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21화, 누가 구원받은 성도인지 분별하는 성경적 근거
일요일 오전, 목회자는 강단에 선다. 회중석을 가득 메운 얼굴들. 누군가는 찬송가를 목청껏 부르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누군가는 시계를 힐끗힐끗 본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질문 하나. "목회자는 이들 중 누가 진짜 구원받은 자인지 아실까?"
"목회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죽은 후 천국 가봐야 아는 거 아닌가요?"
당신도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은가? 마치 블랙박스처럼, 구원은 열어봐야만 아는 것이라고.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정통 개혁 신학은 두 개의 진리를 동시에 붙든다. 하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주권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이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이다. 목회자가 누군가의 이마에 '택자' 도장을 찍거나 '불택자' 스티커를 붙일 권한은 없다.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우리가 아노니"(살전 1:4).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도 비슷한 표현이 등장한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는 교회 내의 분열을 극복하고 복음 사역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권면하는 장면이다.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 그리고 다른 모든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택자이며, 그들의 수고가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그는 교인들이 구원받은 택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바울은 영안이 열려서? 꿈에 계시를 받아서? 천사가 알려줘서?
아니다. 답은 바로 다음 구절에 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 복음이 전해졌고, 성령이 역사했고,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그 열매로 바울은 '알았다'. 마치 정원사가 씨앗을 심고 싹이 트는 것을 보며 "아, 이 씨앗은 살아있었구나" 하고 확인하는 것처럼.
성경은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 놀랍도록 구체적이다. 추상적인 신학 용어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인 이미지를 빌려온다.
구약 스가랴서 10장 8절은 하나님이 택자를 부르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으리니." 시골 목자가 흩어진 양 떼를 부를 때 휘파람을 분다. 그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 소리를 알아듣는 건 목자의 양들뿐이다. 다른 짐승들은 그저 바람 소리로 듣는다.
복음도 그렇다. 같은 설교를 듣는데,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훈계로 들린다. 같은 찬송을 부르는데, 누군가는 영혼이 뜨거워지고 누군가는 시간만 재고 있다. 왜일까? 휘파람을 알아듣는 귀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택자는 복음의 휘파람을 듣는다. 그리고 반응한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거듭난다(엡 1:13-14).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다(고후 5:17). 이건 종교적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다. 마치 색맹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색을 보게 된 것처럼, 먹먹했던 귀가 뚫린 것처럼, 삶에 변화가 온다.
그렇다면 반대편에 선 이들은 어떤가? 성경은 그들의 특징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8~12절은 불택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진리, 즉 복음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을 좇는가? "거짓 것의 모든 능력과 표적과 기사"(살후 2:9). 능력, 표적, 기사. 우리말로 하면 기적, 신유, 방언, 입신, 황홀경. 드라마틱한 체험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은사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분명히 존재한다(고전 12장). 문제는 순서와 토대다. 복음이라는 뿌리 없이 은사라는 열매만 따려 하면, 그건 조화(造花)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생명이 없다.
무당이 굿을 할 때를 생각해 보라. 춤을 추고 신내림을 받는 그 순간, 몸과 감정은 강렬하게 흔들린다. 황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끝은? 공허함이다.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의 이름으로’ 했다는 게 핵심이다. 종교 활동은 열심히 했다. 심지어 초자연적 현상까지 동반됐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다. 왜?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한국 교회를 관찰하다 보면 묘한 풍경이 보인다. 열정은 넘치는데 뿌리는 얕다. 마치 화려한 꽃꽂이처럼 보기는 좋은데, 정작 땅에 심겨 있지 않다. 체험과 감동은 풍성한데, 말씀의 기초는 부실하다.
말씀은 씨앗이다(눅 8:11). 성령은 생명의 숨결이다(요 3:8). 씨앗 없이 아무리 숨을 불어넣어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씨앗만 있고 숨결이 없으면 그건 죽은 씨앗이다. 둘이 만나야 생명이 잉태된다.
"복음 없이 기도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거나 "말씀 공부는 안 해도 은사 체험만 있으면 된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마치 레시피 없이 요리하거나, 악보 없이 연주하려는 것과 같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목회자라면,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내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 말씀 위에 세워진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지식과 체험, 감동만 자극하고 있는가?”
평신도라면, 이렇게 성찰해야 한다. “내 신앙의 기초는 무엇인가?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십일조를 내고 봉사를 하는데, 정작 복음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종교적 루틴을 반복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닌가? 신학 지식은 풍부한데 가슴은 차갑다. 교리는 줄줄 외우는데 이웃에게는 냉담하다. 성경은 많이 읽었는데 삶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건 더 다양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다.
반대로 이런 사람은 어떤가? 감정은 뜨거운데 분별력이 없다. 신비한 체험은 많은데 말씀의 기초가 약하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삶은 제멋대로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체험이 아니라 복음의 뿌리다.
목회자가 누가 택자이고 불택자인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이 역사하고, 믿음의 열매가 맺힐 때, 목회자는 바울처럼 "너희가 택자임을 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물론 그 목회자 자신이 먼저 택자여야 분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알곡과 가라지는 종말에 최종적으로 드러난다(마 13:30). 하지만 지금 여기서, 당신의 귀에 복음의 휘파람이 들려오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이 그 소리에 반응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하나님의 양 중에 하나라는 증거다.
문제는 "목회자가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휘파람을 들었는가? 당신의 심장은 뛰고 있는가? 복음이 당신을 붙들었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애매하지 않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당신을 알고 계신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5)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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