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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Mar 13.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2

초대 죠지 워싱턴 - 2 of 6 :  청년기  1732 - 1759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桐熏]  죠지 워싱턴 (1732 – 1799)은 11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주위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공부도 하면서 잘 자랐겠지요?

[해월]  죠지가 태어났을 때 주위에 자기와 놀아 줄 형제가 없었어.  두 형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영국에 데려다 놨기 때문이야.   두 이복형 로렌스와 오거스틴 주니어는 죠지가 태어나기 전인 1729년 아버지 오거스틴 시니어의 손을 잡고 영국의 애플비-인-웨스트모어랜드 (Appleby-in-Westmorland)에 있는 애플비 그래머 스쿨 (Appleby Grammar School)로 유학 가서 중, 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9년 뒤인 1738년에 돌아왔지.  그러나 죠지는 형들처럼 영국 유학은커녕 미들섹스 (Middlesex) 카운티 하트휠드 (Hartfield)에 있는 조그마한 감리교회인 로워 처치 (Lower Church)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어.  나중에는 William이라는 선생님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고 해.  그러면서 수학, 삼각법 (trigonometry) 등을 익히고 토지측량술 (land surveying)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 제도공으로서 지도제작 기술도 터득하기 시작했어.  또한 10대 들어 정밀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작문실력과 글씨솜씨를 키우기 위해 사회범절에 관한 내용들을 복사하는 훈련을 다졌어.  그의 서명에서 보다시피 노력만큼 아름다운 필체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버지니아 주 하트휠드에 있는 Lower Church.  국가사적지로 지정됨.


[동훈]  영국 유학까지 갔다 온 형들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겠네요.  교회 안에서 배우는 공부가 만족지 못했을 것 같고요.

[해월]  그렇지?  당시에야 어린아이들에게 영국유학은 큰 로망이었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죠지라는 사람이 영국인 혈육이면서 나중에 영국을 적으로 대하며 독립전쟁을 치렀던 이면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인데, 특히 독립전쟁에서 식민지군 총사령관직을 맡으면서 모든 책임을 안게 된 것에는 개인적 감정도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반영국 무드에 부응했다는 것이 당연한 이유겠지만, 그 이면에는 영국유학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 영국군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식민지군 고급장교가 영국군 초급장교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 등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라는 결정적 순간에는 매우 감정적으로 발동하지 않았나 생각하지.  천천히 살펴보면서 같이 생각해 보자.    


[동훈]  이해가 갈 것도 같네요.  동경의 대상에게서 거부당했을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응어리져 남아 있었겠다는 말씀이시네요.

[해월]  어쨌든 죠지라는 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영향을 크게 미친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  죠지의 성장과 정치적 뒷배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특히 버지니아 주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훼어훽스 (Fairfax) 카운티라는 지명의 공여자인 영국 귀족 토마스 훼어훽스(Thomas Fairfax, 6th Lord Fairfax of Cameron. 카메론의 훼어훽스 남작. 1693 – 1781) 6대 남작과 그 가문사람으로 그 보다 먼저 미국에 건너와 살면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던 윌리엄 훼어훽스(William Fairfax.  1691 – 1757) 하원의원이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이복큰형 로렌스(Lawrence Washington.  1718-1752)야.


                                      윌리엄 훼어훽스                        로렌스 워싱턴


[동훈]  그렇군요.  훼어훽스라는 이름은 아주 익숙한데요?  그분들과 깊은 인연이 있나 보죠?

[해월]  토마스 훼어훽스 남작과 윌리엄 훼어훽스 하원의원과의 만남은 10대의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죠지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지.  윌리엄 훼어훽스는 형 로렌스의 장인이기도 한데, 죠지는 형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집이 있는 마운트 버논(리틀 헌팅 크릭)과 훼어훽스의 집이 있는 벨보아 (Belvoir) 농장(이곳은 후에 훠트 벨보아(Fort Belvoir.  벨보아 요새)로 이름을 바꾼 군사지역이 됨)을 자주 왕래했는데 그때 형을 쫓아 같이 갔을 거야.  


