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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May 20.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6

초대 죠지 워싱턴 -  6 of 6  :  1799년 12월 14일 서거

<죠지 워싱턴에 대해 나누는 얘기들>


미국 역사상 죠지 워싱턴만큼 유명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공헌한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다 또 그런 인물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동안 대통령 죠지 워싱턴의 일생을 통해 전개된 상황을 살펴보고 알아보면서 정말 그가 지니고 있었던 필연성에 몰입되고 있었음을 되새겨 봅니다.  이제 그의 개인 삶에 얽힌 뒷얘기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을 요약식으로 알아보면서 초대 대통령에 대한 고찰을 마감합니다.  일부는 전편들에서 이미 살펴보고 말씀드린 내용도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같이 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죠지는 당대 사람들에 견주어 키가 큰 편으로 약 6 feet (183 cm. 혹자는 6 feet 3.5 inches (192 cm))였으며, 몸무게는 210-220 파운드(95-100 kg)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체는 건강한 편이고 회청색 눈과 적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는 스타일을 했지요.  평생 치통을 앓았던 그는 ‘로더넘’(laudanum)이라는 아편진통제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천부적 승마실력을 가진 죠지는 ‘소로브레드’(thoroughbreds)라는 순혈종 종자를 수집했으며, 여우, 사슴, 오리 등 사냥을 즐기고, 약간을 술을 즐기면서 춤과 연극 관람을 취미로 가졌습니다.  과음과 흡연, 노름을 삼가고 신(God)을 가까이했습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본인도 자신의 배움에 대해 ‘결손 교육’(defective education)이라고 인정한 바 있지요.  상대적으로 쟌 애담스(John Adams)는 하바드(Harvard) 대 교육을 받았고,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은 프린스턴(Princeton) 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컬럼비아(Columbia) 대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  죠지 워싱턴이 겪은 최대의 고통은 치아문제였지요.  오복 중 하나라는 치아.  요즘도 충치나 풍치등 치아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18세기 인류에게 그 문제가 얼마나 컸었겠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죠지도 마찬가지로 20대부터 치통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해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에 57세였던 그의 입안에는 딱 1개의 치아만 남았었으니 참으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인의 치아가 거의 없는 대통령은 당연히 의치를 만들었을 텐데 기술이 형편없던 시절이라 상상이 어렵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이빨을 하마와 코끼리의 상아를 깎아 만든 틀니 또는 납으로 만든 틀니에 심고, 금실 또는 철사로 구멍을 뚫어 잡아준 뒤 뒤쪽에 스프링을 만들어 열고 닫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 남아 있던 아래 왼쪽 앞어금니(bicuspid)가 통과할 수 있도록 틀니에 구멍을 뚫어 고정시켜 썼는데, 나중에는 그나마 마지막 남은 치아도 빠져나가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지요.  여러 개 만든 틀니 중에서 다행히도 아래 사진에서 보는 틀니가 유일하게 남아서 마운트 버논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보물이라고 합니다.


마운트 버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죠지 워싱턴의 틀니


-  죠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리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유산을 받았지만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어머니가 관리하다 성인이 되면서 건네받았다고 하니 재산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독립전쟁 후반기에 버지니아 주의회에 재정보조를 신청하면서 본인이 빈곤에 처해있고 아들이 돌봐주지 않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고 하니 무언가 모자지간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독립전쟁 동안이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한 번도 아들을 칭찬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들부부가 사는 마운트 버논으로 방문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관계가 매우 소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죠지의 신비스러움은 총알이 피해 가는 불사조적 현상에서도 나타납니다.  전투에 임한 죠지에게 네발의 총알이 외투와 모자를 통과해 나가면서 구멍을 뚫었지만 본인은 상처하나 입지 않았고, 타고 다닌 말 두 마리가 총에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역시 죠지는 무사했습니다.  총알이 피해 가는 사나이!


-   죠지는 30세에 이르기까지 천연두(smallpox), 학질(malaria), 이질(dysentery)을 포함해 여러 질병을 앓았지만 이런 병들을 모두 이겨내고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명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볼 수 있는 67세에 사망했습니다.   사망에 이른 과정은 이 글 맨 끝에 다시 살펴봅니다.


