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96화,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믿음
교회에서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다음 주부터는 삶이 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조금은 달라진다. 봉사도 시작하고, 성경 공부도 꾸준히 하고, 어느새 교회 안에서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몇 달 후, 그는 말없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뜨거웠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앙은 또다시 잠시 흔들렸다가 지나가는 계절처럼 흘러간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의 신앙 전체를 뒤흔드는 질문이다.
"분명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 같았는데… 왜 삶은 바뀌지 않았을까?"
기독교 신학은 이 질문에 오래전부터 답을 마련해 두었다. 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 그리고 이 둘은 닮은 듯 보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마태복음 22장 14절은 이 구분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기서 '청함'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외적 부르심을 뜻한다. 하지만 '택함'은 성령이 마음을 움직이는 내적 부르심을 의미한다. 이 구분이 분명해질수록, 신앙은 겸손해진다. 그리고 정확해진다.
외적 부르심은 설교, 전도, 성경 공부 등을 통해 귀에 들리는 복음의 초청이다. 이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향하고 있으며, 누구든 복음을 들을 기회를 얻는다. 이 부르심은 마음을 움직인다. 감동도 생기고, 결심도 일어나며, 실제로 삶의 방식이 잠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은 어디까지나 상태를 잠시 변화시키는 힘이다. 감정은 뜨거워질 수 있지만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의지는 굳어질 수 있지만 곧 풀릴 수도 있다. 날씨처럼 말이다.
그래서 외적 부르심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초청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초청을 거절한 선택 또한 인간의 몫이다. 외적 부르심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남기는 거울이다. 귀는 열렸는데,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는 상태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 있다. 특별한 분위기도 아니고, 감정적인 집회도 아니며, 누군가 감동적인 말을 해준 것도 아니다. 평범한 주일 예배, 그 어느 순간에 복음이 '나를 향한 말'로 들리는 때가 온다. 마치 내 인생의 문이 열리고, 그 문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순간이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루디아가 경험했던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여사…"라는 말은,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방문이었다는 뜻이다.
그 순간부터 복음은 철학이 아니라 나를 해방하는 사건이 된다. 그때의 회개는 감정적인 눈물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결단이 된다. 무엇보다 그 순간, 사람의 신분이 바뀐다. 죄 아래 있던 존재가 은혜 아래로 옮겨지고,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사람이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방향으로 드러난다. 성경은 이 변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두움에서 빛으로(행 26:18), 종에서 자녀로(요 1:12, 갈 4:7),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일(골 1:13)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이 내적 부르심의 실체이다. 구원은 열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적 선언(롬 8:33~34)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많은 이가 외적 부르심을 내적 부르심으로 착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감동은 강력하지만, 본질은 조용하기 때문이다.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존재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감정은 내일이면 사라지고, 의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진짜 내적 부르심은 복음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복음으로 부르신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4)
내적 부르심은 방향이 바뀌고, 버티는 힘이 생기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 성향이 생기는 것이다. 외적 부르심은 단기적 열심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적 부르심은 끝까지 가는 인내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증거를 감동에서 찾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지속성'에서 찾는다. 그 지속성이야말로 성령의 흔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끝낼 수밖에 없는 힘이다. 성령의 역사다.
결국 부르심의 본질은 감동이 아니다.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에 있지도 않다. 구원은 “잘해보겠다”라는 나의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고, "너는 내 자녀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부르심은 귀에 남는 소리가 아니라, 소속이 바뀌고 신분이 이동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문장은 단 하나다. 상태는 흔들릴 수 있지만, 신분은 흔들릴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은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주권의 교체이며, 존재의 이동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가?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