[동훈]  큰형 손잡고 부잣집에 놀러 가서 맛있는 것 많이 먹을 테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해월]  하긴 그럴 때가 제일 좋지.  나도 아버님이 조그마한 내 손을 잡으시고 아버님 좋아하시던 중국집에 데려가곤 하시던 1950년대 옛 추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하지.  훼어훽스는 아버지가 없는 죠지에게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대리부 역할도 자처했어.  특히 죠지가 토지측량 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그 기술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면허가 있는 사람보다 먼저 그에게 일감을 주었지.  죠지가 16살 때인 1748년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쉐난도 벨리(Shenandoah Valley) 토지의 측량을 맡기기도 했어.  일을 맡은 죠지는 측량팀과 함께 꼬박 한 달에 걸쳐 그 임야를 측량하는 성과를 냈고.  죠지가 그다음 해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서 측량사 면허를 받았을 때는 아직 조수로서 훈련도 받지 않은 죠지를 1749년 7월 20일 인근 컬페퍼(Culpeper) 카운티의 정식 측량사로 임명되도록 힘을  썼지.  정식 공무원이 된 죠지는 신나게 측량사 일을 하면서 버지니아 주 일대 지역에 대한 토양지식을 늘려 나갔어.  이를 바탕으로 1,500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더 사들여 1752년 막 스무 살이었던 그가 소유한 땅이 2,315 에이커(약 283만 평)가 되었어.  컬페퍼 카운티 측량사직은 1750년에 그만두었지만 토지 측량일은 한동안 계속했어.  


[동훈]  죠지가 인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를 이르시는 말씀이셨네요?  이런 복을 누가 마다하겠어요?

[해월]  죠지가 갖고 태어난 복은 참으로 많아!  특히 아래에서 보다시피 그는 인복과 재복이 그리고 관복이 넘쳐나는 하늘이 보낸 사람 중 하나였을 거라 생각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은 하늘이 만든 사람’(God made Donald Trump!)이라고 허풍을 떨고 있지만 말이야.  앞서 설명한 1748년 16살의 죠지가 쉐난도 벨리에 있는 윌리엄 훼어훽스의 토지를 측량했을 당시 버지니아 주에 나와 살고 있던 토마스 훼어훽스 남작도 죠지를 만나보고 그의 젊음과 패기에 감동하면서 그에게 버지니아 주 블루 릿지 (Blue Ridge) 서쪽에 있던 그의 땅 측량을 맡기기도 했지. 


[동훈]  와!  훼어훽스 남작은 엄청난 땅부자로 소문난 분이잖아요?  영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미국 내 땅이 대단했다고 하던데요?

                                                               훼어훽스 남작


[해월]  영국에서 미국에 이주해 자리 잡고 자신의 땅을 돌보고 있던 조카 윌리엄 훼어훽스와 같이 살기 위해 1746년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미혼이었는데, 죠지를 귀여워하면서 많은 지원을 하게 되었어.  특히 죠지가 성장하여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이 훼어훽스 남작이 앞장서서 사람소개에서부터 알게 모르게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아.  이 훼어훽스 남작이 바로 버지니아 북쪽 광활한 지역과 쉐난도 벨리 (Shenandoah Valley)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5,282,000 에이커 (약 64억 6천5백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1709년 작위를 이어받으면서 물려받아 소유한 사람이야.  


[동훈]  네?  65억 평이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땅인가요?  

[해월]  계산이 잘 안 되는 규모지.  자!  여의도 면적이 약 88만 평 정도 된다고 하니까 여의도 규모로 한 8,000개 정도 모인 땅 사이즈가 되는 거야.  조그마한 영국이 광활한 신대륙 미국을 발견하고 점령하면서 귀족들에게 땅을 마구 쪼개준 모양새인거지.  물론 영국을 위해 일을 한 사람들에게도 급료 대신 땅으로 지급하기도 했고.


[동훈]  그 두 분 말고 큰형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하셨는데요?