-  죠지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1기 임기 동안 두 번이나 병으로 사망할 뻔했습니다.  첫 번째는 허벅지에 탄저병(anthrax) 또는 염증으로 인한 종양이 생겼을 때이고 두 번째는 폐렴(pneumonia) 때문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건강했던 죠지가 대통령이 된 후 건강이 악화된 것은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해 그 후부터는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  죠지가 일찍 천연두를 앓으면서 그 후유증으로 불임증에 걸려 후손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미국인들을 안심시키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후계자가 없는 통치자이었기 때문에 세습적 왕국을 건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하지요.   그리고 다수의 종교인들은 신이 그에 대한 목적으로 ‘건국의 아버지’ 역할에 충실히 임할 수 있도록 자식을 주지 않았다고 믿었다네요.  


-  1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죠지가 노예들을 공정하게 대해주고 의료혜택도 제공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또한 혹독한 주인이었음이 그의 일기장이 말해줍니다.  저자도 버지니아에서 15년 정도 살아봤지만 그곳의 겨울은 참으로 춥습니다.  눈도 너무 많이 내려 눈을 치우다 허리병이 난 것도 여러 번.  그래서 눈 없는 서부로 이주했지요.  죠지의 일기장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 밖에 말을 타고 외출할 수 없었다.  수렁에 물이 너무 고여 바깥일하는 노예를 보내 수렁에서 물을 빼고 이런저런 일을 시켰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이 혹독한 추위에도 신발 없이 맨발로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보급품 공급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나 때로는 매서울 정도로 냉정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죠지 부부가 아끼던 노예 중에 부인 말사의 몸종  ‘오나 젓지’(Ona Judge)와 ‘허큐리스’(Hercules)라는 조리사가 있었는데 임기말 즈음에 둘이 도망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정부요원을 풀어 잡아들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지요.  오직 ‘윌리엄 리’(William Lee) 만큼은 독립전쟁 때와 대통령 시절까지 30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키게 하며 가깝게 지냈고, 죠지의 사후 윌리엄은 종신연금과 함께 자유인의 삶을 영위했습니다. 죠지는 소유하고 있던 124명의 노예에 대해 유언으로 말사를 모시게 했고 말사가 사망한 후에는 모두 해방시키도록 함으로써 당대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유일하게 본인 소유 노예를 놓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이 사망후이지 말사는 그들이 자기가 죽기만 기다리는 것 같고 어쩌면 일찍 해방되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 같은 걱정으로 그들 124명 노예들을 모두 죠지 사후 1년 만에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  죠지는 대통령 관저를 임시로 필라델피아로 옮긴 1790년에 6 – 7 명의 노예를 새 관저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펜실바니아 주 노예금지법에 의하면 노예가 6개월 이상 계속해서 펜실바니아 주에 머물면  자동적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내각의 법무장관이 이를 귀띔하여 준 이후로는 6개월이 되기 전에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설명 없이 교체하곤 했죠.


-  죠지는 본인의 외모에도 지나치리 만큼 신경을 많이 쓰며 살았습니다.  회청색 눈과 적갈색 긴 머리를 가진 그는 다른 사람들 같이 가발을 쓰지는 않고 모발을 곱슬곱슬하게 말아 일렬지게 묵었습니다.  그런 외모 중시 현상은 그의 경호관 선발에서도 알 수 있는데 전쟁 시의 내핍생활과 병력부족에도 불구하고 죠지는 그의 경호관 자격으로 키가 5피트 8인치 에서 5피트 10인치(173 - 178cm)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나중에는 5피트 9인치에서 5피트 10인치(175 - 178cm)이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  죠지는 그의 치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에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전쟁 중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압박해 그의 전쟁과 전투기록을 훌륭한 책으로 만들 비서진을 고용할 특별예산을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  죠지는 여러 번의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면서 승리한 전투보다 패배한 전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장군의 입지를 지켰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훌륭한 전투를 치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오합지졸 병사들을 8년간이나 이끌면서 독립정신을 지켜나간 것에 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  죠지는 영국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간첩망을 양성해 첩보전을 왕성하게 활용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겪은 경험으로 첩보의 중요성을 알게 된 그는 가짜 정보를 흘리고 이중간첩도 활용하면서 현대적 첩보전 기술도 실전에 사용했습니다.


