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찾아온 복통과 고열에 시달리다 새벽에 결국 응급실을 찾았다. 장염이었다. 장염이 어찌나 독했던지 고작 장염에 2박 3일씩이나 입원했다. 지독히도 앓았다.
새벽에 응급실을 찾은 경험은 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장염이나 위경련으로, 그리고 몇 번의 요로결석으로. 좋은 인상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가득했고, ‘응급’ 실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치는 더디고 답답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경험을 했다. 깊은 새벽이었지만 간호사도 의사도 몹시 친절했다. 간호사들은 정성스럽게 나를 돌봐주었고, 의사도 꼼꼼하게 증상을 잘피며 자신의 진단과 치료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입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치의는 회진 때마다 꼼꼼하게 치료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간호사들도 귀찮으리만큼 자주 와서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로 상태를 체크하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에 나는 과잉 친절에 대해 삐딱한 시선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식당을 가든, 관공서를 가든, 시장이나 마트에 가든, 어딜 가든 너무 과도한 친절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직업윤리를 잘 지켜 성실하고 전문성 있게 일하면 되는 거지 굳이 왜 친절까지 바라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왔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니, 살갑지 못하고 숫기가 없어서 늘 핀잔 듣고 겉돌았던 내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야. 동창들 모임에도 좀 자꾸 얼굴 비추고 연락도 종종 하고 그래. 인맥 관리도 좀 하고. 이 바닥에서 인맥이 중요한 거 잘 알잖아.”
동기들의 익숙한 잔소리에 마지못해 참석한 자리는 늘 어색했다. 흥미 없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며 억지웃음을 짓고 시간이 가길 견디다 진이 빠진 채로 집에 와서 쓰러지곤 했다.
다른 기억들도 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에게 좀 더 아버지에게 살갑게 굴기를 바라셨다. 교육 전도사 시절 담임목사님은 나에게 “심전도사는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뻣뻣해.”라고 하셨다. 군대에서도 선임들은 나에게 “넌 왜 그렇게 들러붙는 걸 못하냐.”라고 타박했다. 부목사 시절 나에 대해 흠을 잡으려던 사람들이 나를 욕하던 구실도 “부목사가 살갑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마음은 무엇일까? 힘에 눌리고 싶지 않은 반항심리일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굴욕감이나 피해의식일까? 아니면 나를 수용해 주는 따뜻한 권위자와의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생긴 학습된 두려움일까?
여러 기억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반대로 내가 친절했던 기억들도 툭툭 떠올랐다. 학교에 잘 적응 못하고 겉돌던 친구들, 군대나 직장 후임들, 학교 후배들, 내가 리더일 때 돌보았던 대상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난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다. 관심을 가졌고,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고, 불편을 덜어주고 싶어 했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왜 굳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챙기는지,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는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하기도 했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친절함’ 자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난 친절함을 좋아한다. 불편했던 건, 친절함이 강요되는 상황, 혹은 내가 살갑지 못하다는 평가였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경직되고 불편해 하면서도, 한편 살갑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한심해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상황 가운데 나를 억지로 꾸겨 넣었다. 그때마다 차곡차곡 무력감과 수치심을 내 안에 쌓아온 것이다.
나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조금은 더 내버려 두기로 했다.
살갑게 굴어야 할 상황에서 쭈뼛거리고 뚝딱거리며, 때로는 삐딱하게 구는 그대로 괜찮다고.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의 나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오히려 내가 살갑게 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더 친절하고 다정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조금 더 관심을 주기로. 그 병실, 아파서 웅크리고 있던 나의 마음을 위로했던 그 진심 어린 관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