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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세네카는 영혼을 올바르게 빚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고 러셀과 야스퍼스는 그냥 답을 얻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했으며 포이어바흐와 버클리는 지혜와 진리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철학자들이 제각기 다른 답변을 내고 있고 그나마 있는 답도 미개인들의 계몽을 위해 준비된 무슨 미스터리한 궁극의 비기처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양반들의 정의는 그리 도움이 되진 않는듯하다. 그렇다면 철학은 정의될 수 있는가? 정의될 수 있다면 철학의 내포와 외연을 규정짓는 원소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용어의 정의가능성은 그 용어에 해당하는 원소들과 해당하지 않는 원소들을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다. 가령 예술은 가족유사성을 갖지만 명확한 공통분모가 없기에 정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좌우간 예술인 것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해야 예술이 기능할 수 있듯 철학인 것과 철학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면 철학이라는 보통 명사는 공허한 용어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이 단어의 정의를 세심하게 추적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음의 진술을 생각해보자.

(P) 내 삶의 철학은 확고부동하다.
(Q) 그는 철학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R) 나는 대륙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P)에서 사용된 철학이라는 단어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지칭한다. 반면 (Q)에서 의미하는 철학관은 사주팔자와 운세를 점치는 장소를 의미한다. 전자가 ‘철학’의 다의성을 보여준다면 후자에서의 ‘철학’은 사실상 ‘철학’과는 독립적인 다른 그 무엇을 지칭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은 (R)에서 사용된 철학, 그러니까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이때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개념과 믿음체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인간과 세계에 대한 논증적, 논리적 탐구. 흔히 정의되는 방식으로서의 철학이다. 허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역시 인간과 세계를 ‘논리적’으로 탐구하지 않는가?

철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타 학문의 정체성까지 논의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제도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사실상 그 탐구의 영역에 제한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ㅡ존재, 인간, 세계, 가치, 언어, 이성 등ㅡ이 철학의 탐구대상이라면 자연세계의 작동원리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개인 그리고 그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내 역학을 탐구하는 사회과학 역시 철학의 한 분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플란팅가의 주장처럼 철학이 <단지 깊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외연은 심도 있는 사고를 동반하는 모든 학문과 방법론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확장돼야 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사고의 깊이>라는 표현이다. 단지 깊게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철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면 철학이라는 용어는 학문 그 자체로, 그리고 더 나아가 모종의 사고 작용으로까지 번역될 수 있어야한다. 모든 학문은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할뿐더러 굳이 체계적인 학문적 담론에서가 아니더라도 깊은 사유를 요하는 문제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은 공허한 명칭이 되며 우리는 귀류법을 사용해 <깊은 사고>가 철학의 필요조건일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바를 연역할 수 있다. 플란팅가의 주장은 즉 철학의 필요조건이나 일종의 메타포에 대한 이야기로 파악돼야 한다.

