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21

10대 쟌 타일러 1841 - 1845 : 무임승차한 각하(閣下)의 효시

by 김동준 David Kim

현대 정치인들이 갖는 지상목표를 권력을 잡는 것이라 하고,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 한다면 미국의 10대 대통령을 지낸 ‘쟌 타일러’(John Tyler. 1790.3.29-1862.1.18)는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9대 대통령 ‘윌리엄 헤뤼슨’(William Henry Harrison)과 함께 1840년 제14차 대선에 야당인 ‘위그당’(Whig Party)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해 제10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841년 3월 4일 함께 취임한 윌리엄이 31일 만에 사망하면서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는 첫 사건이 발생했고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논란이 이는 가운데 ‘쟌 타일러’는 분분한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대통령직 선서’(presidential oath of office)를 행하고 ‘직무대행’이 아닌 대통령 자체가 되었습니다. 미국 헌법상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승계한다고만 되어있기 때문에 단순히 대통령의 권한과 직무를 대행할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되어 새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각의와 의회에서 논란이 일어나고 직무대행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쟌 타일러’는 일언지하에 정식 대통령 선서와 취임을 동시에 행하여 향후 대통령 사망과 같은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되는 ‘전례’(Tylor Precedent)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반대파 인사들로부터 ‘우연히 대통령자리에 무임승차한 각하’(His Accidency)라는 조롱조의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버지니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 버니지아주 의원, 연방 하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지내고 버지니아주 23대 주지사(governor)를 역임한 전형적 정치가인 그는 ‘민주-공화주의 당’에서 발전한 ‘민주당’ 성향이었지만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행정부의 중앙은행정책과 관세정책, 그리고 연방정부와 대통령 권한확대정책 등에 반감을 갖고 반대당인 ‘위그당’(Whig Party) 정책에 동조하며 위그당의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위그당 정책에 반한 행보를 취하면서 위그당에서 강제로 축출당하고 민주당으로부터도 배척당한 후 제3당 창당에 실패까지 하면서 재선출마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인기가 바닥을 치면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의회에서 재 통과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쟌 타일러’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여덟 자녀를 두고 첫 부인이 사망한 지 2년 만에 꿈에도 못 잊던 서른 살 아래의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여 또 일곱 명의 자녀를 두어 모두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둔, 그래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자녀가 있는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역대 인기 최하위 다섯 중 한 사람인 10대 대통령 ‘쟌 타일러’ (이하 쟌)에 대해 살펴봅니다.


1842 by George Healy, National Portrait Gallery.jpg John Tyler 1842, portait by George Healy. National Portrait Gallery





[耕苑] 미국의 열 번째 대통령의 자식 욕심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경우이네요. 부인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강했겠지만 혹시 종교적 이유도 있었나요?

[海月] 경원이가 나보다 쟌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네! 불행히도 질문에 대한 답은 없지만 열다섯이나 되는 자녀를 키워야 했으니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은 확실해. 부친이었던 ‘쟌 타일러 시니어’(John Tyler Sr. 1747 – 1813) 판사가 3남 5녀를 두었으니 손이 귀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경원] 쟌은 형제도 많았네요. 쟌의 선조들은 영국에서 건너왔나요?

[해월] 그랬지. 쟌의 5대(玄) 조부인 ‘핸뤼 타일러’(Henry Tyler. 1607-1672. 년대 불명확)는 영국의 중서부 ‘웨일즈’에 가까운 지역인 ‘쉬랍셔’(Shropshire)에서 태어나 1650년경 결혼한 부인 ‘메리 해닝’(Mary Henning. 1607-1654)과 함께 1654년경 식민지인 버지니아로 건너와 ‘타일러’ 집안을 세웠어. 부인 메리가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사망하고 1658년에 ‘앤 가드너’(Anne Gardner. 1620-1679)와 재혼한 핸뤼는 아들 셋을 두었지. ‘핸뤼’(Henry. 4대 조부)와 ‘쟌’(John) 그리고 ‘데니얼’(Daniel)이었어. 버지니아 주 옛 토지대장에 의하면 핸뤼가 영국에서 본인을 포함해 여러 명을 버지니아로 이주시킨 대가로 정부에서 ‘미들 농장’(Middle Plantation)에 있는 254 에이커 (약 31만 평)의 토지를 하사했는데, 이 ‘미들 농장’이 후에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로 이름이 변경되었지. 4대(高) 조부인 ‘핸뤼’(1660 – 1729)는 버지니아주 ‘요크 카운티’(York County)에서 태어나 1683년에 ‘애리자배스 차일스’(Elizabeth Chiles. 1665-1703)와 결혼해 ‘쟌’(曾祖父)과 ‘애리자배스’, ‘후뤤시스’(Francis), ‘엔’(Anne) 그리고 ‘핸뤼’ 등을 두었어. 쟌의 3대(증) 조부인 ‘쟌 타일러’(1684 – 1729)도 요크 카운티에서 태어났고 연도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애리자배스 제랫’(Elizabeth Jarrett. 1693-미상)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쟌’(조부), ‘조에나’(Joanna), ‘맥캔지’ (McKenzie) 그리고 ‘애리자배스 로’(Elizabeth Lowe) 등을 두었어. 조부인 쟌(1715 – 1773)은 버지니아주 (출생지 불명확)에서 태어나 당시 유명한 프랑스계 의사였던 ‘루이스 콩태’(Louis Contesse)의 손녀 ‘엔’(Anne Contesse. 1718-1774)과 결혼해 ‘애리자배스’, ‘루이스’, ‘뤄쉘’(Rachel), ‘쟌 시니어’(부친), ‘엔’, ‘메리’ 그리고 ‘조에나’ 등을 두었어. 유언에 의하면 조부의 마지막 거주지는 ‘윌리엄스버그’가 분명해.