-  죠지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유일하게 ‘총사령관’(commander-in-chief)의 직책으로 군을 지휘하여 전투에 임한 경험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정부에서 추진한 위스키와 증류주에 대한 소비세과세에 저항하여 1794년에 ‘위스키반역’(Whiskey rebellion)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을 동원하고 펜실바니아 주로 친히 나섰던 역사가 있습니다.


-  죠지는 정치적 연출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닌 쇼맨이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도 죠지의 승마술에 감탄할 정도로 말을 잘 탄 사람이긴 하지만 마을로 들어갈 때면 으레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행진용 백마에 올라타고는 최대한 폼을 재는 모양새를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유난히 그가 말에 올라탄 동상을 많이 만들었나 봅니다. 



-  죠지가 초대 대통령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반대하거나 의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건국의 아버지로서 만인이 우러러보는 전쟁 영웅이었지요.  그러나 임기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측근끼리의 논쟁으로 시작된 불협화음이 끝나는 날이 없고 시간이 가면서 정적이 발생하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군인” 이라든가 “왕정을 수립하려 한다”든가 하는 모함과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죠지는 급기야 언론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 날도 대통령직에 머물고 있는 것이 후회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며 “대통령실에 갇혀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부동산 부자였던 죠지였지만 현금은 바닥을 보였습니다.  마운트 버논을 포함한 농장과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끝이 안 보였지만 기후변화와 농작물 작황의 불황 그리고 관리소홀등의 이유로 수입면에서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결국 죠지는 1789년 뉴욕시에서 열렸던 초대 대통령 취임식 참석 시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이동자금을 융통했어야 했지요.  독립전쟁을 이끌고 대통령이라는 공직을 수행한 16년이라는 긴 공백으로 현금결핍을 가져왔다고 보겠습니다.


-  2번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죠지는 악화된 재정을 되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그중 1797년에 농장에서 일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매니저 ‘제임스 앤더슨’(James Anderson)이 증류주 제조 경험이 있음을 알고 그의 도움을 받아 마운트 버논 내에 당시 미국 내 최대의 위스키 제조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필자는 처음에 죠지가 자신의 이름을 딴 위스키를 만드는 양조장을 집에 차렸었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의아해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최고의 시설을 갖춘 양조장에서 ‘워싱턴의 위스키’(Washington’s Whiskey)라는 이름으로 제조된 이 위스키는 마운트 버논의 넓은 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호밀(rye)을 주원료로 사용, 원료의 자급자족이 가능케 되면서 외국에서의 수입을 줄이는 애국적 상품이 되었습니다.  년간 11,000 갤런 (약 41,640 리터) 규모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숙성과정을 생략한 채 병이 아닌 베럴에 담겨 빠르게 출하된 위스키 덕분에 바로 현금전환이 가능하게 되었죠.  죠지의 위스키 사업이 수익사업으로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미국의 창의력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모델이 되었고 다른 지방과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독립이라는 차원의 선구자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2년 뒤 죠지가 사망하게 되자 양조장은 얼마가지 않아 폐쇄되었었지만 20세기 후반 마운트 버논 재건운동이 일어나자 양조장도 다시 살아나 당시의 위스키 향을 새롭게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입니다.


마운트 버논 양조장에서 제조되고 있는 '워싱턴의 위스키 3종


-  죠지 워싱턴의 사망:  불사조적 기적의 영웅 죠지였지만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가 봅니다.  다만 그의 죽음이 너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급자기 발생한 일이었기에 아직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설왕설래합니다.