[해월]  맞아!  아버지 오거스틴 워싱턴 시니어와 첫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로렌스(1718 – 1752)와 오거스틴 주니어는 1729년 아버지를 따라서 영국으로 가 ‘애플비 그래마 스쿨’에서 공부를 마치고 1738년 버지니아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어.  로렌스는 영국에서 돌아와 21살 성인이 되면서 나중에 유산으로 받는 리틀 헌팅 크릭 농장(현재의 마운트 버논)의 주위에 있는 땅을 자기 이름으로 사들이기 시작했지. 그러다 1739년 영국의회에서 카리브해 일대 군도에서 영국과 대치하던 스페인군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미국 식민지에 보병연대를 만들기로 결정하지.  ‘윌리엄 구치대령의 보병연대’ (Colonel William Gooch’s Regiment of Foot)라 이름부친 이 연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당시 버지니아 주 부주지사로 근무하면서 민병대 책임도 맡고 있던 윌리엄 구치가 22살의 로렌스를 1740년 7월 10일 대대장에 임명하면서 군생활을 하게 되었어. 


[동훈]  책임자면 그렇게 아무나 군 지휘자로 임명할 수 있었나 보죠?

[해월]  잘은 모르지만 이미 로렌스가 아무 나는 아니었을 거야.  농장의 주인이라는 지위는 식민지에서는 이미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거지.  거기에다 로렌스는 훼어훽스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을 거야.  어쨌든 로렌스 대대와 3개 대대는 1740년 8월 당시 버지니아 수도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 집결하고 영국으로부터의 본대를 기다렸지.  해군제독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과 육군준장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 두 장군이 함께 이끄는 영국군은 1741년 1월 말 마침내 카타기나(Cartagena.  콜럼비아에 있는 항구)에 있는 스페인군 요새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로렌스는 버논 제독이 타고 있는 프린세스 케로라인 (Princess Caroline)호에 버논제독의 부관으로 승선하여 후세에 ‘젠킨스의 귀 전쟁’ (War of Jenkins’ Ear)이라고 명명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어.  

로렌스는 이 카타기나 전투와 뉴 그래나다(New Granada) 항구 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쿠바의 2대 도시 산티아고 드 쿠바 (Santiago de Cuba) 시를 공격하기 위한 관타나모(Guantanamo) 항 상륙작전에도 참전했지. 그리고 파나마에서의 전투에도 참전했어.  

이때 전투에서 사망한 전사자보다 '옐로 휘버'(yellow fever.  황열병)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해. 식민지 사람으로 결성된 부대원의 90%가 이 병으로 사망하고, 영국에서 온 군인들도 상당수 사망했지.  처음 출정할 때 식민지에서 결성된 군인이 3,255명이었는데 1742년 10월 24일 멀쩡히 살아서 돌아 간 사람이 겨우 147명이었고,  268명은 부상자 또는 병든 환자였다고 해.    

버논 제독이 이끌던 프린세스 케로라인호는 다행히 일 년 정도 이미 카리브해에 정박해 있었던 관계로 황열병에 노출되어 면역상태가 좋았고 그 전함에 승선해 있던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았다고 하지.  전투가 끝나고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 로렌스는 마침 민병대 부사령관 자리가 공석인 것을 알고 바로 지원했는데, 구치 부주지사 겸 사령관은 1743년 봄 그를 소령으로 진급시키면서 민병대 부사령관에 임명했어.


Princess Caroline 호와 동급인 80 포문의 전함


[동훈]  25살이면 아직 젊은 나인데 소령에다 부사령관이 되었다니 놀랍네요.