좀 더 좁은 정의가 필요하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철학인가? 아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기술적(descriptive) 과학이다. 자연과학이 원자들의 집적물로서의 책상이 갖는 물리적 성질을 다루는 데서 그친다면 철학은 책상에 대한 감각소여와 책상 그 자체를 구분하며 책상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동인들과 책상을 책상으로 여기게끔 하는 인식의 개념적, 인지적 조건을 묻는다. 철학은 분명 광자의 정지질량과 스핀이라거나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침팬지의 면역력 강화를 위한 유전자 조작 프로토콜이라거나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시장 내의 사회정치적 역학이나 발음기호를 읽는 법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철학의 집합은 <자연과학/사회과학의 집합, 그리고 철학을 제외한 인문과학 전반>과 동치가 아니다. 철학은 다른 그 어떤 규준적 학문에서도 하지 않는 무언가를, 말하자면 철학을 철학으로 만드는 작업을 그 방법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칭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사실적 탐구를 채택하는 타 학문과 구분되는 어떤 개념적 탐구인가? 그런데 철학은 개념적 탐구를 시도하는 유일한 학문인가? 애초에 개념적 탐구란 무엇인가? 이론적인 층위에서 이러저러한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라면 정치학에도 경제학에도 심리학에도 적용되는 탐구방식이 아닌가? 아니다. 타 학문에서의 이론은 실제 현실과 대응시켜 진위여부를 확증하거나 그 개연성을 검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철학적 담론에서의 이론은 타 학문에 의해 실증되기 전까진ㅡ또는 철학적 담론 내의 다른 이론에 의해 논박돼 폐기되기 전까진 논증적 차원의ㅡ이론으로 남는다. 가령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가?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존재하는가? 아르마딜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사람은 남아메리카로 여행을 떠나보면 될 일이겠고 생각보다 상당히 귀엽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자유의지의 존재나 보편적 도덕법칙은 물리적으로 실증될 수 없다. 즉 철학의 문제들은 철저하게 개념적, 논증적인 차원에서 다뤄진다. 제아무리 홉스와 돌바흐가 결정론을 옹호하고 어거스틴과 에이어가 비결정론을 주장해도 자유의지는 어찌되었든 특정 논증의 설득력과는 별개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으며, 크레이그같은 인지주의적 도덕 실재론자가 아무리 객관주의에 대한 그럴싸한 논증을 제시하고 몽테뉴와 니체가 제아무리 비인지주의적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해도 도덕법칙은 그와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철학은 이론에서 시작해 이론으로 끝나는 물음들/답들과 그에 대한 끝없는 반론/의문점을 제기하는 작업에 가까운 것 같다. 실제로 철학에는 어느 분과든 딱히 정설이라 부를 만한 게 없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하든 그 주장에 반대하는 철학자는 언제나 한 명 이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철학적 의심의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사회학은 일단 사회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하고 자연과학은 관찰 가능한 유물론적 물리세계가 존재한다는 공리위에서만 기능하며 심리학은 일단 인간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지만 철학은 사회와 자연세계를 회의하고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하며 심지어 파이어아벤트처럼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합리적인 방법론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은 (S)<모든 것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학문>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아니다. 철학이 모든 것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학문인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S)에서 의미하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원소들을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것>의 집합에 <알 수 있는(intelligible) 것의 집합>과 <알수 없는(unintelligible) 것의 집합>이 있다면 우리는 사실상 모든 것에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아직까지 철학적 담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개념적인 문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의 정의 (S)는 다음과 같이 교정된다:

(S’) 믿어질 수 있는/믿음의 대상이 되는 모든 명제들, 또는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회의하는 학문.

꽤나 그럴싸한 정의다. 하지만 철학이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회의한다는 진술은 참인가? 회의 불가능한 것ㅡ좌우간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의 그런 것ㅡ까지 회의될 순 없겠지만 <회의가능한 모든 것>은 즉 <원리적으로 회의가능한 모든 것>과 <논리적으로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허나 회의가능한 것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데카르트의 코기토 언명을 생각해보자. 나는 원리적으로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회의하고 있지만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회의될 수 없다.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의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회의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하는데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의하는 순간 나는 어찌되었든 회의하는 나를 회의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나의 회의에 회의하기 위해 <나는 기실 회의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명제만큼은 회의해선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적어도 누군가─그게 나건 내가 아니건 좌우간 어떤 존재자─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논리적으로 회의불가능하다. 즉 우리는 <회의가능한 것>을 <회의불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하여 앞서 정의된 방식에 따르면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이와 같은 모든 경우를 배제한 <논리적으로 회의가능한 범주 내에서의 모든 것>만을 다룬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보기엔 이상한 부분이 많다. 철학, 예컨대 과학철학은 자연과학의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의심한다. 하지만 철학은 물리적 사실들, 예컨대 중력은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거나 디옥시리보핵산은 각각 두 개의 퓨린과 피리미딘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명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별다른 회의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라는 점을 본다면 문제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하다. 가령 나는 분자생물학 시간에 실험실에서 유전자를 복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데닌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긴 하지만 내가 이를 믿는 이유는 위성사진 외에도 자연과학의 권위자들이 하나같이 둥근 지구론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직접 우주에서 구체의 지구를 본 적이 없으므로 지구는 어쩌면 별모양이거나 세모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지구라는 구체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거대한 당근 스프 위를 떠다니는 이동식 마이크로 침대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눈 셋 달린 난쟁이 고블린일지도 모른다.