1799년 12월 12일 목요일 아침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논 일대의 날씨는 약간의 눈발로 시작했다가 우박이 떨어지는 변덕이 심한 날씨로 나중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궂은날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죠지는 농장주로서 노예들의 밭일을 챙기고 감독도 하기 위해 아침부터 말에 올랐지요.  오후 3시경까지 이곳저곳을 살피고 집에 돌아온 죠지의 옷은 비에 젖어 축축한 상태였습니다.  저녁식사에 초대한 손님이 이미 와있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으라는 식구들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식탁에 앉고 말았습니다.  다음날에도 눈은 계속되어 3인치나 쌓이고, 죠지의 목이 약간 부어 아픔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눈이 개이자 어제 궂은 날씨로 집옆에 쓰러진 나무들을 치우기 위해 밖에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금요일 종일 죠지의 목소리는 쉰소리가 계속되었고, 저녁에는 늘 그랬듯이 부인과 개인비서 ‘토비아스 리어’ (Tobias Lear)와 함께 신문을 읽어 내려갔지만 목이 계속 불편해 리어에게 대신 읽혔지요.    잠자리에 들은 죠지는 새벽 2시경 심한 통증을 느껴 잠에서 일어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밤을 새우고 토요일 아침녁이 되어서야 죠지가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리어가 집사 ‘죠지 로린스’(George Rawlins)를 불러왔고, 바로 인근도시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로 달려가 가족 주치의사이자 친구인  ‘제임스 크레익’(James Craik)을 불러왔습니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로린스는 죠지가 시키는 대로 8 온즈(oz.  약 0.2리터에 해당) 정도의 피를 뽑았습니다.  이 방법은 당시에 염증치료로 사용하던 방법인데 죠지는 과거 수차례에 걸쳐 몸이 안 좋을 때 피를 뽑아 치료한 경험이 있어 이 피 뽑는 치료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한 염증이 심한 목을 편하게 하기 위해 당밀과 버터 그리고 식초를 섞은 액체를 마시게 했는데 이것을 삼키기는커녕 오히려 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질식시킬 뻔했다고 합니다.

1799년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9시에 당도한 크레익은 죠지의 상태를 검사한 후 신체 내 독성 체액을 배출시키고자 목 안쪽 부은 곳에 수포약(blister of cantharides) 처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9시 30분경 두 번째로 피를 뽑고는 식초와 세이지 차를 섞은 물로 입안을 씻어냈습니다.  11시쯤 세 번째로 피를 뽑았습니다.  오전이 다 가도록 차도가 없자 크레익의 추천으로 두 번째 의사인 ‘구스타버스 브라운’ (Gustavus Brown)을 모셔오기로 했지요.    11시가 되도록 브라운이 오지 않자 세 번째 의사 '엘리샤 딕'(Elisha Cullen Dick)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고, 12시경에는 관장을 시켰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피까지 뽑았지만 역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뽑은 피가 80 온즈(약 2.365 리터)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체 혈액의 40퍼센트나 되는 양이지요.  구스타버스가 구토를 시키기 위해 구토제까지 투약했지만 그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 의사가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후 4시 30분경 죠지는 부인 말사에게 독서실에 가서 준비해 둔 2가지의 유언장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둘을 읽어 본 죠지는 그중 한 가지를 폐기토록 했고, 말사는 곧 불태워 버렸습니다.  곧이어 비서 리어를 불러놓고 얼마 살지 못할 것임을 예언한 뒤 서류, 책, 장부 등 모든 뒷정리를 부탁했습니다.

오후 5시경 잠시 침대에서 일어난 죠지는 의복을 고쳐 입고 의자에 걸어갔다 오는 등 약간 움직이는가 하더니 곧 다시 침대에 누었지요.  그리고는 의사 크레익에게 곧 숨을 거둘 것 같다고 하고 세 의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습니다.  

저녁 8시에는 죠지의 발과 다리에 찜질약을 바르고, 10시경이 되자 죠지가 입을 열어 “장례를 엄숙히 치러다오” 하면서 “내가 죽은 뒤 3일이 지날 때까지는 가족묘(family vault=mausoleum)에 넣지 말라”라고 부탁했습니다.  

1799년 12월 14일 토요일 밤 10시에서 11시경 죠지는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 곁에는 부인 말사(Martha), 의사 크레익(Craik), 비서 리어(Tobias Lear), 노예하인 캐롤라인(Caroline), 몰리(Molly), 샤롯(Charlotte), 그리고 그의 노예몸종 '크리스토훠 쉴스'(Christopher Sheels)가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사체는 마호가니 관에 모셔두었다가 1799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의 가족묘는 아직도 마운트 버논 안에 있으며 현재는 부인 말사와 같이 합장되어 모셔져 있습니다.


죠지 워싱턴 (오른쪽)과 말사 워싱턴 (왼쪽) 부부 합장 가족묘.  마운트 버논 내. 


-  건강하던 죠지 워싱턴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25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도 설왕설래합니다.  영웅의 죽음 앞에 당시 세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 믿고 다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 뿐입니다.  한 가지 직계후손을 두지 못하고 사망한 죠지의 유산에 대해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서 힐끗 살펴보겠습니다. 


