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22

11대 제임스 폴크 1845 ~ 1849: 성취도 높은 유세장의 나폴래옹

by 김동준 David Kim

1795년 11월 2일 월요일 노스 케롤라이나주 ‘파인뷜’(Pineville)에 있는 통나무집에서 시골농부의 열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를 거쳐 민병대 대위, 주의회 의원과 연방 하원의원, 하원의장, 주지사를 역임한 뒤 1845년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제임스 폴크’(James Knox Polk. 1795. 11.2 ~ 1849.6.15)는 역대 대통령 중 미국의 국토를 가장 크게 늘린 대통령입니다. 영제국과의 협상을 통해 서북부의 땅 ‘오뤠건 부속령’(Oregon Territory) 국경논쟁을 끝내면서 케나다와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택사스 지역 편입 후 필연적으로 발생한 맥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택사스와 뉴 맥시코를 포함해 서부 태평양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미국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제임스 폴크’는 관세율을 상당히 낮추어 남부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는 한편 미국의 화폐정책과 재정정책을 재정립하는 ‘재무성(財務省) 독립법’(Independent Treasury Act)을 통해 20세기 연방 중앙은행의 기틀을 확립하는 기초를 닦았습니다.

어렸을 때 가졌던 ‘요로결석’ 수술의 부작용으로 초대 ‘죠지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불임증에 걸린 그는 끝내 자식을 두지 못했고, 그가 선거 켐페인에서 약속했던 ‘단임’을 지키고 1849년 3월 4일 폼나게 퇴임하였지만 퇴임여행을 하는 동안 불행하게도 전염병에 감염, 수개월만에 고향 네쉬뷜 (Nashville)에서 콜래롸(Cholera)에 걸려 53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을 추종했던 그는 고집불통 엔드류의 별명인 ‘늙은 히커뤼’에 빗댄 ‘젊은 히커뤼’(Young Hickory)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웅변에도 조예가 깊었는지 ‘유세장의 나폴래옹’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노예승인주와 노예불허주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임기 내내 시달린 ‘제임스 폴크’ (이하 제임스)에 대해 알아봅니다.


Polk.jpg James Knox Polk c.1849




[峻抛] 11대 대통령을 대하니 이제 거의 식민지가 아닌 미국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드네요, 선생님.

[海月] 그렇지? 10대까지만 해도 왠지 식민지 역사의 냄새가 묻어있는 것 같았는데 11대가 들어선 1845년은 독립선언한 지도 근 70년이나 되니 완전한 새 나라라는 생각이 드네. 새 대통령이 태어난 연도가 1795년이면 완전히 미국사람이 아니겠어?


[준포] 11대 제임스의 선조들은 어떤 분들이었어요?

[해월] 제임스의 선조들은 ‘스캇트렌드’(Scotland)와 ‘아일렌드’(Ireland)계 혼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17세기말에 최초의 선조가 미국의 ‘메륄렌드’(Maryland)주 동부해안가로 이주했는데 그 뒤로 ‘팬실붸니아’(Pennsylvania) 남중부로 이전했다가 ‘북부 케롤라이나’(North Carolina)로 이주했다는 정도의 정보만 남아있을 뿐 가족사에 대해서는 민망할 정도로 정보가 적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제임스의 직계 선조는 3대(曾) 조부 ‘윌리엄 폴크 시니어’(William Polk Sr. 1700~1757)까지 밖에 올라갈 수가 없지. 그 윗대로는 알려진 기록이 없어 모두 왈가왈부(曰可曰否)하는 상태야.

증조부 윌리엄은 메륄렌드주 ‘도채스터 카운티’(Dorchester County)의 ‘와잇홀’(Whitehall)에서 태어나 1725년에 ‘팬실붸니아’(Pennsylvania)주 ‘카라일’(Carlisle)에서 ‘마가뤳 테일러’(Margaret Nancy Taylor. 1704~1763)와 결혼해 막내아들 ‘이지키얼’(Ezekiel Franklin. 1747~1824. 제임스의 조부)을 포함해 모두 4남 3녀를 두었어.


[준포] 앞선 대통령들의 가족사에 비해 기록이 빈약한 이유가 있나요?

[해월]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가족사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상례이고 과학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하기도 하는데 아직 뚜렷한 이유가 알려진 것이 없으니 답답해. 후대의 무관심 아닐까? 제임스의 할아버지 ‘이지키얼’은 1747년 12월 7일 팬실붸니아주 ‘렝케스터 카운티’(Lancaster Couinty)의 ‘카라일’(1750년도에 ‘컴버렌드’ (Cumberland) 카운티로 편입됨)에서 여덟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어. 1753년경 가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노스 케롤라이나주의 ‘매크랜버그 카운티’(Macklenburg County)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주하고 얼마 안 있다가 아버지 윌리엄이 사망했지. 아버지가 사망하자 큰아들 ‘토마스’(Thomas Polk. 1732~1794)가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폈어. 이지키얼의 큰 형 ‘토마스’는 노스 케롤라이나주 민병대에 자원한 후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대령까지 진급한 군인이었고 전쟁 후에는 주 의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한 정치인이었지.


[준포] 제임스의 큰 할아버지인 토마스가 군과 주의회에서 미국의 독립에 이바지한 분이셨네요.

