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못했던 30분

by 심홍석

중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여사친이 있었다. 중학교 3년 내내 친하게 놀던 4인방 중 한 명이었고, 그래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일대일로 얘기를 해보거나 시간을 보낸 적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 애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평소와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홍석아, 뭐 해?”

“어. 나 그냥 쉬고 있었어. 왜?”


대답이 없었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전화해 놓고 왜 말이 없냐고 물어봤을 테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공기가 느껴져 나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조금씩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00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잠시 더 흐느끼던 그 애가 말했다.

“나 오빠랑 헤어졌어.”

그러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애는 1년을 넘게 만났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도 잘 알고 지내던 형이었다. 둘이 성격도 잘 맞고 취향도 비슷해서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울음은 한참 계속되었다. 그 애는 거의 30분가량을 울다가 멈췄다가 또 울다가 멈췄다가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왜 헤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왠지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의 나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같이 그 형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히려 잘됐다거나 괜찮을 거라는 어쭙잖은 위로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밥을 사주겠다거나 다른 남잘 소개해 주겠다거나 하면서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땐 그러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한참을 울다가 그 애가 먼저 입을 뗐다.

“당황했지? 미안해.”

“괜찮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안 괜찮으니까 울었겠지.

“응. 고마워. 이제 끊을게.”

“그래. 안녕.”

그렇게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전엔 그 애와 그다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었던 터라 그날 그렇게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왜 그랬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얘가 나한테 이렇게 전화를 했을까 싶기도 했다. 나중에 그 이별에 대해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시간이 꽤 지났을 때, 그 애가 그때 그 일을 꺼내며 참 고마웠다고 했다. 많이 의지가 되었다고. 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살다 보니 이와 비슷한 경험이 몇 번 더 있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울고 싶을 때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가 보다 싶었다.




매일 상담실에 누군가가 찾아와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는다. 그중에는 그때 그 애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고 있는 사람도 있고, 울고 싶은데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도 있다. 난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탐색적 질문을 하기도 하고, 공감적 반응을 하기도 하고, 해석이나 조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마치 감기처럼. 그냥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하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낫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일 때가 있다. 자꾸만 그들을 빨리 낫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섣부르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상담사니까. 나는 돈을 받았으니까. 내가 무능하다고 여겨지면 안 되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해지곤 한다. 때로는 그냥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그 전화를 떠올리곤 한다. 그냥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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