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dotus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주 무대로 하는 책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만을 서술한 책은 절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를 둘러싼 이집트, 페르시아 등 수많은 나라들의 개별적인 역사와 그것들의 문화, 특성들을 매우 상세히 설명하고, 저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주요 부분인 페르시아 전쟁을 서술한다. 헤로도토스의 독특한 서술방식, 서술관점 등은 천병희 교수의 번역판 서문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책을 읽고 난 후 내 생각을 중심으로 써나갈 것이다.
먼저,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은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가 있기 전의 역사, 페르시아의 성장과 주변 국가 정복,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어떤 국가이든 간에 계속해서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이는 국가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였다. 군주제이자 세습하는 나라인 페르시아에서도 메디아인에 의해 왕권을 통째로 빼앗겼다. 그들의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왕권은 작은 속임수 몇 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레이오스, 크세르크세스와 같은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끈 왕들이라도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를 비롯한 라케다이몬인들을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 원정의 마침표인 플라타이아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 대한 비인간적인 일을 계속했고, 자신들과 다른 민족들을 무시했다. 따라서 여전히 그들은 최강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 책에는 나오지 않는 대목이지만, 훗날 자신들이 힘들이지 않고 점령한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할 때 그제야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이 틀렸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영원한 강자는 <역사>에서도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어서 든 생각은, 최고의 위치에 오른 페르시아인들과 그들의 왕들의 삶이 절대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가 아시아에서 최고로 강한 국가로 등극하고, 주변 국가들을 굴복시켜 나가면서도 지도자는 성과를 거두면서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순간보다 점령한 민족들에 대한 처우 고민, 반란 진압, 유력인사에 대한 견제 등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원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권위에 대한 집착이자 불안감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세계 최고의 강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순간에도 진정 행복한 순간은 아주 짧았거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헬라스인들을 끝내 노예로 만들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주된 줄거리인 같은 페르시아 전쟁 중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의 원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권위에 대한 집착과 불안에 대해 추가로 서술하고자 한다. 헤로도토스는 그가 그리스 원정에서 수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헬라스인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 이들을 상대하는 헬라스인들은 그에 비할 바 못하는 군대만을 보유했다. 게다가 헬라스인들의 구성원 상당수는 이미 페르시아에 항복한 상태였고, 자유를 추구했던 국가들조차 의견을 한데 모으기 힘들어했다. 현대와 같이 비대칭무기 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페르시아의 승리는 당연시될 것이다. 물론 크세르크세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패배가 생각보다 페르시아에 큰 타격을 입혔고,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인정할 만큼 용감한 스파르테 인들의 분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원정을 그만두게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졌으나 분명 전번의 아르테미시움 전투보다는 조금 더 나았으며, 이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한 만큼 육군의 공격을 통해 사실상 망명 상태였던 아테나이인들을 충분히 짓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마르도니오스가 원정을 마무리하게끔 한 다음 자신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헤로도토스는 그 이유로 크세르크세스가 본국으로 돌아갈 다리가 끊어져서 완전히 섬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아르테미시움 전투에서 페르시아가 잃어버린 군사들을 점령지에서 추가로 징병하여 어마어마한 군대를 유지했다. 그들의 군대가 약해지거나 역으로 섬멸될 일은 거의 없었기에 사실상 시간은 그들 편이었다. 만약 엄청난 군대를 유지하여 공격하기만 했다면 헬라스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크세르크세스 왕은 징병과 이동 과정에서 보여준 비인간적인 폭정과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본국으로 도망치는 모습은 그의 권위에 대한 집착과 불안을 보여줬다. 또한 아버지와 페르시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복수에 대한 의지도 부족했다.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원정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실패로 끝났고 이는 아테나이를 비롯한 그리스 지방의 팽창 유발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벌로 이어진다.
내가 최고의 지위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최고의 지위를 얻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면 단순히 나의 삶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 헛된 일일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왕들이 그러했고, 인류의 역사에서도 그런 모습은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도 여전히 드는 고민이다. 물론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지만, 그것을 체득하고, 무신론자 및 반신론자들에게도 설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나온 진리를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일일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올바른 사상이 쇠퇴해 나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사상이 처음 뿌리내릴 때는 그 사상을 억누르려는 세력이 존재하여 추종자들이 사상의 본질적인 개념을 체득하다시피 하지만, 압제가 사라지고 나면 새로운 추종자 세대는 사상의 본질적 개념을 깨달으려 하지도 않고 단순히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해당 사상에 대한 간단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쇠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밀은 내가 믿는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반대파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폭넓게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순히 삶의 방향성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며, 내가 앞서했던 질문인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부딪혀가면서 정답을 체득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는 내가 이런 질문을 떠올리도록 도와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수많은 고대 국가들의 기원, 전통과 관습, 전쟁 및 정복사 등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엄청나게 자세하게 각종 사건과 그 배경에 대한 서술이 되어 있고, 여기에는 헤로도토스가 책의 정확도를 위해 수행했던 각종 교차검증과 엄청난 양의 정보 수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책은 단순히 사건만을 서술한 역사책이 아니라 이야기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매우 두꺼운 책임에도 완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