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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May 03. 2016

막간극: Aphorism #6

1.싸구려 보석은 아무리 드러내고자 해도 둔탁해 눈에 띠지 않지만 귀한 보석은 아무리 숨기고자 해도 밝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2.모든 것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남아있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보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죽고 싶다>는 <살고 싶다>를 다른 맥락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학문은 사고를 강화시키는 무기다. 글쓰기 연습이란 따라서 그 무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훈련이며, 토론의 장은 그 무기의 위력을 시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쟁터이다.

5,싸움으로서의 주먹질과 복싱으로서의 주먹질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토론은 지식의 합을 겨루는 일종의 스포츠라는 점에서 말싸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6.문장은 무게를 갖는다. 때문에 무거운 문장은 더 깊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반면 가벼운 문장은 마음의 외피에 머물다 아무도 모르게 증발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7.논쟁적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사람과 토론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상대의 논증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도 그것이 어째서 타당치 않은지 납득하지 못하고 상대의 근거가 부당함을 보여도 그것이 어째서 부당한지 납득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논박은 논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8.자신이 언제나 옳다는 생각을 하는 토론자보다 최악의 토론자는 없으며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는 토론자보다 훌륭한 토론자는 없다. 마찬가지로 좋은 토론은 자신이 던진 테니스공을 정확하게 받아쳐주는 사람과의 토론과도 같으며 좋지 않은 토론은 상대로부터 받은 테니스공을 다른 곳으로 멀리 던져버린 채 자신이 방금 던진 테니스공은 예술 그 자체였다고 중얼거리는 사람과의 토론과도 같다.

9.상대에 대한 예의와 독해력, 그리고 논리전개의 치밀함은 좋은 토론자를 구성하는 삼대 필요조건이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면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상대를 짓누르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며 독해력이 부족하다면 그는 상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고, 논리전개의 치밀함이 부족하다면 아무리 합당한 결론을 말하고자 해도 온당히 정당화할 수 없는 탓이다.

10.두려움과 막막함에 압도당할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흑암뿐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앞을 응시할 때 우리는 기어이 흑암을 꿰뚫는 작은 빛줄기를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11.필멸의 삶이 갖는 유일한 단점은 필멸하다는 것이며 불멸의 삶이 갖는 유일한 단점은 불멸하다는 것이다.

12.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행함이다.

13.걱정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나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칭 신을 믿는다는 사람이 걱정을 한다면 그는 실상 신을 믿는척만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14.비상은 하늘을 향해 추락하는 것이며 추락이란 땅을 향해 비상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15.문제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6.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것은 결국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이다. 역사에 흉터를 남겨놓은 광인들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며 시대를 앞당겨놓은 천재들이 그토록 대단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 또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17.감정의 영역에서 논리란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눈물 한 방울의 물리적인 무게를 측정하는 것은 가능해도 그것에 담겨있는 감정의 무게는 측정할 수 없듯이.

18.희망 없는 비관주의와 걱정 없는 낙관주의는 한쪽 날개가 찢긴 새와 같다. 삶이라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온전한 비행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주의란 오히려 희망을 끌어안는 비관주의와 절망을 끌어안는 낙관주의에 가깝다.

19.어느 쪽이 잘못된 길인지 분간치 못하는 자는 어리석지만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길을 고집하는 자보다 어리석진 않은 것 같다.

20.현대의 교회는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제공해주는 형태로 소비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위로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위로받기 위해 기도를 하며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갈 뿐이다. 성경에 대한 의문제기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성경공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 아직 네가 믿음이 부족해서란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성경을 산더미같이 둘러싼 학적 논란과 여러 형이상학적 문제에 일말의 관심도 없고 어설프게 바울을 인용하면서 유치한 초등학문이라며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정신승리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왔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변질된 형태의 기복신앙을 발견한다. 위로를 위한 신념과 진리추구를 위한 신념이 혼동되고 있다.

21.비판은 쉽다, 설득이 어려울 뿐.

22.글쓰기가 연필로 문장을 조각해내는 예술작업이라면 수술은 매스로 생명을 붙잡아내는 예술작업이다.

23.오늘 시작하지 않는 자는 내일도 시작하지 않는다.

24.두려움은 불신에서 잉태된다.

25.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실제로 죽음 앞에 진지하게 서본 적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것이거나,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선 신념이 있거나.

26.악의가 눈에 띠게 퍼져가는 전염병이라면 헛소문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으로 퍼져가는 암세포와도 같다.

27.대학서열과 똑똑함의 정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전근대적 머저리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하버드에도 과연 두뇌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자는 많으며 아무도 모르는 이름 없는 도시의 지방대에도 천재는 있는 것인데.

