부시 더미를 지나, 초원을 지나, 도로를 지나, 흙길을 지났다. 그렇게 계속 걸어도 도착을 못했다. 어디냐고 물으니 더 가야 한단다. 택시를 잡기로 했다. 허허벌판엔 택시가 오지 않았지만 간간히 차가 지나다녔다. 엄지를 들고 히치하이킹을 했고, 성공했다. 아저씨는 우리를 마을까지 태워다 주었다. 빨간 갈색 흙이 깔려있는 마을이었다. 진흙으로 지어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마을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조지는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줬지만 자신의 집은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혹여나 못 알아들었나 싶어 옆에 아주머니한테 통역을 부탁했다. 조지는 대답이 없었고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아주머니는 통역을 하다 말고 거칠게 화를 냈다. 조지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조지도, 나도, 같이 있던 친구도 당황했다. 왜 화를 내지? 조지가 갑자기 다른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제 괜찮다며 가보겠다고 하고 조지를 따라갔다. 아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집을 보여주기 싫었던 아이에게 마을 사람들을 데려와 묻게 했으니 아이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거기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구걸하는 아이라는 걸 알고 무례하고, 거칠게 대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던 건 가만히 옆에 서서 기다려주는 것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조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곳곳에 부서진 흔적이 있는 집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 네가 사는 곳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 앞에 칸막이가 쳐져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라고 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는 아이는 밤마다 이런 곳을 전전하며 잔다고 했다. 찬바람을 그나마 막아줄 수 있는 칸막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고. 먹을 것을 얻어오면 이곳에 불을 피우고 음식을 해 먹고 불의 온기가 남아있을 때 잠을 잔다. 그러면 그나마 따듯하다고 했다. 같이 온 친구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마음이 아팠고,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음에 미안했다.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우리의 행동을 자책했다. 방법을 찾아주고 싶었다. 진흙으로 짓는 집이라면 돈이 많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 남미에서 학교를 짓고 운영하고 있는 형에게 방법이 없는지 물어봤다. 쉽지 않을 거라 했다. 워낙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고, 이렇게 하려면 땅을 사거나 해야 하는데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고 했다. 마을 안에 집을 짓는다는 건 이장님과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부분이고, 마을 사람들과의 조율도 필요하다고 했다. 아예 일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이장님은 알겠는데 마을 사람들은 왜?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 말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며칠 후 현지인 친구를 데리고 조지와 함께 그 마을을 다시 갔다. 이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민 사람들도 외국인인 나를 보고 몰려들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혹시 그런 공간을 조그맣게라도 지을 수 있는지 물었다. 이장님은 고민을 하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몰려든 마을 사람들이 조지를 두고 뭐라 하기 시작했다.


저거 다 불쌍한 척하는 거야.

쟤네들이 얼마나 악질인데, 없는 척하는 거야. 저것들.

쟤네 도와줄 돈으로 나나 좀 도와줘. 왜 쟤만 도와주는 거야?

나도 창고가 필요해. 창고 좀 지어줘.

나도 닭장이 없어. 닭장을 지어야 해.


좌우에서 서로 도와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 멘붕에 빠졌다. 형의 말이 실감이 났다. 누구 하나를 도와주기 위해선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텐션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했고 해 줄 거면 모두 다 해주던지, 아무도 안 해주던지,였다. 한 가족만 해주거나 특정인을 도와주면 질투심에 그가 받은 것들을 모조리 빼앗길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마음이 있다고 해서 누굴 도와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 날은 복잡한 마음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하나부터 끝까지 쉬운 게 없었다.




당시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떠나고 난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 속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던 찰나에 조지의 상황까지 겹친 것이다. 다행인 건 이런 활동에 관심 있는 현지인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었고, 2주에 걸쳐 그들과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이들을 보딩스쿨에 보내는 것이었다. 보딩스쿨은 기숙사 같은 개념으로, 부모님이 바빠 아이들을 케어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숙박+학비를 내고 맡겨지게 된 아이들도 있었고 다른 NGO 단체가 후원을 해주는 고아 아이들도 많이 있는 학교였다.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제공하는 것은 물론, 또래 아이들과 같이 잠을 자고 머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조지와 다른 아이들에게 적합한 학교일 것 같았다.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가 나오자마자 아이들을 받아줄 수 있는 기숙학교를 서치했다. 릴롱궤(수도) 근처에 3개의 학교가 나왔다. 근처라고 했지만 2시간, 3시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하나는 길리메라고 하는 곳에, 두 개는 치테제라고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결국 지도 하나만 가지고 말라위 국민 교통수단인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조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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