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52화, 효심의 사랑을 넘어, 구속의 사랑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마리아는, 그저 습관처럼 아들에게 다가간다. "포도주가 없구나." 그 짧은 한마디에 삼십 년 세월이 배어 있었다. 아들을 믿는 어머니의 그 단순하고 절대적인 신뢰. 그런데 아들은 뜻밖의 말로 대답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한순간 공기가 얼었을 것이다. '어머니' 대신 '여자여'. 마리아는 순간 놀라고 멈칫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다. 잠시 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놀랍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엄마’에서 ‘제자’로. 하늘의 시계가 돌기 시작했고, 감춰졌던 구속의 시간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여'는 무례한 말이 아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 호칭은 오히려 정중한 표현이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요 20:15), 간음한 여인(요 8:10)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하셨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순한 존칭을 넘어선다. 이 한 단어는 창세기 3장 15절로 우리를 단숨에 데려간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원복음이다. 인류 최초의 구원 예고편. 예수님이 마리아를 '여자여'라 부르신 순간, 그분은 수천 년 전 에덴에서 예언된 '그 여자'의 자리로 마리아를 불러올리신 것이다. "당신은 이제 내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구속의 역사 속 그 여인으로 서 있다"라는 선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던 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날은 사생애의 종료, 공생애의 개시였다. 하늘의 임명식. 메시아로서의 공적 사명이 선포된 것이다. 세례는 왕과 제사장 사역의 위임식이었고, 그 이후의 인생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길이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문턱이었다. 가정의 관계에서 사명의 관계로. 이제부터 그분은 어머니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했다. '어머니'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떠나, 세상의 죄와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세상의 손을 잡는 그 순간이 바로 '여자여'였다.
누가는 말한다.
"예수께서 그 부모께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30년 동안 감춰진 순종의 시간. 목수로서 일하고, 율법을 지키며,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셨다. 그러나 세례 후 시작된 공생애는 드러난 순종의 시간이었다. 광야의 시험에서 "기록되었으되"로 사탄을 물리치셨고, 겟세마네에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히브리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사."
순종. 예수님 생애의 핵심 키워드였다. 첫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류를 잃었고, 둘째 아담 예수는 순종으로 인류를 되찾았다(롬 5:19). 그 순종의 첫 걸음이 바로 '여자여'였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아무 때나 시작되지 않았다. 민수기 4장 3절, 제사장은 30세에 봉직을 시작한다.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랐다(삼하 5:4). 30세는 제사장적, 왕적 사명이 교차하는 구속의 시점이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헬라어 '카이로스(kairos)'는 단순한 시간(chronos)이 아니다. 하나님의 결정적 순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그 카이로스의 시간표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늘의 시간과 땅의 시간이 교차하려는 바로 그 문턱.
창세기에서 첫 하와는 불순종으로 인류를 타락시켰다. 그녀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열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을 택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마리아는 그 반대편에 선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하와가 '첫 아담의 불순종 동반자'였다면, 마리아는 '둘째 아담의 순종 동반자'였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그녀를 구속사의 그 자리로 불러올리신 것이다. 첫 하와의 불순종을, 둘째 하와의 순종이 덮은 것이다. 그리고 둘째 아담 예수가 그 구속을 완성하신다.
"여자여"는 거리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사랑의 확장이었다. 예수님은 혈육의 울타리를 떠나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했다. 가정의 아들에서 인류의 구속자로. 어머니를 멀리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더 깊은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리신 것이다. 그 거리가 바로 구속의 거리이며, 하나님 사랑의 깊이였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여자여, 보라 네 아들이니라."(요 19:26)
요한복음은 2장(가나)과 19장(십자가)을 '여자여'라는 단어로 연결한다. 시작과 끝이 같은 단어로 감싸진 이 구조를 ‘인클루지오(inclusio)’라 한다. 가나의 '여자여'는 구속의 개시, 십자가의 '여자여'는 구속의 완성이다. 그분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창 3:15). 창세기의 예언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이다.
마리아는 놀라운 여인이다. 처음엔 놀랐으나, 그 놀람을 믿음으로 바꾸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니라." (눅 2:19)
그녀는 어머니로 시작했지만, 제자로 완성되었다. 예수의 곁에서 끝까지 십자가를 지켜본 단 한 사람. 하나님은 그녀를 아들의 어머니에서, 아들의 제자로 부르셨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여자여'라고 부르신다. "너의 인간적 기대를 내려놓고, 내 구속의 질서로 들어오라." '여자여'는 단절의 언어가 아니라, 순종과 사명의 초대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익숙한 관계와 욕망의 틀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 질서로 부르신다. 그분은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 오히려 관계를 구속하신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멀리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을 더 깊은 사랑의 질서로 들어올리셨다. '여자여'는 단절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질서를 여는 복음의 언어였다. 그 한 단어 안에 창조와 타락,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사명, 어머니와 제자, 그리고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맞물려 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세상의 품으로 가셨고, 효심의 사랑을 넘어 구속의 사랑으로 나아가셨다. '여자여' 그 한마디는, 사랑의 질서가 다시 세워진 순간이었다. 그 사랑 안에 바로 우리가 있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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