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23화, 영접 기도에 대한 오해와 성경적 진실
“지금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겠습니까?”
어느 날 후배가 보여준 교회에서 전도지 마지막 부분에 적힌 문구였다. 과거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이 그 날 따라 눈에 쏙 들어왔다. 이 문장은 한국 교회에서 주문처럼 반복해 사용해왔다. 전도자는 결단을 촉구하며 “따라 하세요”라고 이끌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영접기도가 공식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도가 구원의 본질을 대체해버렸다는 현실이다. 믿음은 뒤로 밀려났고, 형식만 남았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아는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성령이 오신다." 다락방, 지방교회, 베뢰아 같은 이단들이 이 해석을 앞장서서 퍼뜨렸고, 정통 교회에도 슬그머니 들어왔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처럼.”(갈 2:4)
하지만 원문은 정반대로 말한다. 헬라어 '람바노(λαμβάνω)'는 '받다, 취하다, 붙잡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미시는 선물을 두 손으로 받아 쥐는 행위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를 '데코마이(δέχομαι)', 즉 '손님을 맞아들이다'로 둔갑시켰다. 마치 예수님을 마음에 초대해야 성령이 들어오신다고 가르쳤다.
이 미묘한 단어 하나의 차이가 복음을 전복시켰다.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람바노)이 아니라, 내가 문을 열어드려야 하는 조건(데코마이)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항변한다. "그래도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기도하는 건 좋은 거 아닌가요?"
좋다. 기도는 아름답다. 하지만 기도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순간, 우리는 로마서 10장 10절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은 '믿음'이 먼저고, '시인'은 그 결과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영접기도는 순서를 뒤집는다. 마치 입으로 기도문을 외우면 마음의 믿음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것처럼.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진심으로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접기도'를 안 했다는 이유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다. 반대로 아무 믿음 없이 기도문만 따라 읽고는 "나는 구원받았어"라며 안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는 불안에 떨고, 후자는 착각 속에 산다. 둘 다 비극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믿음만 있으면 되는 복음을, 우리는 '영접기도'라는 게이트를 설치해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교회는 천국 문 앞에 검문소를 세운 셈이다. "기도 안 하셨어요? 그럼 다시 해야죠. 이렇게 따라 하세요.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사도행전 16장 31절은 얼마나 단순한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끝이다. 기도문도, 의식도, 절차도 없다. 오직 믿음. 그런데 우리는 이 찬란한 단순함을 견디지 못했다.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영접기도'라는 장치를 덧붙였고, 그것이 어느새 구원의 필수 조건처럼 굳어졌다.
한국인은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본질을 생략하고 형식을 앞세울 때가 있다. 영접기도가 바로 그 산물이다.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설명하고,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긴 여정이 번거롭게 느낀 것일까. 그래서 '원스톱 구원 서비스'를 만들었다. 전도지 한 장, 기도문 한 번, 아멘 한마디.
하지만 빠른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다. 믿음은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그 과정은 때론 더딜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소금을 뿌리기만 하면 된다. 짠맛에 갈증을 느껴 물을 찾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숭배하는 건 한국 사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믿음의 여정보다 '영접기도'라는 결과물에 집착하듯. 몇 명이 기도했는지, 몇 명이 손을 들었는지가 부흥회의 성과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숫자를 세시지 않는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명확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영접기도'는 은혜를 가리고 행위를 부각시킨다. 내가 기도했다는 행위가, 하나님의 선물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든다. 그 순간, 복음은 변질된다.
"영접기도 뭐 그리 대수라고."
아니다. 대수다. 엄청 대수다. 이것은 단순한 기도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구원론 전체가 흔들리는 문제다. 만약 계속 이 방법을 고수한다면, 다음 세대는 '믿음'이 아니라 '의식'으로 구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보다 기도문을, 은혜보다 절차를, 하나님보다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칼날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하는도다."
문을 닫을 것인가, 열 것인가. 복음을 지켜낼 것인가, 편의를 좇을 것인가. 율법사가 될 것인가, 증인이 될 것인가.
답은 이미 2천 년 전에 주어졌다. "믿으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덧붙이지 말자. 복음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다.
주문이 아니라 선포로. 의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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