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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Aug 23. 2022

<신기관>

Francis Bacon

<신기관>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진석용 번역, 한길사

이 책은 현대 기계주의적 세계관의 시초이자, 모더니즘의 토대를 닦은 베이컨의 사상이 녹아있는 책이다. 베이컨은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는 일종의 사상적인 교두보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연금술과 비 정량화된 재료 등 과거 중세 시대의 과학이 그의 탐구 대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베이컨의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4개의 우상이나 귀납법이 아니라, 귀납이라는 탐구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베이컨이 탐구에서의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친 이유는 이 책의 1장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베이컨은 신기관 1장에서 상당한 분량을 과거 현인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한다. 특히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및 소피스트들이다.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법, 그리고 연역법은 고대 시대의 주요 탐구 방법 중 하나였다. 베이컨은 이 삼단논법과 연역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 탐구자가 관찰할 수 있는 주변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사례를 모아놓고 2. 갑자기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대전제를 끌어온 뒤 3. 탐구자가 원하는, 혹은 예상하는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또한 베이컨은 이 시대에 주로 탐구되어 온 형이상학적 내용들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나침반, 인쇄술, 화약의 발명을 찬양한다. 이는 철저히 실용주의적이고, 인간사의 삶에 초점을 둔 탐구를 주로 진행해야 한다는 베이컨의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베이컨은 이후에도 탐구자가 피해야 할 4가지 우상에 대해서 제시하면서, 우상들에 빠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소피스트들의 논리와 탐구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1장의 말미에서는, 앞서 제시된 연역의 문제점을 다시 짚고, 자신이 주장하는 귀납이 올바른 탐구 방법임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가장 구체화된 논증에서 일반화된 논증에 도달하기까지 점진적으로 논증의 범위가 발전하는 탐구 방법이 옳다고 주장하며, 그 방법으로 귀납을 제시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열의 성질을 예시로 들어 귀납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이컨은 열을 포함하는 수많은 사례들(예를 들어 태양, 모닥불, 등불, 동물의 체열까지)의 모든 특징들을 작성한 뒤, 공통점과 차이점을 특정한 방법으로 분류하여 공통되는 특징들을 모으고, 상충되는 특징들을 제거하여 열이 가진 일반적인 특징을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례들 중 특이한 사례들을 설명하면서, 이들의 분류를 설명하였다. 베이컨은 이렇게 분류된 사례들이 탐구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도 설명하였다. 베이컨은 사례들의 분류를 설명하는데 책의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이는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그만큼 베이컨의 정교한 탐구 방법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은 형이상학적이고, 목적론적인 탐구의 시대를 벗어나서, 실용적이고, 방법론적 탐구의 시대를 시작하는 신호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베이컨이 불완전하지만 현대에도 두루 쓰이는 귀납법의 원형을 제시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고대부터 지속되어 온 목적론적 탐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탐구의 방법뿐만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실질적인 자연으로 바뀔 것을 역설하였으며, 인간에게 유익한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더 이상 인간의 사고와 탐구가 신이나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바라보지 않고, 인간 중심의 사고와 탐구를 진행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고대 사람들이 탐구 과정에서 저지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문제점을 유발한 4가지 우상을 제시한 것이나, 우상을 탈피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한 것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또한, 탐구 과정에서 엄밀하지 못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례들을 모아서 특징을 정리하고, 충돌하거나 전반적으로 합치하지 못하는 특징들은 배제하고, 공통적으로 일정한 특징을 가리키는 사례들을 모아 일반화된 전제를 세우는 과정은 몇백 년 전 사람이 맞는가 의심될 정도로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베이컨이 제시한 귀납법이 내가 그동안 반복해온 연역의 탐구과정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정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베이컨 본인이 직접 실험을 통해서 각종 사례들의 특징들을 정리하고, 어떻게 탐구를 진행하여야 하는지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점은 베이컨이 사상가뿐 아니라 발명가이자 과학자라는 점을 상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베이컨이 비판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소피스트와는 달리 철저히 사례에 기반한 실험을 한 것 역시 언행일치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높은 신뢰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베이컨이 탐구의 사례들을 분류하면서 인간의 감각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은, 후대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논증이 제시된 과정을 생각나게 했다. 그만큼 베이컨은 철저하고 완벽한 탐구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탐구 결과를 오롯이 인간을 위해, 자연의 정복에 사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산업혁명 이후 이어져온 현대 기술의 발전과정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튼튼한 사상적 기반, 뉴턴의 어마어마한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성과는 결코 간과될 수 없지만, 베이컨의 사상과 탐구 방법은 현대 과학과 기술의 근본적인 목표이자 방법론적 초석이며, 오늘날 기계론적 세계관의 창시자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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