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요하네스버그에서 쿠바로 가기 위해 터키를 경유했다. 터키 항공사에선 8시간 이상 경유하는 사람들에게 5성급 호텔을 제공해줬고, 나는 이스탄불에서 20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쿠바에 입국하려면 '여행 비자' 혹은 '여행 카드'를 입국 전에 준비해야 했다. 보통 한국에선 쿠바행 기내에서 카드를 팔던가, 공항에서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요하네스버그나 터키의 공항에서 구매를 하려고 했지만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선 그런 카드는 팔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이스탄불의 여행사와 공항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파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오히려 비자를 왜 그런 식으로 사야 하는지 되묻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낸들 압니까. 쿠바가 그렇다는데.
걱정이 앞선 나는 이스탄불 항공사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구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이스탄불의 어딘가에서 쿠바 카드를 샀다는 정보는 있는데 도무지 구매처를 알 수 없었다. 결국 확실하진 않았지만, 몇몇 여행자들의 후기를 믿어보기로 했다. 쿠바에 도착해서 비자를 사는 방법이었다. 이집트와 네팔 같은 나라도 도착해서 비자를 살 수 있는데 쿠바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그렇게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시간에 걸쳐 쿠바에 도착했다. 이민국을 통과하기 전 쿠바 여행 카드를 보여주는 곳이 있었고, 그 뒤에는 조그만하게 '여행 카드 사는 곳' 이 짠- 하고 나타나 있었다. 역시! 다행이다! 기쁜 마음에 그곳으로 달려가 카드를 사려고 보니 가방에 넣어둔 현금 $350이 없었다. 어..? 분명 여기에 넣어놨는데! 어디 갔지..! 이민국 앞에 멀뚱멀뚱 서서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여행자들은 현실 부정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그러나 그럴 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만히 기억을 돌아보니 요하네스버그의 숙소에서 일하던 청소부가 생각났다. 그곳에 있을 때 안 그래도 도난 사건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대부분 청소부에 대한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도난사건은 일어났고 컴플레인도 계속 나왔다. 나도 요리를 해 먹으려 사 왔던 감자, 케첩, 고기, 크리스피 도넛, 누텔라 등이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사라지기도 했었다. 케첩 같은 건 정말 따지기도 뭐한데, 꽉 차 있던 케첩이 갑자기 반으로 줄어있으면 기분이 무지 상한다. 내 케첩 누가 먹었냐고 찾아내기도 웃겨서 가만히 있었는데 여행자들끼리 나눠 먹으려고 사온 크리스피 도넛 12개가 몇 시간 후 3개로 바뀌는 순간 화가 폭발했다. 숙소 주인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떤 $%^인지 걸리면 가만 안 내버려둔다고 따졌다. 웃긴 건 그때 피해본 숙박객들도 도둑놈을 잡아야겠다고 다 같이 들고일어났지만 결국 증거 부족으로 잡진 못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심증은 그 청소부를 향해 있었고, 결국 내 돈도 그렇게 털린 듯했다.
쿠바 공항에 도착해 현금이 없던 나는 시티은행 카드를 내밀었다. 창구 직원은 내게 카드로는 계산이 불가능하다며 이민국 직원 한 명을 붙여줬다. 밖으로 나가서 돈을 뽑아올 수 있게 도와주라고. 이때까지만 해도 현금은 도난당했지만 곧 쿠바를 여행할 생각에 행복했다. 직원과 함께 밖으로 나가 Atm기계 앞에 서서 카드를 집어넣었다. 얼마를 뽑을지 정하고 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transction has denied라는 말만 반복해서 나올 뿐, 돈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Atm 기계에서도 시도를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직원은 아마 아메리카 카드라서 안 되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읭. 미국 카드는 쿠바에서 안 먹히는 건가? 당시는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가 그런대로 풀린 상태여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시티은행 카드를 포함해 내가 가진 카드는 총 3개였다. 그중 하나만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2개는 짐을 붙인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가방은 이민국 밖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터였다. 나는 직원에게 다른 카드 두 개가 가방 안에 들어있으니 가방을 가지고 오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직원은 안된다며 나를 다시 공항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직원을 계속 불렀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내게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기다리라고!!"만 반복했다. 기다리기를 5시간,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자꾸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민국 앞에 퍼질러 눕기도 하고, 쿠바에 입국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앉아서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5시간 후 나를 찾아온 직원은,
가방 들고 나 따라와
어디 가는데?
타운에 있는 이민국 센터. 그리고 다시 터키로 다시 갈 거야.
뭐라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나와 차를 한 시간 타고 시내로 갔다. 쿠바의 기억은 그때 조그마한 창문으로 본 게 전부다. 이민국 센터라는 곳에 도착해 나를 집어넣은 곳은 웬 허름한 창고였다. 그곳에서 30분을 더 기다렸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캐나다에서의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30분이 지나자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어깨에 총을 멘 남자가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 좁고 어두침침한 통로를 걸었고, 때 묻은 노란색이 칠해져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에 있던 짐들을 다 꺼내야 했으며 셔츠와 바지, 속옷, 팔찌, 발찌, 목걸이 등도 다 벗어야 했다. 총을 소지한 군인은 옆에 서있고 이민국 직원은 내게 옷을 모두 벗은 채로 뒤를 돌아 손을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군인이 몸을 만지며 수색했다. 혹여나 몸에 마약을 소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사라고 했다.