죠지는 그의 사망을 일찍 준비한 듯합니다.  길지 않은 삶을 살던 당시 분위기로 보아 당연한 것이겠지요.  사망 직전 부인에게 가져오라고 한 유언장은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는 즉시 불에 태워 폐기해서 내용을 모릅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유언장은 1799년 7월 9일 작성한 것입니다.  그는 살면서 인연을 맺은 혈족들과 친구 그리고 거느리던 노예(죠지는 Negro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합니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인이 소유하던 물품을 나누어주는 다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죠지는 37곳에 모두 65,000 에이커(약 8천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저택 마운트 버논 등 주요 부동산 및 동산은 부인 말사에게 맡겼고 나머지는 처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당부했지요.    부인 말사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해 죠지가 사망한 후 2년 반 밖에 지나지 않은 1802년 5월 22일에 70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말사의 사망 후 죠지의 남동생이었던 ‘쟌 오거스틴 워싱턴’(John Augustine Washington 1736-1787)의 아들 ‘부쉬라드 워싱턴’(Bushrod Washington  1762-1829) 대법원 판사가 마운트 버논을 포함한 토지의 대부분과 죠지의 군생활 및 정부생활과 관련된 대부분의 서류와 책들도 물려받게 됩니다.  부쉬라드 판사는 죠지의 유산관리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워낙 청렴한 공무원이었던지 주머니가 가벼워 그 큰 재산을 관리할 자금이 부족해 다른 유산관리인들과 상의한 후 여러 번지의 토지를 가문사람들에게 사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사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사간 사람들도 대금을 미루더니 끝내 갚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 유산관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부쉬라드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마운트 버논의 소유권은 그의 조카 ‘쟌 오거스틴 워싱턴 2세’(John Augustin Washington II)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1829년부터 1832년까지 마운트 버논을 관리하면서 죠지의 유언대로 새로운 능묘를 완성했습니다.  쟌 오거스틴 워싱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부인 ‘제인 워싱턴’(Jane Washington)이 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그녀가 1850년까지 관리하는 사이 1835년에 불행히도 화재가 발생하여 죠지가 만들었던 온실과 노예들의 숙소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인 워싱턴은 그의 아들 ‘쟌 오거스틴 워싱턴 3세’(John Augustine Washington III)에게 1841년부터 마운트 버논을 년 500달러에 세를 주었고, 죠지의 증조카인 그는 죠지가 가꾸었던 농장에 새로운 비료를 도입하는 등 나름 잘 가꾸어보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한때는 8,000 에이커에 달했던 마운트 버논의 대지가 점점 줄어 1,200 에이커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연방정부나 버지니아 주정부가 인수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습니다.  

끝내는 마운트 버논 재건을 위해 ‘앤 파멜라 커닝햄’(Ann Pamela Cunningham)이 나서서 결성한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the Mount Vernon Ladies’ Association)에 1860년 소유권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비영리단체로서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이 협회는 현재 정부의 지원이나 납세자세금 지원 없이 500명의 고용인들과 4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입장료 수입과 소매점 매출, 식당매출등으로 관리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죠지가 사망 시까지 살았던 마운트 버논에는 연간 1백만 명의 관람객이 그의 모습을 기리며 줄을 서고 있습니다.  수도 워싱턴 디씨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 분들은 그리 멀지 않은 버지니아 주에 있는 ‘마운트 버논’ (Mount Vernon)도 방문해 보시기를 적극 권합니다.  이제는 비록 500 에이커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죠지의 저택을 포함한 원래의 건물들, 죠지와 말사의 능묘, 노예기념관, 안내관, 박물관 그리고 극장과 전시관이 있는 교육관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  워싱턴 가문의 후손들은 죠지의 직계가 아닌 동생들인 ‘사무엘 워싱턴’(Samuel Washington.  1734-1781)과 ‘쟌 오거스틴 워싱턴’(John Augustine Washington. 1736-1787)의 후손들로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약 8,000 명이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는  ‘폴 에머리 워싱턴’(Paul Emery Washington.  1926-2014)의 아들들인 ‘리처드 워싱턴’(Richard Washington)과 ‘빌 워싱턴’(Bill Washington) 그리고 성명미상으로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San Antonio) 시에 거주했던 또 한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  워싱턴의 손글씨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의 서명을 통해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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