[해월] 집안의 기둥으로 굳건한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었지. 제임스의 할아버지 이지키얼은 1769년에 노스 케롤라이나주 ‘엔슨 카운티’(Anson County)에서 첫 부인 ‘메뤼 윌슨’(Mary Winslow Wilson. 1746-1791)과 결혼해 제임스의 아버지 ‘세뮤얼’(Samuel Polk. 1772.7.5~1827.11.5)을 포함해 여덟 자녀(이 중 둘은 일찍 사망함)를 두었어. 부인이 45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1792년에 두 번째 부인 ‘배씨 데이뷔스’ (Bessie Davis)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 생존자녀는 없었어. 그리고 1810년 11월 24일에는 ‘소피아 니리’ (Sophia Neely. 1775~1851)를 태내시주 ‘모뤼’(Maury)에서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해 또 네 자녀를 두었지.


[준포] 옛 분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할 일중에 제일 첫 번째로 치는 것 같아요. 이분 저분 가능하면 열 자녀라도 상관없으니 말이에요.

[해월] 가족번식을 최우선으로 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 조선에서도 어떻게 해서는 자식을 많이 두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있으니까.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산품 생산만큼 가족 경작도 중요한 생산으로 여겼다고 보여. 전쟁을 많이 치른 영향도 있겠지만 영국인을 포함해 옛 서구인들 관습으로 보면 여자는 인격체라기보다 아이를 낳는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니까. 저들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잖아. 제임스의 할아버지도 유럽계에다 농사를 지었으니 예외는 아니겠지.

할아버지 ‘이지키얼’은 독립전쟁 즈음인 1775년 형처럼 일찌감치 사우스 케롤라이나주 민병대 제3연대에서 대위로 근무하고 1776년에는 대대장으로 근무하다 중령까지 진급했지. 기록에 의하면 ‘이지키얼’은 1803년에 태내시주로 이주했고, 1824년 8월 31일 76세를 일기로 테내시주 ‘하드멘 카운티’(Hardeman County)의 ‘볼리봐’ (Bolivar)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있는 ‘폴크 묘지’(Polk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어. 그의 유서에 등재된 유산으로는 24명의 노예와 가축, 가재도구와 농기구 그리고 여러 책들인데 당시 가치로는 약 9,500 달러 정도였다고 해.


[준포] 할아버지는 아주 바쁘게 사신 분 같아요. 농사도 짓고, 전투에도 참여하고, 와중에 결혼도 세 번씩이나 하면서 자식도 열이나 두었으니 얼마나 바쁜 삶이었을 까요.

[해월] 76년을 삶면서 아마 쉴 여유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첫 부인 메리 윌슨과의 사이에 태어난 제임스의 아버지 ‘세뮤얼’은 노스 케롤라이나주 ‘매크랜버그 카운티’ (Mecklenburg County)에서 태어나 동향 사람인 ‘제인 낙스’(Jane Gracy Knox. 1776~1852)를 만나 1794년 크리스마스 날에 동네 교회인 ‘호프웰 교회’(Hopewell Church)에서 결혼했어. 이듬해 ‘파인뷜’ (Pineville)의 나무집에서 첫아들 제임스를 본 후 이들 부부는 9명의 자녀를 더 두었지. 어머니가 제임스의 이름을 지으면서 자신의 아버지(외할아버지)의 존함인 ‘제임스 낙스’(James Knox)를 그대로 넣어지었어.


Birthplace Log Cabin_(Reconstruction).jpg Birthplace of James K. Polk in Pineville, North Carolina


[준포] 제임스의 이름이 외할아버님의 성함이었군요.

[해월] 미국인들 중에 그렇게 이름을 이어받은 사람이 태반이었을 거야. 아버지 ‘세뮤얼’은 영국과의 두 번째 전쟁인 ‘War of 1812’에 참전했고, 소령계급장을 달았다는 기록이 있어. 세뮤얼과 부인 제인은 아버지 ‘이지키엘’이 1803년 태내시주 '모리 카운티'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자 1806년에 노스 케롤라이나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컬럼비아’(Columbia)시로 이사했어. 그곳에는 폴크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세뮤얼은 모리카운티의 법원 판사로 일하고 있었지.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손님들이 왔는데 그중 한 사람이 ‘엔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었어. 집안에서 늘 정치얘기를 나누었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을 지지했고 ‘연방주의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 제임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태내시주 컬럼비아에서 사망해 ‘그륀우드 묘지’(Greenwood Cemetery)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어. 아버지가 55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보단 상당히 짧은 생을 살았는데 사망원인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지.


[준포] 제임스가 아버지를 따라 태내시주로 이사한 것이 11살 때인데 새로운 곳으로 가 적응을 잘했는지 모르겠네요.

[해월] 매우 민감해할 나이에 이사하는 것은 어떤 아이들이라도 힘든 일이지. 제임스도 당시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 건강이 좋지 않았었는데 특히 요로결석(urinary stones)으로 인한 통증으로 힘들어했어. 아버지가 제임스를 '필라댈피아'에 있는 유명하다는 의사에게 데려가다가 너무 통증이 심해져 가던 길에 캔터키 주 ‘덴뷜’(Danville)에 있는 ‘이후뤼엄 맥다월’(Ephraim McDowell)이라는 의사를 만나 제거수술을 받았지. 마취약도 없던 시절, 수술 자체는 잘 되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제임스는 영원히 발기부전(勃起不全) 환자가 되었고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어.


[준포] 와! 비극이네요. ‘죠지 워싱턴’에 이어 자식을 못 낳는 두 번째 대통령이 되네요.

