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39화, 오해와 왜곡을 넘어 복음으로 읽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 이 짧은 문장은 너무 자주, 쉽게 인용된다. 그럴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 다 죄인이지.” 누군가는 죄의 무게를 덜기 위한 변명으로, 누군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의 근거로 이 구절을 꺼낸다.
하지만 정말 바울은 세상에 선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죄인 선고’가 아니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문장이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도덕이 아니라 관계다. ‘의’는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의인은 없다”라는 말은 “세상엔 선한 사람이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자는 없다”라는 의미다.
바울은 인류의 도덕 수준을 평가하려던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법정에 세운다. 율법이 있어도, 양심이 있어도, 결국 모두 죄 아래 있다. 이 구절은 인간의 무능을 폭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영적 청진기와 같다.
바울의 진단은 단호하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는 사다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결함을 본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 선언은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었다. “네가 아픈 걸 인정해야 치유가 시작된다.” 바울은 그 고백의 자리로 우리를 이끈 것이다. 그러자 드디어 복음의 반전이 이어진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롬 3:21~22)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의가 무너진 자리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서는 구원의 전환을 선포한다.
이 구절을 오해한 이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래서 어차피 다 죄인인데 뭐, 선하게 살 이유가 있나?” 또 어떤 이는 신앙 안에서 체념한다. “어차피 완벽할 순 없잖아. 의인은 없다잖아.”
이건 말씀의 취지를 완전히 뒤집은 해석이다. 바울은 도덕의 무가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의 무용함을 말한 것이다.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라는 인간의 자만을 깨뜨리기 위해 그는 의의 기준을 하나님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 기준 앞에서는 바울 자신도 무릎을 꿇는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롬 7:18)
바울의 의도는 인간을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세우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전가된 의’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것이 죄의 전가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 대속이 완전하다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즉,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되고, 부활에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은 존재로 바라보신다.
레위기 16장의 두 염소가 그 복음을 미리 보여준다. 하나는 피 흘려 죽음으로 죄의 값을 대신 지불했고, 다른 하나는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사라졌다. 전자의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 염소로 십자가를, 후자의 염소는 죄가 멀리 떠나감을 나타내는 아사셀 염소로 부활을 상징한다. 이 두 염소가 하나의 복음, 하나의 전가를 완성한다.
‘의인은 없다’라는 말을 듣고 체념할 게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아 ‘의롭다 여김받은 자’로서 살아야 한다. 이건 “완벽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의롭게 된 존재답게 살라”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넘어지고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덮으셨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죄책감의 반복이 아니라 은혜의 반복이어야 한다. 하루의 시작에서 “나는 죄인이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은 자야”로 다시 일어서는 것. 그게 복음의 현실적 적용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선언은 인간의 무가치를 폭로하려는 말이 아니라, 은혜의 필요를 자각시키는 복음의 문장이다. 그 절망의 골짜기에서야 비로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라는 하늘의 문이 열린다.
바울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 3:23~24)
‘의인은 없다’라는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말이 들려올 때,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건 정죄가 아니라 복음으로의 초대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의 의는 없지만, 내가 아들의 의를 네게 주노라.”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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