[경원] 쟌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쟌 시니어’(John Tyler Sr. 1747-1813)는 한마디로 버지니아주의 거물 중 한 사람이었지. 1747년 2월 28일 ‘제임스 시티 카운티’ (James City County)의 ‘야머스’(Yarmouth)라는 곳에서 식민지 해사법원의 연방 보안관이었던 아버지와 유명한 의사의 손녀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 ‘윌리엄과 메리 대학교’(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서 3대 대통령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과 함께 수학한 그는 법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지. 23세 때인 1770년 ‘찰스 시티 카운티’(Charles City County)로 옮겨 앉은 그는 변호사일을 하면서 노예를 부리는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어. 1777년에 ‘메리 아미스태드’ (Mary Marot Armistead. 1761-1797)와 결혼한 쟌 시니어는 ‘그린웨이 농장’ (Greenway Plantation)을 짓고 여덟의 자식을 두었지. 이 농장이 주인공 10대 대통령 ‘쟌’이 태어난 곳이야. 1787년도 버지니아주 세금징수철에 의하면 ‘쟌 시니어’는 20명의 성인 노예와 14명의 아동 노예, 12필(匹)의 말과 75두(頭)의 소 그리고 바퀴가 여섯 개 달린 마차를 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Greenway Plantation, Birthplace, (Charles_City_County,_Virginia).jpg Greenway Plantation 내 John Tyler 생가


[경원] 그 정도면 꽤 부유한 분 이셨겠네요?

[해월] 농장 땅이 150만 평 정도 되니까 땅 부자 중 한 사람이고 노예숫자로 보면 농장에서의 수입도 괜찮았을 것 같네. 변호사일을 하면서 영국정부와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1775년 카운티의 ‘안전위원회’ (Committee of Safety)의 위원이 된 그는 서서히 지역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해. 1778년에 버지니아주 하원(Virginia House of Delegates) 의원에 당선되어 1788년까지 매년 당선되었어. 이때 9대 대통령 ‘윌리엄 헤리슨’의 부친 ‘밴자민 헤리슨 5세’(Benjamin Harrison V)와 함께 의원생활을 했지. 1781년에는 버지니아주 하원의장에 선출되어 1785년까지 연속으로 선출되기도 했어.


[경원] 쟌의 부친이 하원의원과 하원의장을 지냈으니 확실한 정치가문을 이루셨네요.

[해월] 그뿐 아니야. 1776년부터 1788년까지 버지니아주 해사최고법원(Virginia High Court of Admiralty)의 판사를 지냈고, 1780년부터 1781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 위원회(Virginia Governor’s Council)의 위원이기도 했어. 그리고 1788년에는 주의회에서 그를 ‘버지니아 최고법원’(General Court of Virginia)의 판사로 선출해 최고형사법원의 판사가 되었지. 같은 해에 버지니아주에서 갖게 된 ‘연방헌법비준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그는 당시 버지니아 대표 정치인이던 ‘죠지 메이슨’(George Mason)과 ‘페트뤽 핸뤼’ (Patrick Henry)와 더불어 반연방주의 성향으로 비준반대에 표를 던졌어. 결국 근소한 차이로 연방헌법은 버지니아주에서 비준, 통과되었지만 그의 연방주의를 거부하는 정치성향을 잘 보여주었다고 봐.


[경원] 아버지의 반연방주의 정치성향이 아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해월] 쟌도 연방정부의 주정부 정책 간여에 반대했어. 판사생활을 하던 부친이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어 1808년에는 제15대 주지사에 당선되어 1811년까지 봉직하게 돼. 1811년 1월에 4대 대통령이던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이 그를 버지니아 지구 연방법원 판사로 지명하고 의회에서 임명동의를 해 1월 7일부터 연방법원 판사가 되어 그가 사망한 1813년 1월 6일까지 봉직하기도 했어.


[경원] 쟌의 부친이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내셨으니 아들 쟌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겠어요.

[해월] 요즘말로 ‘아빠첸스’를 유감없이 누리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일구어 논 1,200 에이커의 ‘그린웨이 농장’에서 두 형제와 다섯 누이들 속에서 자란 쟌은 노예들이 생산해 내는 밀과 옥수수 그리고 담배 잎 등을 보면서 자라났어. 어렸을 때부터 신약 했고 자주 설사를 했다고 해. 7살 때인 1797년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12살 때에 가족이 전통적으로 다녔던 ‘College of William and Mary’ 부속 고등학교를 나와 동 대학을 17살 때인 1807년에 졸업했어. ‘에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으로 경제에 대한 눈을 떴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를 좋아하기 시작했지. 대학을 졸업한 쟌은 주 법원 판사였던 아버지와 연방 법무장관을 지냈던 ‘애드먼드 뤤돌프’(Edmund Randolph) 밑에서 법 공부를 했어. 19살 때인 1799년 나이제한에 걸렸지만 판사의 묵인하에 변호사 자격을 얻은 쟌은 아버지가 주지사로 재직 중인 버지니아주의 수도인 ‘뤼취몬드’(Richmond)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지.


[경원] 나이가 어려 변호사 자격을 받을 수 없는데 든든한 아버지 덕분에 자격을 받은 듯하네요.

[해월] 별도의 자격시험이 없던 때라 자격을 수여하는 판사가 조용히 인정하면 되었던 세상인게지. 인간세계 어디나 존재하는 현상 아니겠어? 쟌은 1813년 23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찰스 시티 카운티에 있는 ‘우드번 농장’(Woodburn Plantation)을 상속받고 그곳에 <우드번>으로 알려진 집을 지었어. 그곳에서 1821년까지 살았는데 그때까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13명의 노예를 포함해 모두 24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

WOODBURN Plantation 1815.jpg Woodburn Plantation house. 현재는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어 있음.


