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하면 부활 못 한다고요?"

[궁금했성경] 24화, 흙과 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

by 허두영

장례식장 복도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내 귀를 의심하게 했다. "화장하면 부활 못 한다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21세기 대한민국, 스마트폰으로 화성 탐사 영상을 보는 시대에 여전히 이런 말이 통용된다니.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형태'를 움켜쥔다. 누군가는 "매장만이 성경적"이라며 화장을 불신앙의 표식으로 낙인찍고, 또 누군가는 "시신은 주님께 드리는 마지막 제물"이라며 흙 속에 온전히 묻히길 고집한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펼쳐보면 묘한 침묵이 흐른다. 죽은 자의 몸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구체적 명령은 어디에도 없다. 대신 성경은 단 하나에만 집중한다. '누가' 다시 살리시는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 이 선언은 인간 죽음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차이는 속도일 뿐이다. 50년이냐 5시간이냐의 차이. 결국 인간은 흙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흙과 재를 어떻게 부활시키실까? 여기서 우리의 상상력은 한계에 부딪힌다.


부활, 그것은 복원이 아니라 새 창조의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 바울은 씨앗 이야기를 꺼낸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고전 15:44).


씨앗을 생각해 보라. 땅속에 들어간 씨앗은 껍질이 터지고, 속이 썩고, 형체가 무너진다. 그런데 바로 그 무너짐 속에서 새 생명이 솟아난다. 원래 씨앗의 형태는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죽음'이라 부르는가?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 부른다.


부활도 그렇다. 하나님에게 부활이란 '재조립'이 아니라 '재창조'다. 화장으로 몸이 재가 되고, 바다에 흩어졌다 한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요한계시록 20장 13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바다가 그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하나님은 흙 속의 한 입자, 바닷속의 한 분자까지 기억하신다. 부활은 물질의 보존이 아니라 존재의 기억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몸의 형태가 아니라, 그분의 기억 속에 우리 이름이 있느냐는 것이다.


신령한 몸, 그것은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차원 이동이다


"그래도 육체를 잘 보존해야 하지 않겠어?"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에게 바울은 단호하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변하게 하신다' 이 동사가 핵심이다. 부활의 몸은 지금 이 몸의 2.0 버전이 아니다. 그것은 차원 자체가 다른 존재다. 썩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성령의 능력으로 작동하는 몸. 바로 '신령한 몸'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라. 그분은 닫힌 문을 통과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요 20:19). 물리 법칙을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생선을 구워 드시고(눅 24:42-43), 도마에게 손을 만져보라 하셨다(요 20:27). 이것이 '신령한 몸'의 역설이다. 물질이면서 물질을 초월한다.


그러니 화장을 해서 흙으로, 재로 흩어진다 한들 부활에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분자 수집가가 아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를 기억하고 새롭게 부르시는 창조주시다.


매장은 신앙이 아니라 기후의 산물이었다


유대 전통에서 매장이 당연했던 이유는? 중동의 뜨거운 기후와 위생 문제 때문이었다. 냉장 시설도 없던 시대, 시신을 빨리 땅에 묻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초대교회도 유대 관습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을 뿐, "매장해야 부활한다"라는 교리 같은 건 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중세 이후 상황이 꼬였다. 일부 교단이 화장을 '이교도의 풍습'이라 낙인찍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교도들이 화장했다는 이유였다. 형식이 신앙의 척도로 둔갑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 논리라면 이교도들이 쓰던 그리스어로 신약성경을 기록한 것도 문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형식에 갇힌 신앙을 경멸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믿음의 본질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느냐에 있다. 십자가 옆 강도를 보라. 그는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말씀하셨다.


화장, 그것은 신뢰의 또 다른 고백이다


"화장하면 부활 못 한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의 전능을 제한하는 불신앙의 언어다. 십자군 전쟁에서 바다에 수장된 병사들은? 화형당한 순교자들은? 로마 콜로세움에서 맹수에게 찢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몸은 온전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하지 못한단 말인가?


부활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억과 주권에서 비롯된다. 화장은 부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육체마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라는 고백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땅속 무덤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우리의 구원은 관 속이 아닌 하나님의 기억 속에 달려 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을 보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들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히 11:16).


흙도, 재도, 다 기억하신다


죽음이 모든 것을 흩어놓을 때, 하나님은 그 흩어진 존재들을 다시 모으신다. 흙이든 재든, 바다에 흩어진 잿가루든, 그분의 기억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이 말씀은 육체의 보존이 아니라 존재의 소환을 약속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나흘이나 묻혀 있던 그가 걸어 나왔다(요 11:43-44). 형태가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더 빨리 오셨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은 일부러 늦게 오셨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화장은 부활의 방해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흙이든 재든,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흙으로 돌아간 몸'조차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형태가 아니라 약속이다. 물질이 아니라 기억이다. 관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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