수치스러웠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터키로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옷을 다시 입으며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돈이 없어서라니. 심지어 그때 쿠바엔 세계여행을 하던 내 친구들이 있기도 했다.
나 돈 있어! 카드에 돈 들어 있다고! 지금 당장 이 카드 가지고 Atm으로 가면 돈 뽑을 수 있다니까? 내 친구들도 지금 쿠바에 있어! 친구들한테 전화하면 걔들이 와서 돈 내줄 거야! 고작 50달러 아니야? 내가 50달러도 없을 것 같아?!!!
악에 받친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개를 휙휙 젓더니 보스가 결정한 일이라며, "너는 돈이 없어, You have no money"라는 말을 띄엄띄엄, 영어로 지껄였다. 내 모든 소지품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 가고, 나의 신상을 조사하며 내가 한마디 하려 하면 조용히 하라고 재갈을 물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ㅠ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으면 여기 왔겠냐고. 돈이 없다는 가정을 만들어 놓고 터키로 추방시킨다고? 그들은 이런 내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여권에 스탬프가 왜 이렇게 많지?
난 여행자야. 여행을 많이 했으니까 그렇지.
여행을 왜 하지?
......
카드에 얼마가 있지?
4000불 정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어? 아무래도 넌 마약 딜러가 아닐까 해.
......
당시 나는 PCT를 하기 위해 아는 형에게 400만 원을 빌린 상태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이곳의 평균 노동자 임금은 200~300불이다. 한화로 2~30만 원 정도 된다. 그런 나라에서 4000불이라는 돈은 엄청 큰돈이다. 그것도 젊은 놈이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의심을 할 법도 했다. 이들의 삶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특권층 빼고는 몇 되지 않았다. 노동 임금이 너무 적고 함부로 국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조차 별로 없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나는 그렇게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 후 나를 어두운 통로로 끌고 갔고 그곳엔 철창으로 막혀있는 독방이 있었다. 퀴퀴한 냄새와 습기가 들어찬 그곳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핸드폰과 전자책, 연필, 공책 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오로지 내 몸뚱이와 세면도구뿐이었다. 독방 안엔 죽은 개구리와 바퀴벌레가 있었다. 각종 날파리와 모기들이 나를 반겼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철창 사이로 음식을 줬다. 식빵 한 조각과 스팸 비스무리한 것, 빵에 발라먹는 잼, 소금이 잔뜩 들어간 국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아침 6시에 쿠바에 도착해 저녁 6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다시 돌아갈까? 진짜로 날 터키로 보낼까? 겁만 주는 게 아닐까? 혹시 사정하면 이 땅에 남을 수 있을까? 눈물이 흘렀다. 그냥 마구마구 흘렀다.
더럽고 냄새나는 침대에 누워 어둠이 깔린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러웠다. 죽고 싶었다. 내 인생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 여행하는 것처럼 별 다른 문제 없이 돌아다니는 게 내가 원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믿는 신은 나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나는 각종 어려움과 고난에 빠지기 일수였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다 큰 뜻이 있어서 라고. 그래.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믿고 싶은데 이런 상황이 닥쳐올 때면 믿음 대신 원망만 잔뜩 나온다. 원망과 자책, 허탈, 무기력, 비참함과 쓰라린 기억들이 몰아치듯 나를 감쌌다.
철창에서의 밤이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아침으로 빵 한개와 스팸 한 조각을 먹었다. 하나 더 먹으려 했더니 소리를 빽- 지르며 안된다고 한다. 나참 서러워서 살겠나. 이민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 감옥 같은 곳은 불법체류자들이나 어떤 이유에서건 여권이 없는 이들을 가둬놓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에리트리아,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말리, 기니, 러시아, 중국, 이태리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그들은 각자만의 이유로 이곳에서 감방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일 무서웠던 건 며칠 동안 이곳에 있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이는 두달 동안 갇혀있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1년이 넘게 갇혀있는 이도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총을 든 군인이 소리를 지른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 각자가 방으로 들어가면 하나 둘 철창문을 잠근다. 나는 철창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 shake it 들아 문을 왜 잠그냐고, 내가 범죄자냐고.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이곳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철창은 나를 가둬놓았으며 나의 자유는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모든 통제하에 철저하게 감시되었다. 방에 박혀서 5-6시간을 갇혀 있었고 그 안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약해져 가는 멘털을 강하게 붙잡아야 했다. 정신을 똑바로 잡지 않으면, 자유를 억압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만큼 화가 났고, 억울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 보스를 만나 이야기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철저히 무산됐다. 죄수를 얌전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한 시간이었다. 20평 남짓한 시멘트 운동장에 모여 이곳의 멍청한 간수들을 욕했다. 그 시간은 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공간에 있다가 밝은 빛을 받으면 몸과 정신이 깨끗해졌다. 누군가와 말을 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내 말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군인과 직원들 속에서 그나마 힘이 되었던 건 에리트리아와 말리 같은 전쟁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청년들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마음은 벌써 쇼생크 탈출을 찍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