[해월] 그 당시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것 같아. 수술이 끝나고 곧 회복한 제임스는 통증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고 1813년부터 공부를 시작해 1816년 1월에 ‘노스 케롤라이나 주립대학교 ‘체플 힐 켐퍼스’(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에 2학년 2학기 학생으로 입학했어. 이 대학은 당시 학생수가 80명밖에 안되었는 데다, 아버지가 대학이 소유하고 있던 태내시 주내 토지의 관리사로 있었고 사촌이 대학 이사로 있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지. 기숙사 동기 중엔 나중에 후로뤼다주 첫 주지사가 된 ‘윌리엄 모스리’(William Dunn Moseley. 1795~1863)도 있었어. 토론반에 들어가 반장도 되고 웅변술을 익혔지. 그의 연설문 중엔 국내 지도자들 중 재퍼슨의 政敵이었던 ‘알랙산더 헤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이 군주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경고하는 내용도 있다고 했어. 1818년에 우등생으로 학업을 마친 제임스는 태내시주 ‘네쉬뷜’(Nashville)로 돌아가 유명한 공판변호사이자 후에 제13대 연방 법무장관을 지낸 ‘훼릭스 그뤈디’(Felix Grundy. 1777~1840)를 만나 첫 맨터로 모시고 법공부를 시작했지.


unc chapel hill campus.jpg Chapel Hill Campus


[준포] 제임스도 법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하여튼 변호사가 꼭 돼야 무언가 할 수 있나 봐요.

[해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으니까. 1819년 9월 20일에 제임스의 첫 공식 직책이 생겼어. 자신의 맨터인 ‘훼릭스’도 역임했던 태내시주 상원 서기에 선출된 거야. 그리고 1820년 6월에 변호사 자격을 얻은 제임스는 1821년에도 경쟁 없이 재선 되었고 그 이듬해까지 일을 보았어. 제임스가 변호사가 되어 처음 맡은 사건은 아버지의 폭행사건이었는데 1달러 벌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도록 변호에 성공했다고 해. 모리 카운티 에 사무실을 차린 제임스는 성공적으로 변호사일을 계속했고, 이때 쌓은 명성이 정치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


[준포] 아버지가 폭행사건의 피의자인데 아들이 변호를 하는 장면이 볼만했겠는데요.

[해월] 아이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제임스는 지역 메이슨(Mason)의 단원으로 일찍이 민병대에 차출되어 대위계급을 달고 태내시주 제5여단 기병연대에 근무했는데 나중에 ‘윌리엄 케뤌’(William Carroll. 1788 ~1844) 주지사가 그를 측근으로 삼으며 대령(Colonel) 계급을 주었어. 그때부터 제임스는 주위에서 ‘대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데 1822년 9월 의회가 휴회로 들어가자 1823년 8월에 있을 하원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어. 이미 폴크 가문 사람들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 데다 시간도 넉넉히 남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선거유세에 들어갔지. 청중들은 그의 열정적이고 웅변조 연설을 좋아하고 그를 ‘유세장의 나폴래옹’ (Napoleon of the Stump)이라고 불렀어. ‘체구는 별로 크지 않지만(173cm) 유세장에만 나타나면 나폴레옹처럼 천하를 호령하는 웅변가’라는 뜻이었지. 선거가 있던 1823년 8월 투표장에는 제임스가 마련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유권자가 많았어. 결국 그는 현역을 누르고 처음으로 주 하원에 입성하게 돼.


[준포] 신성한 투표장에 술이라뇨?! 그래도 되나요?

[해월] ‘죠지 워싱턴’도 유권자들에게 술을 제공했다고 하니 별 문제가 없는 일인가 보지. 예전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광경이었잖아. 주 하원의원이 된 제임스에게 또 하나의 축하할 일이 생겼어. 1814년경 19세이던 제임스가 태내시주 ‘머후뤼스보로’ (Murfreesboro)에서 ‘세뮤얼 블렉’(Samuel P. Black)을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던 7살 아래의 ‘세롸 칠드뤠스’(Sarah Childress. 1803.9.4~1891.8.14)와 백년가약을 맺은 거야. 제임스가 하원의원이 되자 양쪽 집안을 잘 아는 ‘엔드류 젝슨’이 나서서 결혼하라고 강권하는 바람에 공식으로 가까워진 이 두 사람은 1823년 약혼을 하고, 1824년 1월 1일에 신부 부모의 농장집에서 결혼식을 올렸지. 부인 ‘세롸’는 부유한 부모 밑에서 여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나 당시 주위 여성과는 달리 1817년에 여성교육의 첨단이었던 노스 케롤라이나주 ‘윈스턴-쎄럼’(Winston-Salem)에 있는 ‘모뤠이뷔언 교회’ (Moravian Church) 교단의 ‘쎄럼 아카데미’(Salem Academy)에 입학해 공부했어. 얘기했다시피 25년간 부부생활을 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부인은 제임스가 사망한 이후 42년을 재혼하지 않은 채 미망인 과부로 살았어.


Sarah Childress.jpg Portrait of Sarah Childress by George Dury. C.1883


[준포] 축하하려고 하는데 왠지 쓸쓸한 마음이 드네요. 대통령까지 지낸 부부였는데 자식복은 없네요.