[경원] 어린 나이임에도 경제적으로는 여유 있는 삶을 산 것 같네요. 아버지가 정치 생활도 하셨으니 쟌도 정치인으로 나섰을 텐데요.

[해월] 왜 아니겠어! 쟌도 일찍부터 정치에 입문했지. 21살 때인 1811년에 주하원에 입성하여 비록 임기가 1년이지만 내리 다섯 번이나 당선되었어. 주의원으로서 <반연방주의> 성향을 보이면서 ‘연방중앙은행’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허가연장에 반대했고, 이를 찬성한 버지니아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들에 대한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어. 쟌은 또 아버지와 같이 ‘반영국파’였는데 1812년 다시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하고 1813년 여름에 버지니아주의 ‘헴턴’(Hampton) 시가 영국군에 점령당하자 주도인 ‘뤼취몬드’를 방어하기 위해 민병대를 모아 ‘찰스 시티 소총중대’(Charles City Rifle Company)를 조직하기도 했지. 자신은 대위계급장(중대장)을 달고 전투에 대비했지만 영국군의 침략이 없자 두 달 만에 해체했는데, 연방정부로부터 전투준비에 대한 포상으로 아이오와주 ‘수 시’(Sioux City)에 있는 부지를 무상으로 받았다고 해.

쟌은 1816년에 아버지가 생전에 역임했던 버지니아 ‘주지사 위원회’ 위원에 발탁되면서 주 하원의원을 사임했어.


[경원] 잠시지만 군경력도 가진 정치인이 되었네요. 땅도 하사 받고요.

[해월] 벌어지지도 않은 전투에 대한 준비로 국가로부터 포상도 받았으니 복이 많은 사람이지? 복이 그냥 굴러 들어오는 사람이었던 것이 같은 해 9월에 버지니아 주 제23지구 연방 하원의원이던 ‘쟌 크랍턴’(John Clopton)이 사망하면서 연방 하원의원 자리가 공석이 되었어. 쟌은 친구이자 정치동지인 ‘엔드류 스티븐슨’ (Andrew Stevenson)을 들러리 삼아 경합하여 당선되고 그해 12월 7일 제14차 연방의회에 입성했지.

연방의원이 된 쟌은 시작부터 튀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 영국과의 전쟁을 치른 후에 심지어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민주-공화주의당’ 의원들까지 비록 주정부의 권한을 지지하지만 전쟁을 치른 후이니까 각 지역의 항구와 도로 등의 확충에 연방정부가 지원해서 재건을 하자고 했지만 이를 반대하고 나섰지. 연방정부가 각 주정부 관할지역에 자금지원을 하려면 헌법에 명백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만 해야 하다는 ‘강성 건설주의자’(strict constructionist) 입장을 고수한 거야. 이는 일반적으로 헌법에서 정한 연방정부의 권한은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광의의 정치사상과 배치되는 주장이지. 1818년에 제2차 연방중앙은행에 대한 ‘5인 감사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은행내부의 부패를 확인하고 은행허가 취소를 주장하기도 했어. 물론 의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진 않았지. 또한 ‘엔드류 젝슨’ 장군이 1818년에 후로리다주를 침공하여 ‘새미뇰’(Seminole) 부족과 전투를 벌였을 때 엔드류가 취한 ‘영국군 처형’과 같은 처신을 과도한 행동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어. 남, 북 간의 첨예한 노예문제에 있어 그는 항상 노예제도를 금지하려는 법안에는 반대표를 던지곤 했지. 노예주의자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경원] 좌충우돌하는 성품을 가졌나 본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해월] 아마도 돌출행동으로 주위의 관심을 끌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해. 왜냐하면 그가 주장하고 지지하는 법안은 거의 통과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결국 그는 연방 하원으로서의 입지에 불만을 갖게 되었지. 그리고 아이들 양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들어 의원의 급료 가지고는 어림없기도 했어. 1820년 후반에 가선 하원의원에 더 이상 출마하지 않고 1821년 3월 3일 하원의원직을 떠나 고향인 그린웨이로 돌아가 변호사일을 했지. 본인의 의원자리는 앞서 경쟁했던 친구 ‘스티븐슨’을 추천하고 변호사 업으로 돌아간 거야.


[경원] 연방 하원의원 생활을 포기한 것 같아 아쉽네요.

[해월] 변호사 생활 2년을 하면서 쟌은 그 일도 마땅해하지 않았어. 1823년엔 다시 버지이나주 하원의원에 도전했지. 연방 경험을 한 그를 주민들이 믿었는지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아 그해 4월에 아주 쉽게 당선되었어. 마침 모교인 ‘College of William and Mary’가 학생수가 부족해 폐교되거나 인구가 더 많은 ‘뤼취몬드’로 이전하자는 상황이 벌어졌지. 쟌은 학교를 외진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서 도심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행정과 재정에 혁신을 가져오는 것이 낫다면서 혁신법안을 주의회에 상정하여 법으로 만들고, 이 조치가 효과를 가져와 1840년경에는 대학의 등록학생수가 최대로 늘어나기도 했어.


[경원] 모교 발전에 이바지한 모습도 보였네요.

[해월] 정치인의 애향정신은 기본이겠지. 쟌의 정치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1825년 12월에는 주지사 후보로 지명되었고, 당시 주지사가 주의회에서 선출되던 선거에서 경쟁자인 ‘쟌 후로이드’ (John Floyd)를 131대 81표로 누르고 제23대 주지사에 선출되었지. 사실 버지니아주 헌법에 의하면 1년 임기인 주지사에게는 별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았고 심지어 법안 거부권도 제한적이라 명색이 주지사지 별로 한일이 없었는데 다만 평소 그가 존경하던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이 1826년 7월 4일(미국의 독립기념일) 사망하자 그의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멋들어지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Governor_of_Virginia_(c._1826).jpg Virginia State Governor John Tyler 1826


[경원] 주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냈다는 것은 그의 인기가 꽤나 높았다는 뜻이겠지요?

