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흥미를 느꼈다.
철학 서적을 뒤져 볼 여유는 없었지만, 빈번히 자문했다.
삶이라는 명사 자체가 흥미로웠다.
“삶이 무엇일까?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같은 추상적인 질문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품었다.
20대가 된 지금도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래서 흥미롭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학습의 성격보다는 실천의 성격이 강하다.
위대한 철학가들의 사상을 보고 배우되, 그것을 진리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해하고 사색하고 확립해야 한다. 자립적인 사고를 연습하고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려봐야 한다.
삶, 혹은 인생이라는 명사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수만 가지의 모습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를 마련했다면 추구할 만한 삶일 테다.
이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삶은 강보다는 바다이고, 평지보다는 산이다.
업적보다는 과정이 남고, 추억보다는 경험이 남는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찰해 보기 위해선 삶의 목적을 확립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
목적은 방향을 잡아준다. 철학을 유도한다. 진보하는 동력을 만든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생성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필자는 최고의 ‘나’를 만나기 위해 산다.
인간으로서 어느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삶에 대한 호기심만큼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 이런 목적을 자아냈다.
예상했던 한계와 마주친 뒤, 그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장에 초점을 맞춘 삶은 단순하게 흘러간다.
주요한 일들에 집중하고, 인내와 부단함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사실이다.
내가 ‘나’이기 이전에 삶이란 단어는 부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 녹아들어 개인이 아닌 사회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고한다고 느끼는 이들 중 다수는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피지배적인 삶을 선호하며, 책임감을 회피하고, 안정성을 추구한다.
무리에서 이탈하길 두려워하고, 철학적인 사고는 결여되어 있으며, 자신의 욕망보다는 다수의 욕망에 집착한다.
이런 현상이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회통념을 마주치게 된다.
큰 위기, 결핍, 혹은 뚜렷한 사건 사고가 없는 삶을 살았다면 굳이 자신의 삶을 숙고할 순간이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절대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필자의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강요보다는 제안이고, 숙고해 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한다.
이론적으로는 온전하고 독창적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사람이 고유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문제들이 파생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의도적으로 통치에 유리한 교육과 이념을 주입하고, 대중은 이질감을 느끼지 못 한 채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질감은 느끼더라도 순응한다.)
그러다가 돌연변이가 등장하면 그자를 비난하고, 배척하려 든다.
오묘한 현상인 것이 마치 똥이 금을 나무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 경험 이후에 돌연변이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생각을 품고 무리에 종속되는 유형.
“저들은 이해하지 못 해.”라는 주관을 갖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유형.
대중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행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전적으로 무지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돌연변이라면 계속하여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들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세대 사람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데에 가장 취약한 세대라고 판단한다.
이전 세대에 살아보지는 못 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쉽게 친구를 가지고 있다.
잠금 하나만 풀면 수만 명의 친구들이 화면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SNS에 중독되는 현상보다,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은 외부의 무언가이다.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시선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외부의 자극들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들여와 이를 재생산하고 창작의 거름으로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강한 과정에만 몰두하기에는 과도한 자극들이 존재한다.
세상 반대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우리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친하지도 않은 친구가 어디에 누구와 여행 갔는지 등 말 그대로 정보 과잉이 도래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대인들은 선택과 결정을 꺼린다. 다시 말해 정보들을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닌 보다 보니까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불필요한 관심은 머지않아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조장된 악순환 때문에 정작 자신에게 들이는 시간과 관심은 부족해지고 획일화된 개인들이 늘어난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취향, 욕망, 꿈, 이상 같은 내면의 고유한 가치들에 대한 자답을 끌어내야 한다.
문학 작품, 특히 명서에 가깝다고 평가되는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멈춰 있는 주인공은 없다. 모두가 동적이고, 시도하고, 변화한다.
나는 우리의 삶 또한 비슷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통해 나에게 맞는 혹은 어울리는 정서와 방식을 찾아야 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타인이 세운 기준 안에서 영위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서 뛰어놀아야 한다.
젊은 놈이 무슨 세상을 통달한 듯 아니꼬운 시선으로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읽고 당신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재고해 봤으면 한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본서는 한 명의 의견이자 숙고의 결과일 뿐이다.
개인은 발현하는 모든 것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반응이나 평가로 자신을 인식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돼서는 안 된다.
글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예상치 못 한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
희망을 보고 탈피를 원하는 사람,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만나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지식은 전달될 수 있어도, 지혜는 전달되지 않는다.”
위 문장에 깊이 동의한다. 그렇기에 나는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압박하고 싶지 않다.
그저 어느 순간 상기되거나 영감을 줄 수 있기만을 소망할 뿐이다.
나는 아직 세상을 탐험하는 중이다. 자유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사유하고 행하고 창작하는 중이다.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미소와 경청하는 여유에서 걸어온 길이 드러났으면 한다.
그리고 여행이 끝날 때쯤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다. 이것이 내가 말한 ‘삶’이었다고, 그때와 지금 달라진 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