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94화, 다윗의 시편은 예수의 복음서였다
마음이 힘들 때면 시편을 펼친다. 하지만 정작 시편을 읽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이건 그냥 위로의 말이 아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도 자기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큰 누군가를, 아직 오지 않은 구원의 주를 바라보며 노래했다. 시편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온 이유도 거기 있다. 복음의 진리가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다윗은 선지자라…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행 2:30~31)
이 한 문장은 시편 전체를 관통한다. 다윗은 평생 메시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라고 했던 건 그래서였다. 시편은 단순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복음의 발자국이었다. 시편이 진짜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도, 결국 복음 때문이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꺼내 들며 이렇게 물으셨다. "다윗은 성령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나의 주'라고 불렀다(마 22:43~45, 막 12:36~37, 눅 20:42~44).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핵심은 이것이다. 다윗은 자기 생각으로 노래한 게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노래했다. 그가 '나의 주'라고 부른 존재는 사실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아'였다. 다윗은 자기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 앞으로 오실 예수를 바라보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선을 긋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본 것이다."(행 2:25~31)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행 2:34~35) 사도행전 4장 25~26절도 한 발 더 나아간다. "성령으로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시편 2편 인용)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시편 32편을 인용하며 단언한다. "다윗은 이미 보았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핵심을."
히브리서 4장 7절은 시편 95편을 끌어와 말한다. "다윗을 통하여 미리 일러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신약 전체는 한목소리로 증언한다. 다윗은 시인이 아니라 복음의 선지자였다. 그의 시편은 감정의 기록이 아니라, 메시아를 응시한 신앙의 기록이었다.
시편은 십자가, 부활, 승천, 왕권, 칭의의 구속사를 품고 있다. 다윗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복음의 시간 순서로 읽어야 한다.
1) 십자가 - 고난받는 의인의 노래
시편 22편은 복음서의 예고편이다. 1절에서 터져 나오는 "왜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외치셨다. 7~8절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는 장면은 마태복음 27장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16절에서는 손과 발이 찔리는 장면이 나오고, 18절에서는 옷을 제비뽑는 장면이 묘사된다. 요한복음 19장의 십자가 현장에서 이 모든 게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시편 41편의 친구의 배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나타난다. 시편 31편의 마지막 고백 "내 영을 주께 부탁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눅 23:46)로 다시 나타난다. 시편 34편은 의인의 뼈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 했고, 실제로 예수님의 뼈는 부러뜨려지지 않았다(요 19:36). 시편 69편은 목마를 때 식초를 마시게 한다고 기록했고, 십자가 위에서 정확히 이루어졌다(요 19:29). 요한은 이렇게 정리한다. "이 일은 성경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9:36) 이렇듯 시편은 고난의 묘사가 아니라 구속사적 설계도와 같은 복음이었다.
2) 부활 -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예언
시편 16편은 노래한다. "주의 거룩한 자가 썩지 않게 하리라."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선언한다. "다윗은 선지자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본 것이라."(행 2:30~31) 바울 역시 행 13장에서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시편 118편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21장에서 인용되며, 부활의 날을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이라고 해석한다. 시편은 절망의 노래가 아니었다. 죽음을 뚫고 오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의 노래였다.
3) 승천과 왕권 - 보좌에 앉으신 주
시편 110편은 복음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직접 인용하며 다윗이 '내 주'를 메시아로 불렀다고 해석하셨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증언한다. "예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행 2:34~35) 시편 2편은 메시아 왕권 앞에서 세상이 반역할 것을 예언하는데, 사도행전 4장 25~26절은 말한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시편 72편은 열방 위에 임할 영원한 왕권을 노래하며, 계시록 11장 15절은 선언한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복음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편은 왕권으로 끝난다. 이 흐름이 바로 복음이다.
4) 칭의(구원) -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바울은 시편 32편을 인용하며 말한다. "다윗이 말한 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하여."(롬 4:6~8)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나로는 의롭다 할 수 없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10장은 시편 40편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메시아가 제사가 아닌 몸을 드림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고. 히브리서 4장 7절은 시편 95편을 인용하며 말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즉, 다윗의 시편 속에서 복음의 초청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시편은 결국 한 인간의 감정 일기가 아니었다. 구원을 바라본 눈물의 복음서였다. 다윗은 자신의 현실보다 더 큰 구원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던진 노래는 신약에서 역사 속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시편은 나의 심리학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학이다. 다윗은 시편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삶이 그 복음을 드러낼 차례다.
다윗의 시편이 예수님의 복음서였다면, 오늘 나의 인생은 어떤 시편으로 쓸 수 있을까? 시편은 끝나지 않았다. 구원의 이야기는 오늘 내 삶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 내 인생의 시편이 예수님의 복음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다윗이 평생 붙들었던 노래이며, 우리가 이어 불러야 할 복음의 노래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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