[해월] 맞아! 연방정부 개입을 반대했던 그였던 만큼 주지사로서 주 내부 도로를 포함한 자체 정비를 한 정도였는데 1826년 12월에 치렀던 주지사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 되었으니 인기가 있었다는 거지. 그리고 1827년 1월에 와서는 주의회에서 선출하는 연방 상원의원의 재선 심사가 이루어졌을 때 당시 버지니아주 출신 상원의원인 ‘쟌 뤤돌프’ (John Randolph)의 재선문제를 토론하던 의원들은 그가 연방상원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면서 쟌에게 접촉했어. 쟌은 수차례에 걸쳐 사양하면서 계속 그를 추천했지만 결국 주의회에서 쟌을 115대 110표로 선출하면서 쟌은 1827년 3월 4일부로 주지사직을 사임하고 바로 임기 6년의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어.


[경원] 억세게 정치운이 좋다 하시더니 연방 상원의원까지 올랐으니 이제 8부 능선까지 오른 셈이지요?

[해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겠지. 쟌이 상원의원이 된 시점은 온 나라가 1828년의 대선 켐페인에 접어들었을 때인데, 민주-공화주의당이 현직인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 6대 대통령을 지지하는 ‘전국공화당’(National Republicans)과 도전자인 ‘엔드류 젝슨’을 지지하는 ‘민주당’ (Democrats)으로 분열되었고, 쟌은 두 사람 모두 좋아하지 않았지만 엔드류가 국내 시설보완에 연방자금을 많이 쓰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앤드류 쪽으로 기울었어. 결과적으로 엔드류가 승리했고 1827년 12월 개원한 제20차 의회에서 쟌은 계속해서 국내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자는 법안에는 부표를 던졌지. 이 문제는 각 주가 알아서 할 일이고 연방정부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인 거야. 그러나 엔드류가 대통령이 되자 논공행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썩은 제도’라 불리는 ‘엽관제’(獵官制 spoils system)를 강행하자 쟌은 이에 반발하면서 그가 지명한 사람들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기 시작했어. 자당의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반란행위’로 여겨질 텐데 쟌은 마다하지 않았지. 특히 엔드류가 의회 휴회기간을 틈타 요직을 변칙으로 임명하는 ‘휴회 임명’(Recess appointment)을 애용하자 아주 싫어했어.


[경원] 여당 의원으로 대통령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로 전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텐데 쟌은 이를 마다하지 않은 모습이네요.

[해월] 그만큼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겠지. 1832년 엔드류가 연방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는 법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남부 주 중 ‘사우스 케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에서 <연방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연방법을 무효화시키는 ‘무효법’(Ordinance of Nullification)을 통과시키는 사건이었어. 그러자 주에서 일방적으로 연방법을 무효화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벌어지고 엔드류는 말이 안 된다면서 연방법을 강행시키는 ‘강제이행법’(Force Bill)을 준비하며 만약의 경우 군 동원도 불사할 태세를 갖추었지. 쟌은 군동원에 반대하고, 급기야 ‘핸뤼 크레이’(Henry Clay)와 ‘쟌 켈훈’(John Calhoun) 상원의원이 협상안인 ‘1833년의 관세협상안’(Compromise Tariff of 1833)을 만들어 관세로 인한 연방법 <무효위기>라는 사태를 벗어날 수 있었어. 쟌은 이 협상안에 찬성했지.


[경원] 연방탈퇴라는 강수를 둔 주 정책을 옹호하는 듯한 처신을 보인 것 아닌가요?

[해월] 당연하지. 엔드류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인 쟌은 1833년 재선에서 주 민주당 내에서 수세에 몰리긴 했지만 ‘핸뤼 크레이’의 지지선언에 힘입어 겨우 12표 차라는 표차이로 승리했어. 계속 상원의원직을 수행하게 된 쟌은 엔드류가 1833년 9월 재무장관에게 대통령 령(executive order)으로 연방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연방정부 자산을 주정부 승인은행들로 이전할 것을 명하자 이를 ‘권력의 극명한 남용’이며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조치라 결정짓고 엔드류 반대파에 합류하게 되지. 상원재정위원회 (Senate Finance Committee) 위원인 그는 1834년 3월에 이르러 두 번씩이나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졌어. 그리고 민주당을 떠나 크레이가 새로 창당한 ‘위그당’(Whig Party)으로 당적을 옮기고 말았어. 상원 내 다수당이 된 위그당은 그에 답하는 듯 1835년 3월 3일 쟌을 상원 ‘의장대리’ (President pro tempore. 상원의장은 부통령임.)로 상징적 선출을 하게 되었어. 쟌이 상원의장대리가 됨으로 해서 그는 역대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직을 갖게 된 사람이 되었지.


John_Tyler,_1835.jpg John Tyler as President pro tempore, 1835. 화가 미상.


[경원] 쟌은 정말 다양한 직책을 맡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정치인이 되네요.

[해월] 다양한 일도 하지만 ‘정치는 협상’이라는데 그 협상에는 재주가 없어 보이네. 이번에는 민주당이 버지니아주 하원을 장악하자 재신임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그는 1836년 2월 29일에 상원의장인 ‘벤 뷰런’ (Van Buren) 부통령에게 상원의원 사임서를 보내고 상원을 떠났어. 그리고 그해 치러진 13차 대선에서 위그당 소속 부통령 후보로 이름을 올린 그는 같은 당 대선후보 ‘윌리엄 헤뤼슨’(William Harrison)과 함께 고배를 마셨어. ‘벤 뷰런’이 단단히 결속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반면 위그당은 결집력이 무너져 여러 후보가 난립한 상태였거든. 선거에서 패배한 쟌은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가려고 준비했는데 운명이었는지 또다시 주 하원의원에 출마해 1838년에 세 번째로 주 하원에 입성했어. 전국적 인물이 되어버린 그의 인기가 시들지 않았음이지. 그러면서 1840년에 14번째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어.