[해월]  그 당시에는 어리지도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던 것 같아.  죠지도 비슷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여하튼 눈부신 성공을 한 로렌스는 그해 7월 윌리엄 훼어훽스의 큰 딸 앤(Anne)과 결혼하게 돼.  전쟁에서 돌아와 리틀 헌팅 크릭 농장에 짓고 있는 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훼어훽스의 집인 벨보아에 머물고 있던 로렌스는 앤이 성공회 신부 찰스 그린(Charles Green)이 자기를 겁탈했다고 가족에게 고백하면서 이 일로 소송까지 가는 등 깊이 관여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어.  로렌스 부부는 4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하고, 그가 사망한 1752년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딸 사라(Sarah.  1750-1754) 뿐이었지.  그의 유산이 딸 사라에게 갔다가 미망인을 거쳐 죠지에게 유산으로 건네갔다는 것은 전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아.


[동훈]  참 짧게도 살다 가네요.  앞날이 훤히 트인 것 같은 사람이 겨우 34살에 사망했네요.

[해월]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어쩌겠니.  민병대와 주의회 하원의원 (1744 – 1752) 생활을 하던 로렌스는 당시 주위 정치인들이 망라된 토지투자회사 오하이오 컴퍼니(Ohio Company)를 동생 오거스틴 주니어와 함께 설립하여 사업도 하고, 1749년에는 포토맥 강 연안에 알랙산드리아 (Alexandria) 시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지.  

로렌스와 죠지는 비록 이복관계지만 사이가 무척 좋아서 로렌스는 죠지의 앞날을 틔워 주려 애썼고, 죠지는 형의 곁에서 형의 여러 사회경험을 듣고 배우는 동시에 동생 노릇도 톡톡히 했어.  훼어훽스 남작과 형 로렌스가 소유한 토지와 주위 광범위한 여러 지역의 토지 측량을 하면서 서부개척에 대해 눈을 뜬 죠지는 이들과 함께 서부개척이 미국이 발전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지.  측량하러 여기저기 다니는 동안 정신과 육체도 성숙해져가고 있었고.  동시에 당시 영제국에서는 식민지 사람들의 서부개척을 제한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는 계기도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


[동훈]  그분들 땅만 관리해도 엄청난 사회경험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면서 육체와 정신도 성장해 나갔다니 전적으로 동감이 가네요.

[해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지 밖에 엄청난 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디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리적 여건이며 인구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겠지.  그러면서 군대에 대한 간접지식을 형을 통해 많이 얻을 수 있었을 거야.  안타까운 것은 형 로렌스가 결핵 (tuberculosis)을 앓게 되어 치료를 위해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버크리 스프링스(Berkeley Spring) 온천 등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 형을 동행하면서 위로하는 기회를 가졌지.  로렌스는 1749년에는 사업차 영국에 가면서 그의 병세에 대해 진찰받기도 했지만 별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해.  1751년에는 장인이 근무했던 기후 좋은 바베이도스(Barbados) 섬으로 잠시 휴양을 갔는데, 죠지가 그를 동행했어.  이때가 죠지로서는 미국땅을 떠난 최초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지. 죠지는 불행히도 그곳에서 천연두(smallpox)를 앓게 되어 얼굴에 얽힌 자욱이 남게 되지.  이때 천연두 면역을 얻으면서 나중에 미국 독립전쟁 시 수많은 군인들이 천연두로 사망했지만 죠지 스스로는 살아남게 되는 역사를 만들게 돼. 그러나 반면에 이때 앓았던 천연두가 운명적으로 죠지가 불임병을 갖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지.  


[동훈]  네?!  우연히 천연두를 앓게 되지만 면역이 생겨 막상 전투에서는 살아남는 행운을 가졌지만 그로 인해 아이를 못 낳게 되었다고요?  뭐 이런 일이 다 있어요?

[해월]  누가 아니래?  모든 복을 다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이 대목에서는 누군가 실수한 거지!  어쨌든 그때도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군인보다 천연두로 사망한 군인이 더 많았다는 웃지 못할 전쟁의 역사니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는지.  안타깝게도 형 로렌스는 바베이도스 휴양에도 불구하고 별 차도를 보이지 않다가 그 이듬해 1752년 7월에 그의 집 마운트 버논에서 사망하고, 그때부터 죠지가 마운트 버논 농장까지 관리하다 상속을 마무리하게 된 거야.


