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지옥에 갔다오셨다고?

[궁금했성경] 54화, 사도신경 'hell'이라는 단어에 감추어진 비밀

by 허두영

1. 서론: hell? 지옥?


예배 때 익숙하게 암송하는 사도신경. 그중 한 구절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장사한지”라는 부분의 영어 “He descended into hell.” 많은 이들이 여기서 상상하는 것은 붉은 불바다와 괴성이 넘치는 지옥(Gehenna)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의 오해는 그리스도의 죽음·부활·구속 전체를 흐리게 만든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가 이단의 파고 속에 세운 신앙의 방패다. 이 방패 한가운데, ‘음부하강’이라는 표식이 빛난다. 그것은 공포의 하강이 아니라 구속의 침투다. 우리는 그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2. 역사적 배경: 사도신경은 왜 탄생했는가


2세기 이후 교회는 신앙의 뼈대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사상적 전쟁을 치렀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의 본성과 사역을 왜곡하는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흐름이 그노시즘(Gnosticism), 도케티즘(Docetism), 아리우스주의(Arianism),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그리고 몬타누스주의(Montanism)였다.


그노시즘(Gnosticism)은 구원을 ‘지식(gnosis)’으로 환원하며, 육체를 악한 것으로, 영만을 선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예수의 성육신은 단지 영적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도케티즘(Docetism)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했다. “그분의 몸은 환영(幻影)”이며, 십자가의 고통도 실제가 아니라는 이단적 주장이었다.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은 바로 이 허상을 반박하는 선언이다.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 주장했다. “그는 창조되었고,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라는 이 사상은 삼위일체 교리를 근본에서 흔들었다. 이에 교회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라는 고백을 신조 속에 새겼다.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는 아리우스와 반대로, 삼위일체의 구분을 부정했다. “성부·성자·성령은 동일한 한 인격의 세 형태일 뿐”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삼위적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에 사도신경은 성부·성자·성령을 분명히 나열하여 위격 간의 구별과 연합을 동시에 선포한다.

몬타누스주의(Montanism)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며, 사도적 권위 위에 자신의 ‘영감’을 세웠다. 교회는 이에 맞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문구를 통해 성령의 사역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성육신의 완성 안에 있다는 진리를 강조했다.

이렇듯 사도신경은 단순한 신앙 요약이 아니라, 당대의 혼란 속에서 정통을 지키기 위한 교리적 방패와 신앙의 헌장이었다. 그 한 줄 한 줄은 신학 논쟁의 흔적이자, 신앙의 피로 쓴 선언이었다.

“그는 실제로 태어나셨고, 실제로 고난 받으시고, 실제로 죽으시고, 실제로 부활하셨다.” 그 구절들은 모두 허상을 깨뜨리고, 진리를 붙드는 증언의 언어였다.


3. “He descended into hell”의 참뜻: 지옥(Gehenna)이 아니라 음부(Hades)


여기서 번역의 비극이 시작된다. 라틴어 원문은 'descendit ad inferos', "아래의 세계(죽은 자들의 영역)로 내려가셨다." 영어 번역의 'hell' 때문에 오해가 자랐다. 성경적 어휘로 풀면, 예수께서 내려가신 곳은 게헨나(Gehenna, 최후의 불못, 영원한 형벌의 지옥)가 아니라 하데스(Hades, ᾅδης), 히브리어 스올(Sheol, שְׁאוֹל), 죽은 자들의 세계, 음부다(행 2:27, 롬 10:7). 이것은 형벌의 영원한 공간이 아니라 심판 이전의 대기실이다. 사도신경의 이 문장은 "그분이 진짜로 죽으셨다"라는 인성의 사실성과 "죽음의 영역까지 구속이 미쳤다"라는 사역의 범위를 동시에 명시한다. 스올은 구약의 죽음의 세계요, 하데스는 신약의 중간 상태이며, 게헨나는 최종 심판의 불못, 곧 지옥이다. 이 셋을 구분하지 못하면 모든 게 뒤섞인다.


4. 음부의 구조: 두 구획과 건널 수 없는 구렁


예수께서 그려 보이신 사후 구조는 단순하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에서 두 사람은 모두 죽음 이후 음부(Hade)에 있다. 그러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의인의 구획, 위로와 평안),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악인의 구획, 심판 대기)을 겪는다. 그 사이에는 ‘큰 구렁(χάσμα μέγα)’이 놓여 건너갈 수 없다(눅 16:26). 이 선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임재의 선이다. 하나님의 은혜 임재와 그 부재(단절) 사이의 영원한 경계. 죽음 이후의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냉엄한 진실이 여기 새겨진다(히 9:27).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이 죽은 자의 세계를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비유의 언어로 음부(Hades) 안의 두 구획을 묘사하셨다. 한쪽에는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린 의인의 구획, 다른 한쪽에는 ‘음부에서 고통 중인 부자’의 악인 구획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χάσμα μέγα)”이 놓여, 서로 오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눅 16:26). 이 구렁은 단순한 공간의 경계가 아니라 임재의 경계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곳과 완전히 차단된 곳, 곧 은혜와 심판의 영원한 구분선이었다.