[경원] 스스로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끈질기게 정치줄을 놓지 않는 쟌이네요.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하고요. 14번째 대선이 궁금해지네요.

[해월] 쟌의 정치생명이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물을 향해 조용히 뛰는 모습 아닌가? 1836년의 대선에서 실패한 그는 1840년 대선이 다가오자 위그당의 부통령후보로서 전국을 돌며 선거유세를 진행하고 북부 오하이오주 출신인 ‘윌리엄 헤뤼슨’을 보완하는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선거흥행을 돋우었지. 특히 선거권이 없는 여성들을 선거유세에 참여시키면서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했어. 윌리엄이 살고 있던 통나무집을 부각하면서 서민적, 국민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그의 군인 시절 원주민 부족과 벌인 큰 전투였던 ‘티페카누 전투’(Battle of Tippecanoe)에서의 승리를 대통령후보의 이미지로 나타낸 ‘티페카누와 또 타일러’(Tippecanoe and Tyler Too)라는 슬로건을 만들고 켐페인 노래까지 만들어 합창단이 전국에서 켐페인 노래를 부르게 했지. 선거결과는 윌리엄과 쟌이 국민투표에서는 53%를 획득했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234대 60으로 대승리를 거두었어. 위그당도 상, 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이 되었지.


Tippecanoe and Tyler Too.jpg 1840 Election campaign poster and song


[경원] 쟌이 50세가 되는 해인 1840년에 드디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네요.

[해월] 1841년 3월 4일 취임식에 참석한 9대 대통령 ‘윌리엄 헤뤼슨’은 1773년생이니까 이미 67세가 되어 가장 나이가 많은 대통령이었지. 선거가 끝나고 고향인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 내려가 쉬고 있던 쟌은 내각 구성이나 행정부 고위직 임명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윌리엄이 두 번씩이나 편지를 보내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을 때 답신을 보낸 것이 고작이었어. 쟌은 취임 직전 워싱턴, 디씨로 올라와 취임식날 상원에서 취임식을 갖고 3분이라는 짧은 연설을 한 후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이동했는데, 의사당 야외에서 추운 날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윌리엄은 무려 2시간에 걸친 연설을 했지. 쟌은 취임식 후 바로 상원으로 돌아와 상원의장으로서 대통령이 지명한 내각장관들의 명단을 접수하고 다음날 인준절차를 밟은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갔어.


Harrison_inauguration.jpg Inauguration 1841.3.4.


[경원] 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바로 사저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인가요?

[해월]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 부통령이라는 직책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정도의 직책이었던 거야. 모든 관심은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에게 집중되기 마련인데 취임 초부터 인사청탁과 정책협의로 시달리기 시작했던 윌리엄은 춥고 비 오는 취임식을 치르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폐렴(pneumonia)과 흉막염 (pleurity)이 겹쳐오면서 드러눕고 말았어. 그 소식이 쟌에게 전달되었지만 쟌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생각하고 그냥 사저에 머물고 있었는데, 1841년 4월 5일 국무성 최고서기인 ‘후랫처 왭스터’(Fletcher Webster)가 그를 집으로 방문하여 전날 오전에 사망한 윌리엄의 사망소식을 전해주었어. 쟌은 그 길로 워싱턴으로 올라가 다음날 여명에 도착했지.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이 사망한 것이 67세였는데 그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이니 처음부터 무리한 면도 없진 않았잖아. 게다가 군장성으로서 약간의 허세를 부리는 면도 있어 죠지도 찬 비를 맞고 결국 사망했는데 불행하게 윌리엄도 그와 비슷한 경우를 겪은 거야.


[경원] 미국 대통령 중에 군 출신이 여러분 계시잖아요? 절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을 해 모범스런 모습을 보여 좋아 보여요. 강한 이미지를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와 안쓰럽네요.

[해월] 대통령이 사망하자 내각이 즉각 소집되고 대통령직 승계에 대해 논의가 벌어졌는데 내각에서는 당시 헌법 Article II, Section 1, Clause 6에 따라 부통령이 ‘대통령 대행’(Acting President) 직을 수행하고 향후 대통령의 결정은 내각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 집행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지. 여기에 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발하고 대통령이 사망했기 때문에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면서 1841년 4월 6일 화요일 자신이 머물던 워싱턴의 ‘Brown’s Indian Queen Hotel’이라는 호탤 방에서 워싱턴, 디씨의 연방순회법원장 ‘윌리엄 크뤤취’(William Cranch)의 주재로 대통령선서를 했어. 미국 역사상 최초로 부통령이 전임 대통령의 잔임기간을 승계하면서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곧바로 백악관으로 들어갔지. 그때 쟌의 나이가 51세로써 당시까지 가장 어린 대통령이 되었어. 그 기록은 바로 다음 대통령 ‘제임스 폴크’(James Polk)가 49세로 대통령이 됨으로써 깨지긴 했지만.


[경원] 부통령이 된 지 43일 만에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쟌의 앞날이 축복보다는 걱정이 앞서네요. 왠지 그의 취임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놔둘 것 같지 않아요.