[해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아직도 하늘이 낸 사람일진대 자식을 주지 않은 것도 무슨 뜻이 있었는지?! 집안사람들과 가까운 인연으로 ‘엔드류 젝슨’이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인 1823년에 제임스는 주의회에서 그에게 투표를 던졌지 <1913년 까지는 연방 상원의원을 주민이 아닌 주의회에서 선출했음>.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영웅이 된 ‘엔드류’는 상원의원이 되어 대통령이 되어가는 정치경험을 쌓게 되고, 제임스는 그와 손을 잡으면서 ‘젊은 히커뤼’(Young Hickory)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뜻을 나누게 되었지. 1824년에 있었던 대선에 출마한 ‘엔드류’가 국민투표와 선거인단 투표 모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반획득에 실패해 연방하원에서 결선투표를 하게 되었을 때 결선투표에서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에게 고배를 마실 당시 제임스는 따로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었어. 다섯 명의 후보가 격렬한 경쟁을 벌인 태내시주 제6선거구 선거에서 놀랍게도 29살의 제임스가 아직 어려서 일을 해낼 수 없다고 방심하던 상대방을 모두 꺾고 총 10,440명의 투표자 중 3,669표를 얻어 1825년 3월 4일 당당히 연방하원에 입성했지.


[준포] 30살의 제임스가 전국적 인물로 변신했네요.

[해월] 전국적인 인물이 확실히 되었지. 그가 1825년 12월 의회에 참석차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로 다른 태내시주 출신 의원들과 함께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때 들어온 사람 중에는 ‘셈 휴스턴’(Sam Houston. 1793~1863) 의원도 있었어. ‘셈 휴스턴’은 후에 맥시코 국토였던 ‘택사스’로 이주해 미국인들을 규합하여 ‘택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을 건국하고 1841년 12월 21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3대 대통령을 거쳐 택사스가 미국의 주로 편입된 후에는 택사스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했던 인물이야. 그런 인물, 저런 인물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니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것 같아.


Sam Houston 1793~1863.jpg Sam Houston 1793 ~ 1863 credit to Oldag07


[준포] 큰 물에서 놀 수 있는 사람은 그릇이 우선 커야겠지요?

[해월] 맞는 말이야. 괜히 망신당하기 전에 알아서 처신해야겠지. 어쨌든 전국적 파벌 싸움터인 연방 의회에 진출한 제임스의 첫 일성은 1826년 3월 13일의 의회연설을 통해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제도를 폐지하고 대통령을 국민투표만으로 선택하자"는 것이었어. 국민투표에서는 승리해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고, 자신이 지지하던 ‘엔드류 젝슨’이 선거규정에 따라 행한 하원투표에서 패하자 화가 났던 것 아닌가 해. 특히 선거 당시 여러 후보 중 4등을 한 ‘핸뤼 클레이’(Henry Clay. 1777~1852)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자리 약속을 받고 ‘쟌 퀸지 에담스’ (John Quincy Adams)를 지지하여 ‘쟌 퀸지’를 6대 대통령에 당선시키자 ‘정치적 야합’으로 몰아세우며 선거인단 투표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이라 생각해. 그러고는 ‘쟌 퀸지’ 행정부 내내 그의 정책에 반대했지.


[준포] 선거인단에서 대통령이 선출된다는 사실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또 아직도 폐지하자고는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데, 제임스가 그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군요.

[해월] 맞아. 그러나 제임스는 1827년 하원의원에 재선 되고, 1828년 11번째 대선에서 ‘엔드류’가 승리하고 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더 이상 선거인단 투표제도 폐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어. 다만 하원에서 강력한 ‘엔드류’의 지지세력이 되었지. 엔드류는 제임스의 지지에 보답해 제임스를 하원의장에 선출되도록 지원해 결국 1835년 12월 7일부로 제임스는 제13대 '연방 하원의장'(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이 되었어. 1836년 대선에선 당시 부통령이던 ‘마틴 붼 뷰뤈’(Martin Van Buren. 1782~1862)을 지지해 8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공을 세웠고, ‘마틴’ 행정부 기간 그를 하원의장으로서 나름 도왔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민주당 지지가 떨어지고 제임스도 1837년 12월 하원의장 선거에서 13표라는 적은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면서 1839년 선거에 회의를 갖게 되었어. 제임스는 1839년에 와서는 7번의 하원의원과 두 번의 하원의장을 역임한 것으로 만족하고 하원의원 출마를 접고 태내시 주지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 대통령 출마의사를 마음에 품은 제임스는 하원의장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없음을 주시하고 행정부 쪽으로 갈아 탈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고 봐.


Speaker by Peter S. Duval.jpg James Polk as the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 1835~1839


[준포]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하네요.

[해월]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태내시주에서 1835년 반대파인 ‘위그당’의 ‘뉴턴 케넌’(Newton Cannon. 1781~1841)이 주지사에 당선되자 절치부심(切齒腐心) ‘민주당 탈환’을 내세운 제임스가 1839년 8월 1일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세 번 연임에 도전한 ‘뉴턴’을 근소한 표 차이(54,102 대 51,396)로 제9대 태내시주 주지사에 당선되어 민주당의 주지사 탈환에 성공하고 주의회도 다수당 지위를 되찾게 되지. 태내시 주지사 자체는 별로 빛나는 자리는 아니지만 그를 발판으로 대선에 도전할 결심을 한 제임스에게는 주지사 당선이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

Governor by Miner Kellogg.jpg James Polk's gubernatorial portrait by Minor Kellogg 1840



[준포] 주지사에 당선되었으니 대선가도에 파란불이 들어온 것이죠?