[동훈]  우선 그렇게 의지하던 형을 잃었으니 슬픔이 컸겠지요.  재산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형을 보내는 마음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아직은 20살 밖에 되지 않은 그였으니까요.

[해월]  동훈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형의 도움으로 사람들도 소개받으며 나름 커나가고 있었으니 충격이 컸겠지.  마침 죠지의 마음속에는 형이 이끌던 민병대에 들어가 형처럼 되려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는데, 로렌스가 사망하자 당시 버지니아 주 부주지사였던 로버트 딘위디 (Robert Dinwiddie)가 숨도 안 쉬고 죠지를 형의 자리에 대신 앉히고 말았지.  죠지도 늘 그의 희망을 얘기해 왔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어.  단번에 소령 계급을 주어 민병대 4개 대대 중 한쪽을 맡겨버린 거야.  이유는 간단해.  급했거든.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펜실베니아 주 및 버지니아 주 서쪽에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거든.  그리고 캐나다에서 남진하여 북부 미국에 요새를 지으며 영토를 넓혀가던 프랑스가 차지한 땅이 딘위디 부지사도 투자한 오하이오 컴퍼니가 얻고자 하는 지역과 맞물려 이해가 상충하고 있었지.  


[동훈]  그럼 20살 먹은 죠지가 소령에 대대장이 된 거예요?  형의 사망이 죠지의 군 출세로 연결된 거 아닌가요?

[해월]  왜 아냐? 난 형이 그의 출세가도를 열어주고 떠났다고 생각해.  죠지에게는 당시로서는 다시없는 행운인 것이고.  비록 어리긴 했지만 그동안 토지측량차 여러 곳을 다니면서 몸과 마음이 단련된 상태고 실전경험은 없지만 형으로부터 많은 군사지식을 얻어 가지고 있는터라 얼마든지 군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지.  


[동훈]  그 어린 소령 죠지 대대장의 첫 임무가 무엇이었을까요?

[해월]  딘위디 부지사는 1753년 10월 죠지를 영국군이 진출코자 하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사절로 파견하지.  그러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러콰 부족연합'(Iroquois Confederacy) 수장들을 만나 평화협약을 맺도록 하는 한편 프랑스군의 주둔지역 정보를 수집해오라는 명령을 내렸어.  이때 부족장들이 죠지에게 그들의 선조가 죠지의 증조부 '쟌 워싱턴'에게 주었던 ‘마을의 파괴자’(devourer of villages)라는 뜻의 칭호를 그대로 전수해 주었어.  인디언들에게는 가히 두려운 백인 가문이 된 것이겠지.


[동훈]  인디언들을 해치지도 않고 은근히 겁나는 인물이 된 것이네요!

[해월]  당시 서부에 있던 5개 부족(Mohawk, Oneida, Onondaga, Cayuga, Seneka 부족을 말함)으로 구성된 부족연합에게 ‘죠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봐.  죠지는 그리고 프랑스군 사령관을 만나 영국군의 요구사항을 건넸고, 프랑스군은 이를 거부하였지만 죠지와 부대원들을 깍듯이 대접하면서 무사히 귀대토록 보살펴 주었다는 거야.  77일간의 임무를 마지고 돌아온 죠지는 별 수확은 없었지만 그의 수고에 대해 자국은 물론 영국으로부터도 치하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   


[동훈]  첫 임무를 성공리에 마친 죠지 소령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겠네요.

[해월]  언제라도 전투가 터질 수 있는 상황이라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곧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되지.  1754년 2월에 이르러 딘위디 부주지사가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면서 300명에 달하는 ‘버지니아 연대’(Virginia Regiment)의 부연대장으로 임명했어.  그리고는 펜실베니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프랑스군과 전투할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지.  이 지역은 프랑스군이 진출해 있는 지역인데, 이곳에 앞서 말한 딘위디와 형 로렌스를 포함해 상당한 영국인과 식민지인들이 토지투기를 목적으로 설립한 ‘오하이오 컴퍼니’(Ohio Company)가 요새를 건설 중이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딘위디가 죠지를 또 파견한 거야.  

