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물
성 적으로 불구가 될 수도 있어요
"아마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2세 계획이 있으시면 정자은행에 가서 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미 나의 병기는 대장암 3기로 90% 이상 확정되어있었기 때문에 수술 전부터 항암에 대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1년 동안은 신혼을 즐기자는 약속 아래 아직 우리 부부에게는 새 생명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보긴 했었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의 삶에 서로를 맞추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을 찾으며 웃고, 다른 점을 발견하며 탄식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비슷하게 맞추어 가던 중이었다.
"난 괜찮아, 자기가 우선이잖아. 괜찮을 거야."
아내는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줄 힘이 어디서 났던 걸까. 그 많은 걱정과 눈물은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채, 이번에도 내 등을 토닥여주며 안아주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를 가질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난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새 생명보다는 우선 내 생명이 더 걱정이었다. 무수히 접했던 암 환우에 대한 이야기들. 좋지 않은 결말들. 내가 그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지금 내 상황에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미리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설상가상 나는 수술 과정에서 과도하게 부어오른 대장 주변의 림프 때문에 배꼽 아래쪽 신경을 모두 끊어야만 했다. 내 미래를, 아니 우리 부부의 미래를 걱정해 주신 집도의사 선생님께서 절제한 대장을 들어내느라 끊어 놓았던 신경들을 다시 이어 주시는 세심한 배려를 해 주셨지만, 수술이 끝나고 1년이 넘도록 배꼽 아래 피부들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감각이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가끔 세게 꼬집어도 보고 피가 날 때까지 긁어도 보았지만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분명히 나는 만지고 있는데 그 감각이 내 손에서만 느껴지는 느낌이란.
항암이 끝나고도 1년을 더 기다렸다. 내 몸이 준비가 되어야 했고,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더 이상 전이도 없고 다시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내가 이제 정상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 있는 경제적, 신체적인 자신감. 그것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렸을 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확신. 공대생 특유의 계산에 의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별 근거는 없지만, 항암제가 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려면 1년 정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1년이면 된다고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나는 그냥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막연히, 1년이 더 지나면 어쩌면 감각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항암을 마치고 8개월 정도가 지날 무렵. 복직을 하고 3개월 정도가 지날 무렵이었을까. 가만히 집에서 티브이를 보며, 여느 때와 같이 아랫배의 감각을 체크하고 있었다. 감각이 없어서 그런지 살도 튼 것 같고, 수술 자국들도 신기하다며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살이 트니까 가렵네."
"로션 좀 발라야 하지 않을까? 어디 좀 봐 봐."
아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윗옷을 가슴까지 치켜올리더니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한다.
"이거 봐, 다 텄네! 로션 좀 바르자."
"어우 귀찮아."
"... 자기야. 근데 가려워?"
가렵다고? 통증만이 감각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가렵다기보다는 약간 가려운 것 같은 느낌에 가까운 것 같다.
"감각이 돌아오는 건가?"
나는 다시 추켜올린 윗옷을 내 목과 쇄골로 고정시켜놓고 본격적으로 진단을 하기 시작했다. 긁어보고 꼬집어 보기도 했다. 이런 자극에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피부 안쪽에서 약간씩 가려운듯한 느낌은 확실히 있었다. 아직 희망을 갖지는 말자. 더 지켜봐야 한다. 설레발치며 미리 먹은 희망의 씨앗은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지켜보자. 이러다 말 수도 있잖아. 아내에게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쿨하게 말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은 그 적은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했다. 아니야. 아직 몰라. 아닐 수도 있어. 아닐지도 몰라.
그 날 이후로 나는 습관처럼 아랫배의 감각을 체크하고 긁고 쑤시고 꼬집으며 감각을 돌리기 위해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감각이 되살아 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감각이 완전히 다 돌아온 것인지, 아직도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2세를 가질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감각을 되돌리는 훈련은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적처럼 감각이 전혀 없던 내 피부는 조금씩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항암이 끝난 후 1년이 지나고, 나는 아내와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내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내가 건강한지. 내가 아빠가 되어도 문제가 없을지. 내가 아빠가 된다면, 내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게 되지는 않을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되도록 빨리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암으로 어떤 세포가 어떻게 손상되었을지 모르고, 그게 훗날 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친 후, 산부인과에서는 우리를 더 이상 환우와 환우의 배우자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마음 걱정이 앞서 임신이 잘 되지 않는 여느 평범한 부부로 대해주었다. 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아내의 몸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회사를 마치고 퇴근버스에 몸을 싣던 그 날. 노을이 예쁘게 지던 그 날. 고속도로가 막혀 아주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 잠에서 깨 버스에서 노을을 바라보던 나에게. 고속도로의 길바닥을 보며 멍하니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던 나에게. 아내가 톡을 보내왔다.
선명한 두 줄.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봤다. 여보. 여보. 재빨리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울고 있거나, 울었던 것 같았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여보 이거 뭐야. 알았지만, 직접 듣고 싶었다.
"여보, 우리 아기가 생겼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을날. 늦은 오후. 차장 밖은 붉은 노을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붉은 세상 아름다운 노을 빛은 버스 안까지 스며들어와 내 몸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았다. 어느 하늘에선가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고속도로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노을빛을 타고 들어와 내 무릎에 떨어졌다. 이 보다 따뜻한 가을이 있을까. 여보 고마워. 봄날의 꽃잎 같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얼른 가겠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아내와 통화를 마쳤다. 아내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나도 아빠가 될 수 있구나. 아직 암환자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한 나도 아빠가 될 수 있구나.
아가야, 우리에게 와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아빠의 아이로 태어나면 가족력이 네 뒤를 쫓아다니겠지만, 걱정 마 아빠가 더 잘해주고 보살펴 줄게. 건강하게만 태어나 주렴. 아빠가 다 해 줄게. 뭐든 다 해 줄게. 아빠가 빨리 완치될게. 더 건강하게 너의 아빠가 될게. 아가야, 여보,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퇴근버스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이 보다 더 행복한 퇴근길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