[해월] 무엇이든 끝나야 끝난 거잖아! 주지사 자리에 앉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았어. 1840년 치러진 14차 대선에서 제임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미틴 붼 뷰뤈’의 러닝메이트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전당대회에서 부통령후보로 지명되는데 실패했어. 위그당의 장군 출신 ‘윌리엄 헤뤼슨’(William Henry Harrison. 1773~ 1841)이 인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재선에 도전한 ‘붼 뷰뤈’을 물리치자 제임스는 한동안 의기소침(意氣銷沈)해 있었지. 민주당의 대선패배와 경제정책 실패의 여파가 제임스에게 까지 불어 닥쳐 1841년 8월의 주지사선거에서 위그당 도전자에게 3,000표 차로 패하고 말았어. 그는 컬럼비아의 집으로 돌아와 변호사일을 하면서 1843년에 재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3,833표 차로 또 실패했지. 그의 정치생명이 불투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준포] 승승장구(乘勝長驅)라는 말이 있지만 제임스에게도 실패라는 경험이 쌓이는군요.

[해월] 제임스는 1844년 15차 대선에 또다시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붼 뷰뤈의 부통령 러닝메이트에 목표를 두고 조심스럽게 켐페인 준비를 해야 했어. 그만큼 국민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얘기야. 1844년 5월 27일 메륄렌드 주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노예문제와 연관된 ‘택사스 공화국 미국 편입’ 문제였는데 제임스는 편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붼 뷰뤈은 반대하는 성명을 내었지. 엔드류 때에도 뜨거운 감자였던 이 문제로 민주당 내에서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러 후보들을 놓고 투표를 했지만 ‘마틴 붼 뷰뤈’을 포함한 여러 후보들 중에 3분의 2 지지표를 얻는 후보가 없었어. 결국 5월 30일 폐회한 전당대회에서 제임스를 민주당을 대변하는 적격자로 대체판정하고 대선후보로 지명하고 말았어.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거야. 또 팬실붸니아주 출신 전 상원의원 ‘죠지 달라스’(George M. Dallas. 1792~1864)가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이변이 발생했지.

컬럼비아 집에서 지내고 있던 제임스는 시간이 꽤 지난 6월 6일에야 후보지명 소식을 접했는데 그는 12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당의 지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지만 대통령직에 대해 생각한 적인 없던 일이라 당선되더라도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한 번만 수행하겠다고 천명했어.


Polk_Dallas_campaign_banner 1844.jpg 1844 Presidential campaign banner produced by Nathaniel Currier



[준포] 부통령 후보에 관심을 둔 사람이 엉뚱하게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것도 역사적인 일이었겠죠?

[해월] 맞아. 결과적으로 제임스는 1844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15대 대선에서 캔터키주 출신 위그당의 '핸뤼 클레이'(Henry Clay. 1777~1852)를 상대로 국민투표에서는 49.5 퍼센트 득표를 했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275표 중 과반수가 넘은 170표를 얻어 105표를 획득한 '핸뤼 클레이'를 누르고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이로서 역대 대통령 중에 자기 출생지(North Carolina)와 거주지(Tennessee) 등 연고지에서 모두 패하고도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고, 연방 하원의장 출신으로서 당선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지. 그리고 49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도 되었어.


1844_Electoral_Map.png 1844 Presidential election results map


[준포] 역대급 역사를 만들어내면서 대통령이 된 제임스가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네요.

[해월] 1845년 3월 4일 열다섯 번째로 치러진 11대 대통령 취임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연방의사당'(U.S. Capitol) 동쪽 현관(East Portico)에서 가졌는데, 4년 임기를 채우고 더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제임스의 취임선서는 '롸저 테니'(Roger Brooke Taney. 1777~1864) 대법원장이 주재했지. 제임스의 취임식은 역사상 최초로 당시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기술과 철로망 확대, 그리고 무선전신기술로 급속도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어. 그리고 아래에서 보듯이 신문에도 그림으로 나타나기도 했지. <1845년도 백악관의 모습은 이 글 맨위 커버이미지 참조>

그리고 국토확장 열기도 더욱 심화되었어. 내각도 엔드류 사망 전에 새로운 인물로 구성하기로 하면서 6명의 장관을 교체했고 늘 구상했던 서부개척도 진행했지. 제임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한다면 미국 영토의 최대 확대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영국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케나다를 통치하면서 북미에 ‘오뤠건 컨트뤼’(Oregon Country. 현재의 오뤠건주와 워싱턴주를 포함하는 지역)라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을 협상을 통해 끝내 미국영토로 편입시켰어. 그리고 더 나아가 맥시코와의 전쟁을 감당해 내면서 과거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택사스의 미국 편입과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미국영토로 흡수하여 명실공히 근대 미국의 영토를 완결 지었어.


Polk_inauguration_Oath_London_News.jpg James Polk inauguration oath sketch appeared in The Illustrated London News


[준포] ‘오뤠건 컨트뤼’란 정확히 어떤 지역을 말하나요?