당시 영국군과 대치해 있던 프랑스는 그 지역 인디언들과 함께 커다란 세력을 구축하고 부대를 여러 곳에 산재해 놓고 있었어.  연대 병력의 반을 이끌고 현재의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그 지역에 도착한 죠지는 1754년 5월 28일 '오하이오 컴퍼니' 요새 구축 중단을 요구하는 일부 프랑스군을 상대로 매복해 있다가 지휘자 주몽빌을 포함해 여러 명을 사살하고 20여 명을 포로로 체포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이를 ‘주몽빌 그랜 전투’ (Battle of Jumonville Glen)라고 해.  '주몽빌 사건'(Jumonville Affair)이라고도 하는 이 전투는 곧이어 미북부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투였던 ‘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의 빌미가 되고, 급기야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지원한 스페인까지 합류하는 국제적 문제로 커져 1756년에 발발된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 – 1763)의 계기가 되지.  


[동훈]  죠지가 이끈 전투가 국제전으로 발전했나 보죠?

[해월]  사실 ‘주몽빌 그랜 전투’ 자체는 소규모였지만 죠지의 군에 소속되어 있던 밍고(Mingo) 인디언 부족의 부족장 '타나차리손'(Tanacharison)이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이미 전사한 프랑스군 지휘자 주몽빌의 머리를 자르는 망동을 하면서 일파만파로 복잡해졌어.


[동훈]  돕는다는 핑계로 자신을 과시하고 허세를 부리다 일을 크게 망치고 있네요!

[해월]  동훈이 말대로 일이 점점 더 꼬이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지.  이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버지니아연대의 연대장이 사망하자 죠지는 대령으로 진급되면서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전갈을 받게 돼.  동시에 연대의 군병력이 모두 그에게로 합류해 오고, 사우스 케로라이나 주에 주둔해 있던 제임스 맥케이(James Mackay) 대위가 이끄는 100여 명의 영국군 독립부대도 합류하면서 1754년 7월 3일 프랑스군 600명, 캐나다계 프랑스군 그리고 프랑스에 협력하는 인디언 등 약 900명을 상대로 아군의 요새 훠트 네세시티(Fort Necessity)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지.  이때 비록 계급이 낮지만 영국군이라는 정규군의 위세를 내세운 멕케이 대위와 지휘문제로 의견충돌이 생기면서 전력이 약화, 결국 프랑스군에 네세시티 요새가 함락되고 죠지는 프랑스군에 항복하게 돼. 


[동훈]  아야!  죠지의 첫 패전이며 적에게 처음으로 백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하네요?

[해월]  항복하고 포로가 되는 것도 처참했을 텐데 프랑스군과 항복문서를 만들면서 죠지가 앞서 벌어진 전투에서 주몽빌과 병사들을 암살했다는 문구와 주몽빌 절두 사건의 배후자로서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문구가 들어간 것이 더 큰 문제였지.  프랑스어로 작성된 문서를 제대로 읽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엉터리 네델란드인 통역관의 말만 믿고 그냥 서명한 죠지는 문서에 나타난 죄를 그대로 뒤집어쓰게 되고, 버지니아 연대가 재편되면서 대위로 강등되고 말았어.  죠지는 이에 반발하고 연대장직도 사임하게 돼.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영국을 위해 프랑스 군과 대치하면서 발생한 조그만 전투가 급기야 양국 간 전쟁으로 불거지고, 1756년에 가서는 급기야 국제적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그 역사의 중심에 죠지가 서있었던 것이지.


[동훈]  아! 강등되고 국제전 빌미를 제공하고!  왠지 예감이 좋지 않네요, 선생님!