5. 그가 내려가신 목적: 심판이 아니라 구속의 확장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을 때, 그 완성은 역사적 시간과 더불어 존재의 층위로 확장되었다. 그분은 지옥이 아니라 음부(Hades)로 내려가셨다. 어디로? 의인들의 구획(낙원, 아브라함의 품)이다(눅 23:43). 그곳에서 주께서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구속의 완성을 선포하셨다. 베드로는 이를 “옥(φυλακή)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라고 증언한다(벧전 3:19~20). 여기서 ‘옥’은 지옥이(Gehenna)가 아니라 감금된 중간 상태로서의 음부(Hades)다. 주께서는 의인에게는 해방의 복음,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선언을 선포하셨다. 이것이 교부들이 말한 ‘음부의 약탈(Harrowing of Hades)’ 이며, 바울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이끌고”(엡 4:8~10)라고 노래한 것이다.


예수님의 음부하강을 다룬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은 오래도록 오해의 표적이 되어 왔다.

몰몬교는 이 구절을 “죽은 자에게도 복음의 기회가 열린다”는 근거로 삼아 사후 구원과 조상 대리 세례 교리를 세웠고, 일부 신흥종교는 이를 ‘영혼의 중간 상태에서 복음을 듣는’ 순회론으로 비틀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후 회개”의 가능성은 없다(히 9:27). 본문의 헬라어 옥은 ‘감금된 상태’를, ‘전파하다’는 ‘복음을 제안하다’가 아니라 권위 있는 선언, 곧 구속의 완성 선포를 뜻한다. 예수님은 음부에서 새로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구원의 승리를 죽음의 영역에 선포하신 것이다. 그분의 하강은 사후 전도가 아니라 죽음조차 침묵시킬 수 없는 복음의 확장이었다.


6. 부활 이후의 변화: 낙원의 '좌표'가 달라지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죽음의 질서 자체를 뒤집은 사건이었다. 그 이전에는 의인도 하데스(Hades)의 낙원 구획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 낙원은 하늘로 옮겨졌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음부의 문을 닫고, 하늘 낙원의 문을 여신 사건이었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음부를 거치지 않는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 영혼은 곧바로 하늘 낙원, 곧 주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후 5:8)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1:23에서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사모했다. 그의 고백처럼, 부활 이후 성도의 죽음은 즉시 주님 임재로의 이동이다. 반면 불신자들은 여전히 하데스(Hades)의 고통 구획에 남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그들은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던져지는”(계 20:14) 순간을 맞는다. 요컨대 예수님의 하강은 지옥행이 아니라 구속의 하강, 그리고 죽음의 지도를 다시 그린 사건이었다.


7. 루터와 칼빈: 패배의 하강이 아닌 승리의 행진


루터는 그리스도의 하강을 승전 퍼레이드로 읽었다. 사탄의 성채 한복판에 깃발을 꽂는 사건 말이다. 칼빈은 ‘도덕 비유’가 아닌 ‘실재의 계시’로 누가복음 16장을 해석하며, 영혼의 의식·분리·확정을 사실로 가르친 텍스트라 보았다. 두 전통의 공통분모는 분명하다. “He descended into hell”은 게헨나(Gehenna)가 아니라 하데스(Hades)다. 그 하강은 고통을 더 받기 위한 보충 형벌이 아니라, 구속의 완성을 사후의 차원에 공포하는 선포다. 그 결과, 구약의 의인들은 해방되어 하늘 낙원으로 옮겨졌다.


8. 적용: 오늘, 우리는 그 큰 구렁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


사후의 구조를 아는 것은 공포에 잠기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선택이 얼마나 장엄한지 깨닫기 위함이다.

첫째, 신앙의 현실성을 회복하자. 주님의 죽음은 상징이 아니다. 우리를 대신한 실제의 죽음이었고, 그분은 실제의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와 성찬, 장례의 눈물도 현실이어야 한다.

둘째, 말씀의 권위를 붙들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기적보다 말씀이다.

셋째, 임재의 선을 기억하자. 큰 구렁은 오늘 이미 그어져 있다. 은혜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스스로를 부재의 어둠 속에 둘 것인가.

넷째, 위로를 받자. 주께서 낮아지신 최저점이 우리의 최후의 자리보다 낮다. 그러니 어떤 절망도 우리를 그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을 수 없다(계 1:18).


9. 결론: 지옥이 아닌, 구속의 음부하강


“He descended into hell”은 오늘의 언어 감각에선 의미가 달라져 오해를 낳는 표현이므로, 신학적으로는 “He descended to the dead(그는 죽은 자들의 세계(음부)로 내려가셨다)”로 풀어 주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안전하다. 사도신경의 이 문장은 더 이상 오해의 안개 속에 머물 수 없다. 주께서 내려가신 곳은 게헨나가 아니라 하데스였고, 목적은 형벌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구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건널 수 없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죽음의 심연을 지나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고백한다.


"그분은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음부로 내려가 우리를 건지셨다."


이 한 줄이 우리의 사도신경을, 장례의 눈물을, 일상의 결단을 다시 일깨운다. 신앙은 추상적 위로가 아니다. 죽음을 뚫고 온 구속의 현실이다. 오늘도 그 현실이 당신과 내 심장 박동을 지배하게 하라.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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