[해월] Oregon Country지역은 미 서부 태평양 연안의 북위 42도 이북지역으로 지도에서 보다시피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맥시코가 지배하던 켈리훠니아 북단경계에서 북쪽으로 북위 49도 선인 지금의 워싱턴주와 케나다 서부 해안지역을 포함한 지역이야. 이곳은 영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스페인 그리고 원주민들까지 관련되었었지만 지역 여건상 러시아와 스페인은 포기했고 원주민들도 영향력 행사가 미미해 결국 영국과 미국정부 간의 다툼이 되었어. 영국도 사실 거리가 멀고 전쟁을 계속하느니 어느 선에서 합의를 보고 싶어 했지. 영국은 오뤠건을 가로지르는 ‘컬럼비아 강’(Columbia River)을 경계로 삼아 그 이북 땅을 갖겠다 하고, 미국은 워싱턴주가 끝나는 북위 49도를 경계로 그 이남의 땅을 갖겠다 했지. 다만 ‘붼쿠붜 섬’ (Vancouver Island)은 비록 그 일부가 49도 아래에 있지만 모두 영국에게 주겠다 했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측 양보를 얻기 힘들다고 느낀 제임스는 1845년 12월 발표한 연례연설에서 ‘먼로 독트륀’(Monroe Doctrine)을 인용하면서 영국을 축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전략을 펼치면서 의회가 영국과의 ‘공동지배합의 폐기 선언문’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했지. 1846년 4월 의회까지 제임스에 동조하고 나서자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영국정부도 결국 미국의 요구에 동조, 1846년 6월 합의문을 미국 측에 전달했고, 상원이 이를 비준하면서 정식으로 영국과의 국경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 거야. 1775년 독립전쟁의 서문이 열린 이래 70여 년 만에 최종적으로 영국이 완전히 퇴출된 셈이지.


Oregon country 1846.png Oregon Country 1846 map


[준포] 와! 정말 역사적 사건이 1846년에 있었네요.

[해월] 더 역사적 사건은 맥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미국땅을 반 이상 늘려 놓은 사건이지. ‘쟌 타일러’(John Tyler. 1790~1862) 10대 대통령이 1845년 3월 3일 임기가 끝나기 하루 전에 의회에서 통과한 ‘택사스 미국편입 결의안’에 서명하고, 택사스 정부가 1845년 7월 미 의회 결의안을 자체 승인함으로써 택사스가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된 것은 1845년 12월이었지. 맥시코는 애초부터 '택사스 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의회의 결의안이 통과된 1845년 3월부터 외교관계를 중단하였기 때문에 택사스 문제는 양국 간 심각한 국경문제로 발전했어. 맥시코가 설마 전쟁을 하겠나 생각하던 제임스는 그래도 전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제커뤼 테일러’ (Zachary Taylor. 1784~1850) 준장을 택사스로 보내 전투에 대비케 하면서 맥시코가 도발할 경우에만 대응하고 먼저 전쟁을 유발할 만한 공격은 하지 말라는 전략을 폈지.


[준포] 군대를 남쪽으로 내려 보냈으니 전운이 감싸기 시작했겠네요.

[해월] 제임스 행정부가 그렇게 유도한 것이라 보는 설이 유력해. 군대를 보냈으니 전쟁생각은 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협상을 하라고 위협을 한 거지. 그래서 1845년 말 ‘쟌 스리댈’(John Slidell)을 협상자로 맥시코로 보내 ‘뉴 맥시코’(New Mexico)와 켈리훠니아 땅을 3천만 달러에 팔고 국경을 ‘뤼오 그롼대’(Rio Grande) 강으로 정할 것을 제안했지. 당시 ‘호새 해뤠롸’(Jose Joaquin Antonio Florencio de Herrera y Ricardos. 1792~1854) 맥시코 대통령은 ‘스리댈’을 만나주지도 않아 분위기가 싸늘했어. 그런 가운데 곧 맥시코의 ‘마뤼아노 파뤠대스’ (Jose Mariano Epifanio Paredes y Arrillaga. 1797~1849)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는데 그는 강경파로 택사스를 돌려받겠다고 작정한 사람이었어. 그렇게 되니 제임스는 스리댈 사건과 새 정권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테일러 장군은 군대를 택사스 최남단 지역인 맥시코의 ‘마타모뤄스’(Matamoros) 시 강 건너에 주둔시켰지. 이때 맥시코 군과 가벼운 접촉이 일어났고 4월 25일에는 수십 명의 미군 사상병이 발생한 소위 ‘손튼 사건’(Thornton Affairs)이 터졌어. 5월 9일 이 소식을 접한 제임스는 의회에 ‘맥시코가 미국땅에 미국인의 피를 뿌렸다’며 전쟁선포를 요구했는데 하원에서 즉각 결의안을 승인하여 통과시키고, 상원에서도 논쟁 끝에 결국 통과됨으로써 맥시코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어.


[준포] 드디어 맥시코와 미국 간 전쟁이 터지고 마는군요!

[해월] 1846년 5월 9일 전쟁선포와 더불어 시작된 맥시코와의 전쟁(Mexican-American War)은 1848년 2월 2일 ‘과달루패 히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이 맺어지면서 종식을 가져왔어. 미국은 3월 10일 상원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조약을 비준했고, 맥시코 정부도 곧 승인했는데 제임스가 1848년 7월 4일부로 조약의 효력을 발동시키면서 맥시코와의 전쟁은 종결되었어. 1853년 마지막으로 ‘게스댄 매입’ (Gadsden Purchase)을 통해 멕시코로부터 최종 매입한 약간의 땅을 포함해 미합중국이라는 큰 땅덩어리가 마무리된 거야.


Treaty_of_Guadalupe_Hidalgo 1848, Gadsden Purchase 1854.png South-Western lands purchased from Mexico by 1853



[준포] 맥시코와의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얻은 땅 규모가 그럼 얼마나 돼요?