[해월] 잘 봤어! 대통령 임기를 채우지 못한 전임이 없었다는 사실로 혼란이 일 수밖에 없었겠지. 사실 대통령의 사망, 사임 등으로 공석이 생겼을 때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인수한다는 규정은 1967에 비준되어 법이 된 <제25차 헌법개정>이 있은 다음에야 공식적이 되었으니까. 대통령이 된 쟌에게 제일 처음 다가온 것이 바로 경원이가 걱정했다시피 내각장관들의 태도였어. 안 그래도 윌리엄 지지자들의 우려를 고려해 내각장관들을 모두 유임시켰는데 그들이 윌리엄의 직무처리 방식을 따라줄 것을 은근히 강요하는 행동을 보였지. 그러자 쟌은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본인의 뜻을 밝혔어 : “여러분과 같은 훌륭한 행정가들과 함께해서 매우 기쁘고 좋은 의견을 들을 수 있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인 내가 누군가에 의해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찬동하지 못함을 알아달라. 내 행정부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 뜻에 따른다면 같이 하는 것이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언제라도 사표를 수리할 준비가 되어있다.”


[경원] 아주 단호하고 명료한 쟌의 의지를 표현하네요.

[해월] 쟌 스스로는 당연히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여전히 그를 부통령 또는 대통령대행으로 불렀어. 그에게 ‘뜻하지 않게 된 우연히 무임승차한 대통령’(His Accidency)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지. 영국식 표현인 ‘His Excellency’(각하)를 비꼬아 불렀던 거야. 4월 9일에 비공식 취임연설문을 의회에 보냈는데 아무도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논쟁을 거듭하다가 끝내 5월 31일에서야 하원에서 그리고 6월 1일에는 상원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겨우 매듭지어졌지. 반대파들은 그래도 계속해서 백악관으로 보내는 서신에 부통령이나 대통령대행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는데 쟌은 그런 우편물들은 개봉하지 않은 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해.


[경원] 쟌은 임기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힘들었겠어요.

[해월] 우선 쟌은 그가 몸담은 위그당으로부터 축출당하고 말았어. 위그당 대표인 ‘핸뤼 크레이’(Henry Clay)가 상원과 하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 하자 처음에는 그에게 동조하던 쟌도 ‘핸뤼 크레이’가 추진하던 연방은행법 문제에서 위그당과 틀어지고 거부권을 두 번이나 행사하면서 등을 돌리게 되었지. 그러자 ‘핸뤼 크레이’ 파였던 내각장관들이 하나, 둘 사표를 쓰기 시작했고, 1841년 9월 13일에는 대통령이 물러 설 의사를 보이지 않자 당에서 쟌을 축출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어. 심지어 암살하겠다는 협박편지도 수백 통 날라 들어왔지. 위그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에서는 백악관 수리비 책정도 거부할 만큼 험악해졌고.


[경원] 저런! 대통령이 다수당인 자기 당에서 축출되고 의회가 절벽이니 앞이 캄캄하네요.

[해월] 연방정부 재정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의회와 실랑이를 벌이던 쟌은 끝내 1842년 8월 30일에 와서야 가까스로 연방수입의 근원인 관세법을 정리했어. 그리고 뉴욕세관에 부정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쟌이 3명의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조사결과 세관책임자가 벌인 범죄행위를 발견했지. 그런데 위그당 소속이었던 책임자의 범죄행위가 밝혀지자 위그당 의원들은 조사위원들에게 지급한 수고비가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지불되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쟌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조사관에게 돈을 지불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법을 제정하여 압박을 가했어.


[경원] 의회의 대통령 견제가 점입가경(漸入佳境 )이네요.

[해월] 그뿐 아니야. 1842년 7월에는 쟌의 정책에 반대하던 ‘쟌 보츠’(John Botts) 하원의원이 9개 항목을 가진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했어. 악명 높은 ‘엔드류 젝슨’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들이 의회의 고유권한인 법제정에 맞서 거부권을 별로 행사하지 않았는데 쟌이 여러 번 거부권을 행사하니까 ‘권한남용’이라는 거지. 또 ‘쟌 퀸지 에담스’ 전임대통령이자 하원 특별위원회 의장은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을 의회에서 재승인하는데 필요한 의결수를 3분의 2 찬성에서 과반찬성으로 개헌을 하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지. 탄핵안이나 개헌안 모두 실패했지만 쟌으로서는 도전과 시련의 시간이었어. 의회에서는 끝내 쟌의 임기 말인 1845년 관세청과 관련된 법안인 ‘탈세감시선 법’(Act relating to revenue cutters and steamers)을 쟌이 거부하자 다시 재승인하여 그의 임기 마지막 날인 3월 3일에 의회 최초로 대통령 거부권을 뒤집은 케이스를 만들고 말았지.


[경원]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을 의회가 뒤집는 첫 케이스가 쟌에게서 생겼네요. 그것도 임기 마지막날!

[해월]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이 각각 달리할 때 생기는 어려움인데 쟌은 국내문제와는 달리 대외정책에는 그런대로 업적을 이루었어. 쟌은 늘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국가로의 진출과 무관세교역을 희망하면서 자유를 널리 퍼트리고 싶었던 사람이었지. 국제시장에서 영국과 대결하기 위해 ‘카랩 쿠슁’(Caleb Cushing) 변호사를 중국(淸)에 파견하여 1842년 영국이 청과 맺은 ‘남경조약’(Treaty of Nanking)과 같은 수준의 ‘왕시아 조약’ (Treaty of Wangxia 望廈條約)을 1844년 7월 3일에 체결했어. 이는 미국과 청 간의 <평화우호통상조약>으로 의회의 비준을 거쳐 1845년 1월 17일 쟌이 서명했지만 정작 발효한 것은 근 백 년이나 지난 1943년 ‘중국 내 치외법권 포기에 대한 중-미 조약’ (Sino-American Treaty for the Relinquishment of Extraterritorial Rights in China)이 체결된 이후였어. 같은 해 쟌은 ‘핸뤼 위튼’(Henry Wheaton) 변호사를 독일의 ‘버린’ (Berlin)으로 파견하여 독일연합의 관세동맹인 ‘쏘훠라인’(Zollverein)과 통상협정 체결에 성공했지만 쟌 행정부에 거부반응을 보인 위그당의 방해로 비준에는 실패하고 말았지.


