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지만 제가 커피를 못 마셔서요...”
커피를 못 마시는 것이 왜 죄송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불쑥 커피를 건넨 사람의 얼굴에 살짝 당황과 실망하는 빛이 스치는 것을 나는 놓지 못한다.
나는 커피를 못 마신다. 커피를 마시면 얼마 못 가 나의 교감신경은 과활성화 되어서 날 괴롭히기 시작한다. 괜스레 불안해지고 두근거리고 예민하고 살짝 흥분되어 있는 신경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아 진다. 하지만 내 책상에는 곧잘 누군가가 호의로 가져온 커피가 올려져 있거나, 혹은 직접 누군가가 찾아와서 커피를 건네주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거절을 하거나, 몰래 다른 사람을 주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몰래 화장실에 버리며 미안함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살면서 거절해야만 하는 것은 동료의 부당한 업무 요청이나, 나에게 불필요한 제품 강매,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 같은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사다 준 커피, 나를 위해 밥을 사겠다는 식사 제안, 날 위해 만들어온 샌드위치나 반찬들, 날 위해 제안해 준 이직 자리나 소개팅, 딱히 배고프지도 않은데 자꾸 깎아오는 과일들, 날 돕겠다는 사람의 도움이나 조언들, 날 좋아한다는 고백까지. 나를 위해 베푸는 호의, 기회, 조언이나 제안들. 어쩌면 “난 네가 필요해”보다 거절하기 어렵고, 더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내 마음을 흔드는 목소리는 “넌 내가 필요해”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거절은 어렵다. 나에게 자꾸 뭔가를 해달라고 조르는 소리들. 즉, “난 네가 필요해”라는 목소리를 거절하는 것도 미안한 마음은 든다. 하지만 그건 그나마 나은 점들이 있다. 어쨌든 상대방이 무리한 부탁을 했다고 불평을 하거나,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마땅한 이유들을 꺼내면서 정당화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부탁하는 과정에서 무례하거나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더더욱 그렇다. 거절해도 내 마음이 덜 미안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하는 소리들. “넌 내가 필요해”라는 목소리는 거절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상대방의 진심과 호의를 거절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호의를 베풀고도 거절을 당하는 ‘착하고 가여운 사람’이 되고, 나는 호의를 받아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악의로 갚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아주 고약한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주는 더 고약한 점이 또 있다. “넌 내가 필요해”라는 목소리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누구나 사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 않은가? 누구나 사실 혼자서 완벽할 수 없지 않은가? 누구나 때론 자기의 판단에 확신이 없고, 흔들리고,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우리의 약한 마음을 “넌 내가 필요해”라는 목소리가 흔들고 들어온다. 이걸 거절해도 괜찮을까? 진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거절하는 것은 아닐까? 저것이 없어도 나는 괜찮을까? 거절하고 나면 다시는 호의가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난 네가 필요해”라는 목소리와 “넌 내가 필요해”라는 목소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실은 전자 뿐만 아니라 후자도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가지고 나에게 접근하는 목소리다. 그들도 내가 뭐가 진짜로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결핍과 필요를 호의와 선의로 포장해서 나에게 다가오고, 그것으로 나에게 의존하고 싶은 시도일 뿐이다. 다만, 더 비겁하다. 자신이 받을 거절감이 무서워서, 의존하고 싶은 자신이 연약하고 초라하게 보여서, 그것을 호의로 포장해서 나에게 죄책감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느껴야 하는 죄책감이 아니다. 상대방의 욕구, 상대방이 느껴야 하는 거절감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상대방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상대방이 던져놓은 죄책감에, 내가 만들어낸 불안까지 더해져서 혼자 곤두박질치든지, 그게 싫어서 결국 질질 끌려가고 만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것은 미안해하거나 변명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삶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걸 채울 수 있는 힘도 있다. 굳이 받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이 커피든, 과도한 호의나 도움이든. 나를 위한다는 기회나 조언이든. 마음은 고맙지만, 그 커피는 마시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