[해월] 맥시코가 택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택사스를 포함하고 서부의 분쟁지역 그리고 맥시코가 지배하던 뉴 맥시코(New Mexico), 에뤼조나(Arizona), 유타(Utah), 내봐다(Nevada), 켈리훠니아 (California) 등의 땅을 모두 포함하면 약 915,000 스퀘어 마일이 되지. 한국의 제주도가 약 720 스퀘어 마일 정도이니까 맥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흡수한 땅의 규모는 제주도의 1,270배 정도가 돼요. 이는 1803년 ‘토마스 재훠슨’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에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을 통해 매입한 827,000 스퀘어 마일 그리고 1867년의 ‘얼레스카 매입’(Alaska Purchase)의 586,000 스퀘어 마일보다 큰 규모야.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끼친 손해에 보상하는 뜻으로 맥시코에 1천5백만 달러를 별도로 지불했고 맥시코정부가 가지고 있던 3백25만 달러의 대외부채도 인수했어. 반대로 맥시코는 1836년 이전의 국토에서 55 퍼센트를 미국에 넘겨주고 말았지. 이를 보더라도 미국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어. 47대 대통령으로 재 등극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6.14 ~)가 '댄마크'(Denmark) 영토인 '그륀렌드 섬' (Greenland Island)을 미국의 안보에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고 매입하겠다고 나섰으니 귀추를 두고 보자고.


[준포] 미국이 이웃 맥시코를 아직까지 여러 방법으로 지원해 주는 이유를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해월] 그것이 국가적 운명이겠지. 신생국가가 오랜 역사를 가진 이웃을 범했는데 아무런 조치도 못 했어. 맥시코인들은 아직도 켈리훠니아를 자신의 땅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래서 계속 공식, 비공식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 아닐까? 2020년 행해진 켈리훠니아주 인구조사에 보면 남미사람(Hispanic)들의 인구수가 전체 주민의 40 퍼샌트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준포] 남미사람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미국의 삶이겠지요.

[해월] 제임스는 국내 정책에도 여러 가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중 국가재정을 여타 금융기관이나 주정부 허가 은행에 맡기지 않고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한다는 ‘재무성 독립법’(Independent Treasury Act)을 제정하고 정부세입을 재무성 자체에 보관하기 시작해 1913년 ‘연방중앙은행법’(Federal Reserve Act)이 제정될 때까지 지속되었지. 또한 관세(Tariff)를 내려달라는 주위의 희망에 부응해 1846년에 새 관세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영국과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어. 그러나 같은 해 의회에서 ‘강과 항만법’ (River and Harbors Bill)을 통과시키면서 50만 달러를 책정하여 항구시설 증강에 쓰도록 유도했는데, 제임스는 이 같은 법이 특정지역에 혜택을 줄 수 있고 해외교역이 없는 항구를 포함하기 때문에 위헌적 법이 될 수 있다면서 거부했지. 그리고 이 같은 법안이 의원들이 자기 출신구에 특혜를 주고자 애써 결국 부패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며 우려했어. 제임스는 계속해서 연방예산을 투입한 지역발전 프로그램들을 반대해 의원들의 원성도 많았었지.


[준포]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네요. 의원들의 출신주 사랑이 부패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해월] 1848년 즈음 워싱턴 정가에서는 재선도전을 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선언한 제임스를 대놓고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맥시코에 돈까지 줘가면서 왜 그 먼 곳에 있는 켈리훠니아를 미국에 편입시키려 애썼냐는 것도 있었어. 그때도 어이없게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았었나 봐. 그런데 느닷없이 켈리훠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온 나라와 온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 제임스로서는 자신이 취한 국토확장정책이 빛을 본 상황이라 마지막 국정연설에서 여러 번이나 반복해서 금 발견 얘기를 했어. 금 발견 소식에 이어 진짜 켈리훠니아에서 캐낸 금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자 제임스는 또다시 의회에 본인의 정책이 정당했다는 연설문을 보냈어. 곧이어 내국인들은 물론이고 외국 여러 나라에서 켈리훠니아 금을 쫓아 몰려들기 시작했지.


California Gold Rush 1848.jpg An advertisment of clipper ship from New York Ciy to California 1850s


[준포] 켈리훠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처음 나온 때가 제임스 대통령 때였군요?

[해월] 기분 좋게 직을 물러나려 했던 제임스는 1848년의 16차 대선에서 매우 실망하게 되었어. 민주당에 내분이 일어나 대선주자들이 각기 당을 만들어 나가고, 자기가 보기에 많이 모자란 ‘제커뤼 테일러’ 장군이 위그당 대선주자가 되더니 급기야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지. 민주당의 분열이 가져온 결과였어. 흡족지 못한 ‘제커뤼 테일러’ 신임 대통령의 1849년 3월 4일 취임식에 참여한 후 깨끗이 직을 물려준 제임스는 부인과 함께 워싱턴을 떠나 남부 여러 주를 방문하여 인사를 한 뒤 태내시주 네쉬뷜에 미리 사둔 사저 ‘폴크 프레이스’(Polk Place. 원래는 Grundy Place였음)로 들어갔어.


Polk Place 1849 - 1901.jpg Polk Place, Nashville, Tennesee


[준포]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네요.