[해월]  실전 경험 없이 전투에 참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프랑스어를 모르면서 프랑스군과 전투한다는 것이 무리한 일이었겠지.  그래서 나중에 독립전쟁 시에는 스파이를 많이 키웠는지는 모르지만.  연대장직을 사임한 그는 영국에서 원정대로 파견된 에드워드 브레닥(Edward Braddock) 중장을 잠시 개인자격으로 돕게 되었는데, 브레닥 장군이 프랑스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 전사하고 말지.  죠지는 바로 그때 설사병이 나서 실제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하고 나중에 합류해서 부상병과 생존자들을 안전하게 유도해 후방부대를 지원하는데 공헌했지.  

이때 죠지에게 벌어졌던 유명한 일화가 있어. “그가 탄 말 두 마리가 총상을 입어 죽고, 그가 쓴 모자가 총에 맞아 구멍이 나고, 총알이 그가 입은 외투를 관통하는 등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불사조처럼 살았다”는 것이야.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전설적 얘기가 전해지는 이유지.


[동훈]  그 정도면 과연 불사조였네요!  죽음이 피해 가는 사나이!

[해월]  하하!  불 뿜는 불사조였는지 모르지!  미국에서 죠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한몫하는 게 사실이긴 해!  

죠지에게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1755년 8월이었어.  딘위디 부주지사가 그를 새로 편성한 ‘버지니아 연대’ 연대장으로 또다시 임명하면서 대령의 계급장을 다시 달아줬어.  그는 그렇게 죠지의 군지도자로서의 삶을  이끌어 준 사람이지.  그랬는데 불행히도 영국군 정규군 대위 쟌 대그워씨(John Dagworthy)와 군명령지휘문제로 또 다투게 되었고, 자신을 영국군 정규군에 편입시켜 줄 것으로 믿었던 브레닥 장군이 사망했잖아.  1756년 2월 새로 부임한 윌리엄 셜리(William Shirley) 총사령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환기시켰지만 대그워씨 대위와의 문제만 해결해 주었을 뿐 영국군에 정식입대는 인정하지 않았어.  또 1757년 1월 셜리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라우든 경(Lord Loudoun)에게도 부탁했지만 그 또한 죠지의 영국군 편입을 승인하지 않았지.


Robert Dinwiddie 버지니아 부주지사 (1692 - 1770)


[동훈]  영국군 대위가 민병대 대령에게 또 대들었으니 죠지의 마음이 상당히 상했을 텐데 게다가 윗사람들이 몇 번씩이나 영국군 편입을 계속 거부했으니 응어리가 질만도 했네요.

[해월]  그런 상태에서 1758년에 죠지가 이끄는 버지니아연대가 새로 부임한 쟌 훠브스(John Forbes) 장군의 영국군 원정대에 배속되지.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를 정복하려는 훠브스 장군은 그의 전략과 침투경로를 죠지에게 말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죠지에게 임시로 명예준장이라는 계급으로 승진시키고 3개 여단 중 한 여단을 지휘하게 했어.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  막상 전투에 임하여 요새를 침공하던 죠지는 프랑스군이 이미 요새를 버리고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여단군인들이 다른 여단군이 잘못 발사한 총격으로 14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어.  지휘관의 처리에 너무나 실망한 그는 여단장 직을 사임하고 고향집인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가 버렸어.  26살 때의 일이야.


버지니아 민병대 대령 죠지 워싱턴 연대장


[동훈]  초창기 군생활에 이런저런 시련을 많이 겪었네요.  그러면서 경륜을 넓혀가는 것이겠지만요.  영국군 편입을 끝내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게 되었고요.  그렇게 원했나 본데.

[해월]  그 아쉬움이 한때는 아군이었던 영국군 공격의 동기가 되었을지도 몰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버지니아 주 민병대 연대를 지휘하면서 버지니아를 둘러싼 300마일 길이의 주 경계지역을 10개월 동안 20번에 걸쳐 쳐들어온 인디언들로부터 지켜내고, 병력수도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면서 버지니아 인구증가에 일익을 담당했지.  영국군 정규군에 편입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오히려 자신감과 지휘능력을 향상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영국군의 전술을 파악하고 전략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  한편 식민지 내 정치인들의 아전인수격 이전투구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나중에 큰 정치를 하면서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어.  (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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