[경원] 외국과의 관계확립을 추진할 정도로 미국이 성장하는 모습이네요.

[해월] 쟌은 미국의 힘을 키우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기도 해서 해군지휘관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어. 1842년에 의회에 보낸 특별담화를 통해 ‘하와이’(Hawaii)에 ‘먼로 원칙’(Monroe Doctrine)을 적용하는 소위 ‘타일러 원칙’(Tyler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영국의 하와이에 대한 일체의 관여를 금지시키고 향후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작업을 시작했지. 그 외에도 서부개척에 앞장서 ‘쟌 후뤼만트’(John C. Fremont. 1856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첫 대통령후보가 된 인물임) 대위를 탐험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보내 ‘오뤼건’(Oregon), ‘와이오밍’(Wyoming) 그리고 ‘켈리훠니아’(California) 등지를 개척하여 많은 미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지. ‘라스 배가스’ 시 다운타운에 있는 ‘Fremont Street’라는 도로명이 그의 이름을 따 붙인 거야. 1844년 5월 24일에는 미국 최초로 워싱턴, 디씨와 볼티모어 시 사이에 전신선(telegraph line)을 가설하고, ‘후로뤼다’(Florida) 지역 원주민들과의 전쟁도 끝을 내 그의 임기 말인 1845년 3월 3일에는 ‘후로뤼다’가 미국의 27번째 주로 편입되었어.


[경원] 독립선언할 때만 해도 13개 주였던 미국이 69년이 지난 1845년에는 27개 주로 늘어났네요.

[해월] 그렇지. 당시 쟌에게 주어진 하나의 커다란 과제는 ‘택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의 미국편입이었어. 스페인으로부터 맥시코로 전해 진 택사스 지역에 이주하여 살던 미국인들이 1836년 ‘셈 휴스턴’ (Sam Houston) 장군의 지휘하에 맥시코로부터 독립하여 ‘택사스 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처음부터 미국에 편입되기를 희망했었는데 그동안 전임 대통령들은 북부지역 사람들이 택사스가 노예승인주가 되어 미국에 편입되는 것에 반대했고 또 여차하면 맥시코와의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편입승인을 주저했었지. 물론 남부사람들은 노예를 승인하는 택사스를 환영했지만. 노예지지성향인 쟌의 부단한 노력으로 1844년 4월 12일 양국 간에 ‘합병조약’(The Texas Annexation Treaty)이 맺어졌지만 6월 8일 상원에서 열린 비준표결에서 부결되고 말았어. 여러 고비를 넘긴 택사스 합병안은 마침내 1845년 2월 28일 임기 며칠을 앞두고 상, 하 양원에서 인준이 통과되었지. 3월 3일 쟌이 서명함으로써 법이 된 ‘택사스 합병법’을 택사스 정부에서도 6월 3일 받아들이면서 1845년 12월 29일 드디어 미국의 28번째 주로 확정되었지.


Republic of Texas map by Thomas Bradford _1838_(Boston)_UTA.jpg Republic of Texas 1845


[경원]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본인의 뜻을 관철시키는 인물이었군요.

[해월] 너무 본인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흠이 되어 퇴임 후 커다란 불상사가 생겼어. 북부에서 노예제도를 없애려 애쓰는 만큼 남부주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연방(Union)을 탈퇴하는 주가 생기기 시작했지. 1860년 대선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에이브러헴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주 들인 ‘알라베마’(Alabama), ‘후로뤼다’(Florida), ‘조지아’(Georgia), ‘루이지에나’(Louisiana), ‘미시시피’ (Mississippi), ‘사우스 케롤라이나’ ( South Carolina) 그리고 ‘택사스’(Texas) 등 7개 주 대표들은 연방을 탈퇴하고 새 정부수립을 준비하기 시작했지. 그러자 버지니아를 대표한 전임 대통령 쟌을 포함한 일부 북부와 남부의 131명의 대표단이 1861년 2월 4일 워싱턴 디씨에 있는 ‘윌라드 호탤’(Willard Hotel)에 모여 연방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어.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라고 불리는 이 회의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이 회의의 의장에 추대되었던 쟌 스스로도 모든 의안에 반대표를 던지고 끝내 남북전쟁을 막지 못했어. 게다가 그 회의 후에 ‘남부연합국’(Confederate State of America)에서는 쟌을 신설된 남부하원의 의원으로 선출까지 했으니 참으로 암담한 순간이었어.


Willard_Hotel 1861 Peace Conference.jpg Willard Hotel, Washington, D.C. 1861


[경원] 드디어 숙명의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피하면 좋았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네요.

[해월] 경원이 말처럼 비운이었지. 남부연합국 하원이 개원하기 전인 1862년 1월 12일 저녁 몸에 한기와 어지러움을 느낀 쟌은 구토를 하면서 묵고 있던 호텔방에서 쓰러졌어. 17일에 사저인 Sherwood Forest(쟌이 1842년 매입한 농장으로 원 이름은 ‘월넛 그뤄브’(Walnut Grove)였으나 반대파들이 그를 ‘정치적 무법자 Robin Hood’로 몰아세우고 그의 사저를 Robin Hood의 본거지인 ‘셔우드 숲’(Sherwood forest)이라고 부르자 그가 마지못해 이름을 바꾸었음.)로 돌아온 날 저녁 숨이 막혀오던 그는 브랜디 한잔을 마시고 의사에게 “여보게, 내가 이제 가려나 보네”라고 말을 건넸지. 의사는 “아니길 바랍니다!”라고 답했지만 쟌은 “아마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르지…”하면서 숨을 거두었어. 71세였어. 그의 유해는 버지니아주 뤼취몬드시에 있는 ‘헐리웃 묘지’(Hollywood Cemetery)에 전임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대통령의 묘지 가까운 곳에 안장되어 있어.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쟌이 마지막에 ‘남부연합국’을 지지하는 바람에 연방정부에서는 그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관에 미국기를 덮지 못하고 남부연합국기를 덮은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야.