28.삶이 도화지라면 감정은 색깔이며 붓은 관점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화지는 한정돼 있으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물감도, 붓도 언젠가는 예전만큼의 윤기를 잃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그리는 삶의 관측자이자 붓의 노예로서 도화지에 담겨지는 내용을 주의 깊게 조망하고 치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9.분노는 이따금씩 드러나 버린 자신의 약점을 숨기고자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적 책임전가 행위에 불과한 것 같다.

30.입의 무게는 가볍지만 진심의 무게는 그렇지 않다.

31.현실에 붙여지는 이름은 현실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다.

32.싸울 때는 진심으로 싸우라. 그리하지 않으면 실력은 결단코 늘지 않는다.

33.자기성찰은 자신을 더 첨예하게 깎아내고 반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정신승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날 봐봐 난 우월해라고 외치며 그것에 자기성찰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기성찰이 아니라 자기위로와 인정투쟁의 흔적이자 성찰이라는 단어의 무분별한 남용에 불과하다.

34.대체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을 놓치는 것은 지나간 사랑을 위해 다가온 사랑을 떠나보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35.자신의 고통은 그것에서 한 발자국 물러설 때 해소되지만 무릇 타인의 고통은 그것에 한 발자국 다가설 때만 해소되곤 하는 것이다.

36.종교인으로 비춰지는 것이 부끄럽다면 차라리 믿음을 버리시라. 고작 그 정도로 신념을 믿음이라 부르는 것은 믿음이라는 무거운 단어에 대한 남용이다.

37.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변명은 상처의 두려움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며 상처로 인해 관계를 끝내자는 말은 사랑의 깊이가 고작 그 정도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며,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서 아픔과 상처는 극복되어야할 그 무엇이지 관계를 포기하면 그만인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38.오늘의 습관이 내일의 고삐를 쥐고 있다는 것─그것만큼 우리에게 외면당하는 진실이 있는가, 습관의 손에 인생 전체가 달려있는 데도!

39.재능 없는 야망은 허영이고 야망 없는 재능은 낭비다.

40.유명인사에 대한 비판의 원동력은 왕왕 자기만족에 있는 듯하다.

41.갓 사귄 사람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막 헤어진 사람보다 증오스러운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42.언제나 진지한 사람은 피곤하고 언제나 가벼운 사람은 알맹이가 없다. 진지한 사람이 조금의 바람에도 쓸데없이 심각한 체한다면 가벼운 사람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가 버린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저물어가는 인류를 읽어내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깔깔거릴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사상가도 울고 갈 만큼의 진지함과 그 어떤 광대도 저리가라 할 만큼의 가벼움을 겸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유쾌한 사람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 아니던가─

43.비교는 발전가능성에 한계를 긋는 것에 다름 아니다.

44.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에게 높일 것이 있기 때문에 높이는 것이 아니라 높일 것이 없기 때문에 높이는 듯하다.

45.그저 그런 문장이 담긴 그저 그런 내용의 책들. 종이에 대한 그보다 더한 모욕은 없다. 휴지는 쓸모라도 있지 이들에겐 그마저도 없다.

46.순간을 살아내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질 기회 따위는 없다.

47.자신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옷이 있고 타인에게는 타인에게 맞는 옷이 있듯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고 타인에게는 타인만의 길이 있는 법일 진데 아직도 주위를 힐끔이는 조바심은 무엇 때문인지.

48.발전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남겨두느냐 실현시키느냐에 모든 차이가 달려있다.

49.음악의 아름다움, 음조 사이의 침묵에 깃들어있는.

50.상처에 익숙한 사람은 있어도 상처에 단단한 사람은 없다.

51.연습은 배신하지 않는다, 상황이 배신할 뿐.

52.아픔보다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없지만, 아픔보다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것 또한 없다.

53.완전히 악하거나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 악인에게도 한 줌의 선은 있으며 선인에게도 한 줌의 악이 있는 법이다.

54.비관주의로 점철된 인간이 장님인 이유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가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낙관주의로 점철된 인간이 장님인 이유는 밝은 빛에 가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55.인간은 쓰러지면 쓰러질수록, 다치면 다칠수록, 아프면 아플수록, 그리고 울면 울수록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더 쓰러지고, 더 다치고, 더 아프고, 더 울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나는 더 강해져 갈 테니.

56.자신에게 무엇인가가 결핍 돼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자신의 한 부분이었기에 이제까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결핍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가면서 마치 독소와 같이 머금고 있던 고통을 내뱉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 결핍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57.완전함으로서의 회귀에 대한 갈망. 모든 삶들은 그것을 머금고 있다.

58.누군가를 상처 입히기 위한 지혜는 없느니만 못하다.

59.고통과 인내 없는 행복은 무의미하다.

60.나는 삶에 있어서 불필요한 지점은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미래에 내가 어떤 일을 겪게 된다 해도 나는 분명 그 순간에 겪을 일련의 경험과 시간을 통해 무언가 값진, 다른 그 어떤 경험이나 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나는 그렇기에 더 이상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관해 나는 침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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