[해월] 그것이 삶의 진리겠지. 남부 여행 중 ‘엘라바마’주에 도착했을 때 독감 기운을 보였던 제임스는 ‘뉴 올리언스’(New Orleans) 행 강유람선(riverboat)에 올랐는데 뉴 올리언스에 콜래롸(Cholera)가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어. 그런데 같은 배를 탔던 승객 중에 한 사람이 콜래롸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 그렇지만 여행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몸이 좋지 않았던 제임스는 일찍 돌아가려 했지만 지역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에 그러지도 못하고 상륙해서 호텔방에서 4일을 요양한 후 4월 2일에 태내시주 네쉬뷜에 도착해 또 한 번 환영인파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지. 태내시주 '컬럼비아'의 집안 고택에 사는 어머니 '제인 낙스 폴크'(Jane Knox Polk)를 잠시 방문한 후 ‘폴크 프레이스’로 돌아온 제임스는 새 삶을 갖는 듯하더니 6월에 다시 앓기 시작했어. 의사 몇 명이 다녀간 뒤에 제임스는 어머니와 부인이 장로교 독실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신봉하던 ‘감리교’(Methodist) 방식으로 세례 받기를 원하면서 감리교에 귀의했지. 1849년 6월 15일 금요일 오후 제임스는 사저에서 53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부인을 향해 ‘세롸, 난 당신을 영혼의 세계에서도 사랑할 거야. 사랑해!’라는 말을 남겼어. 장례는 네쉬뷜의 ‘멕캔드뤼 감리교회’(McKendree Methodist Church)에서 치러졌고, 전염병환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잠시 ‘네쉬뷜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850년 그의 유언에 따라 ‘폴크 프레이스’에 이장되었어. 그리고 부인 세롸는 그의 사후 42년간 ‘폴크 프레이스’에서 미망인으로 살다가 1891년 8월 14일 87세 나이로 사망했지. 그녀의 사후에 두 사람의 유해는 1893년에 ‘태내시주 의사당’ 인근 부지로 이장되어 현재까지 함께 안장되어 있어.


Tomb.jpg James Knox Polk Tomb, Tennessee State Capitol


[준포] 제임스는 비록 5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미국으로 봐서는 많은 역사를 이룬 지도자로 여겨지네요.

[해월] 맞아. 역사가들은 그를 죠지 워싱턴 다음으로 성취도가 높은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어. 대통령으로서 하루 종일 책상에 매달려 매사를 꼼꼼히 살피고 챙기는 등 열심히 일을 해 이루겠다고 약속한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대통령으로 전해지고 있지. 행정부 책임자로서 아랫사람들을 잘 관리하고, 군통솔자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의회와의 소통을 무난히 이끌어 국민들이 받드는 지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다만 한가지 제임스는 자신의 노후생활을 염두에 두고 미시시피주 '커휘뷜'(Coffeville) 일대에 약 110만평 규모의 목화농장(cotton plantation)을 소유하고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예를 소유했기 때문에 노예소유와 노예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지. 그래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택사스와 인근 지역들을 미국의 주로 편입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특히 재임 기간중인 1846년 8월 8일 팬실붸니아주 출신 하원의원 '데이빗 윌못'(David Wilmot. 1814~1868)이 맥시코와의 전쟁으로 편입 될 지역에 노예제도를 금지시킬 것을 내용으로 한 '윌못 조항'(Wilmot Proviso)을 의회에 제안했지만 이를 거부함으로써 오랜 동안 노예문제로 인한 논쟁의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끝내 미국이 내전(Civil War)으로 치닫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어.

짧은 삶 동안 많은 업적을 쌓은 제임스는 안타깝게도 자식은 못 두었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으리라 믿어.


‘제임스 낙스 폴크’의 공식 서명입니다.

James_K_Polk_Signature.svg.png




[본 글에서 나타난 지명이나 사람이름 등 고유명사는 영어 철자와 미국식 발음을 병기하였으며, 발음표기 중 ‘A’는 ‘ㅔ’로, ‘E’는 ‘ㅐ’로 표기했습니다. 또한 ‘F’는 ‘P’(ㅍ)나 ‘H’(ㅎ)로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ㅎ’에 중모음을 붙였으나 불가피한 경우 ‘ㅍ’으로 표기했고, ‘R’도 ‘L’과 구분하기 위해 ‘ㄹ’에 중모음을 붙여 각각 된소리가 나도록 표기했음을 참고 바랍니다.]


Timeline


Early Life & Education (1795-1823)

1795: Born in Pineville, North Carolina.

1806: Family moves to Tennessee.

1818: Graduates from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818-1823: Studies and practices law in Nashville.


Early Political Career (1823-1844)

1823: Elected to the Tennessee State Legislature.

1824: Marries Sarah Childress.

1825-1839: Serves in the U.S. House of Representatives.

1835-1839: Serves as Speaker of the U.S. House.

1839: Elected Governor of Tennessee.

1841, 1843: Loses re-election bids for governor.


Presidency & Major Events (1845-1849)

1844: Elected 11th U.S. President (Democratic Party).

1845: Annexation of Texas; Texas admitted as a state.

1846: Oregon Treaty with Britain sets boundary at 49th parallel; Mexican-American War begins.

1848: Treaty of Guadalupe Hidalgo ends war, ceding vast Southwest territory to U.S..

1849: Leaves office after one term, fulfilling promise.


Death & Legacy (1849)

June 15, 1849: Dies in Nashville, Tennessee, from cholera, just months after leaving off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