John_Tyler's_grave.jpg John Tyler Tomb Stone, Hollywood Cemetery


[경원] 그런데 선생님! 아직 쟌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어요!

[해월] 그래?! 쟌 얘기하다가 가족얘기 할 시간이 없었구나. 허허. 서문에서 잠깐 얘기하긴 했지만 쟌은 자그마치 열다섯 자녀를 가졌잖아. 첫 부인 ‘래티샤 크뤼스쳔’(Letitia Christian. 11.12.1790 – 9.10.1842)과 1813년 결혼해서 여덟 자녀를 두었고 모두 성인이 되었지. 레티샤는 1842년에 백악관에서 뇌졸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쟌은 1844년 6월 26일 오랫동안 눈여겨봐 두었던 ‘줄리아 가디너’(Julia Gardiner. 7.23.1820 – 7.10.1889)와 재혼했어. 1844년 2월 28일 새 미군함 ‘프륀스턴 호’(USS Princeton) 출항식에 내각장관들을 포함해 400여 명의 하객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전함에 장착된 대포가 예포발사 순간 폭발하는 사고로 여러 장관과 내객 그리고 줄리아의 아버지 ‘데이빗 가디너’(David Gardiner) 뉴욕주 하원의원까지 사망하고 말았지. 폭발로 기절했다 쟌의 품에서 깨어난 줄리아는 그 후 쟌의 청혼을 받아들여 30살이라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하면서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어.

Letitia, Julia.png Letitia Christian (left) and Julia Gardiner (right)


[경원] 30살 나이차이가 나도 결혼할 수 있는 거네요?

[해월] 하하! 생각은 자유니까 알아서 생각해. 쟌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 ‘리온’(Lyon Gardiner Tyler. 1853-1935)도 재혼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젊은 부인을 맞이했는데, 자식을 늦게 보는 바람에 쟌이 70에 낳은 딸 ‘펄’(Pearl)은 그의 탄생 157주년 때까지 살아있었고, 리온의 아들은 쟌의 탄생 234주년이 되는 2024년 1월까지 생존하는 기록을 세웠지. 1928년생으로 ‘헤뤼슨 루휜 타일러’(Harrison Ruffin Tyler)라는 이름의 이 손자가 그의 부인과 함께 쟌이 백악관을 떠나 20여 년간 사망 시까지 살던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의 사저 ‘Sherwood Forest Plantation’을 맡아 관리하고 있었어. 본 글 맨앞 제자 배경 사진에서 보듯 이 저택은 1961년에 ‘국가역사사적지’가 되었어.


[경원] 역사적으로 가까운 후손이 그렇게 오래 살아남은 집안이 많지 않을 거예요? 손자가 할아버지의 234번째 탄신일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믿기지 않아요.

[해월] 쟌 자신은 역사가들이 별로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지만 이어진 가족의 역사로 보면 재고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흑인노예 50 ~ 70여 명을 소유했던 쟌이 노예와의 사이에 수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풍문이 있고 아직도 그의 후예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끝없이 이어지는 ‘타일러’ 가를 상상할 수 있어. 쟌 타일러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 이름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택사스주에는 미국과의 합병을 이끈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성을 따 ‘Tyler’ 시가 명명되어 기념하고 있어. 1938년에는 쟌의 초상을 넣은 10샌트짜리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지.


*쟌 타일러의 서명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John_Tyler_Signature.png



[본 글에서 나타난 지명이나 사람이름 등 고유명사는 영어 철자와 미국식 발음을 병기하였으며, 한글 발음표기 중 ‘A’는 ‘ㅔ’로, ‘E’는 ‘ㅐ’로 표기했습니다. 또한 ‘F’는 ‘P’(ㅍ)나 ‘H’(ㅎ)로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ㅎ’에 중모음을 붙였으나 불가피한 경우 ‘ㅍ’으로 표기했고, ‘R’도 ‘L’과 구분하기 위해 ‘ㄹ’에 중모음을 붙여 각각 된소리가 나도록 표기했음을 참고 바랍니다.]


연대표

Early Life & State Politics

1790: Born in Charles City County, Virginia.

1807: Graduates from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1811-1816: Serves in the Virginia House of Delegates.

1817-1821: Serves in the U.S. House of Representatives.

1825-1827: Serves as Governor of Virginia.

1827-1836: Serves in the U.S. Senate, resigning in opposition to Andrew Jackson.


Rise to Presidency & Presidency (1841-1845)

1840: Elected Vice President on the Whig ticket with William Henry Harrison.

April 4, 1841: President Harrison dies; Tyler becomes the 10th U.S. President.

April 6, 1841: Sworn in, establishing the precedent for full presidential succession.

1842: Expelled from the Whig Party for vetoing bank bills.

1844: Marries Julia Gardiner, his second wife, after first wife Letitia's death.

March 3, 1845: Signs bill annexing Texas; Florida becomes a state the next day.


Post-Presidency & Civil War

1861: Oversees Virginia Secession Convention; votes for secession.

1861-1862: Elected to the Confederate House of Representatives.

January 18, 1862: Dies in Richmond, Virgi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