러셀이 언젠가 지적했듯 육안으로 본 것도 믿을 수 없다면 전자현미경이나 위성사진으로 본 것을 믿어야하는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다른 사람들이 로봇이 아닌 실존하는 인간들인지도 의심할 수 있고 1+1=2라는 자명한 분석명제조차 의심할 수 있는데 철학은 어째서 지구는 둥글다거나 광속은 상수라거나 고양이는 포유류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인가? 분명, 철학은 회의가능한 많은 것을 회의하지만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회의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아마 (1) 자연과학의 모든 분과들이 정합적으로 옹호하고 있는─소위 과학적 사실이라 부르는─경험적 명제들이 있으며 (2) 이러한 명제들을 받아들이면 상당히 유용하고 (3) 애초에 그러한 명제들을 부정할 별다른 근거도 없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철학에선 (회의가능한 모든 것을 회의할 수는 있지만) 회의할 필요가 있는 것만 회의한다. 정의 (S’)는 이로써 다음과 같이 교체된다:

(*S’) 논리적으로 회의가능한 범주 내에서의 모든 것 중 회의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선택적으로 회의하는 학문

허나 이 정의는 괴이하다. 모든 학문은 회의가능한 모든 것 중 회의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들을 선택적으로 회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연과학은 경험초월적 존재자와 신비적 호소를 통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논변을 회의한다. 자연과학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기계론적, 인과적 유물론에 독립적일 때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은 탈유물론적이거나 비물리적 실체를 긍정하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보자면 (*S’)은 반드시 철학에만 해당되는 정의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철학은 대체 무엇인가? 철학의 분과에는 인식론, 윤리학, 과학철학, 정치철학, 형이상학과 논리학 외에도 언어철학, 심리철학, 수리철학과 분석철학 등등을 포괄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철학의 외연들을 완벽하게 정의해낼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는 철학의 내포를 좀처럼 규정지을 수 없다. 철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결국 부정신학에서의 신에 대한 접근처럼 단지 부정적으로만 정의(Negatively defined)될 수 있는 것인가? 철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다. 이게 얼마나 난감한 상황이냐 하면, <철학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음 일단 수학은 아니고요, 물리학도 아니고...> 갚은 식의 답밖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내가 전공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조차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라니! 자, 그렇다면 이 정의는 어떤가?

(T) 철학은 정의될 수 없는 유일한 학문이다.

그런데 이 정의는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T1) 철학은 결코 정의될 수 없는 유일한 학문이다.
(T2) 철학은 정의하기 어려운 유일한 학문이다.

안타깝게도 (T2)마저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T2a) 철학은 정의하기 어렵지만 잘하면 정의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다.
(T2b) 철학은 정의하기 어렵고 정의될 수도 없는 유일한 학문이다.

개인적으로는 (T2a)가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하지만 이중 어느 것이 합당한지 나는 알 수 없다. 철학자들은 단 한 번도 철학의 정의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두가 합의하는 철학의 정의를 생각해내는 것은 불가능할듯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모두가 동의하는 철학의 정의가능성은 물론 0퍼센트가 아니다. 즉 철학의 정의가 그 자체만으로 철학적 문제이듯이 철학의 정의가능성도 그 자체만으로 철학적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철학인 것과 철학 아닌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철학자와 철학자 아닌 인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T)는 철학에 대한 신선한 정의이긴 하지만 만약 정의될 수 없는 학문이 두 개 이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철학의 정의로서의 (T)는 부적절한 철학의 내포가 되기 때문에 <철학은 곧 정의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학문>이라는 가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복잡한 논의가 요구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쩌면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정의하는 것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박사 학위도 없었고 글도 쓰지 않았는데 그저 사람들에게 성가시게 질문을 던지다보니 철학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주장의 근거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곧 철학하기인가? 잘 모르겠다. 그러한 것은 자연과학에서도 한다. 옆집 강아지는 철학자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니 철학자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강아지가 사유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강아지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허나 내가 철학을 정의내릴 수 없다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철학공부 따윈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어쩌면 철학의 분과들은 느슨한 가족유사성을 갖는, 따라서 그 공통분모의 엄밀한 정의가 불가능한 원소들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철학을 정의함에 있어 그 외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하거나 어설프게 고안된 불안전한 정의에 만족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침묵하는 수밖엔 없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철학의 정의규명 시도는 그 자체로 철학적인 작업이다. 그러므로 설혹 철학을 시원하게 정의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철학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철학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다. 철학을 정의하는 작업은 요컨대 철학하기(philosophizing)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ostensively demonstrating) 작업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철학의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쉽사리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철학하기를 보여주는 것이 철학이며 철학하기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설명되어지는 것보다는 보여지는 것에 가깝다. 철학은 철학하기를 통해 비로소 스스로의 철학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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