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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멀지향자 Luk Jan 03. 2022

[안 산 후기] 1. 스탠리 캠프머그

정말로 안 산 후기입니다.

 경기도 안산에 간 후기도, 양궁선수 안산 씨를 만나고 남기는 후기도 아니다. 말 그대로 ‘안 산 후기’다. 구매 후기는 많이 봤어도 안 산 후기라니? 하지만 종종 구매하지 않는 일도 구매하는 행위만큼 많은 고민을 수반한다. 이것은 소비의 유혹을 딛고 물건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한발 나아가는 기록이다.


 스테인리스 텀블러 중 감성 일타를 꼽으라면 역시 스탠리다. 브랜드의 역사, 묵직한 컬러, 견고한 만듦새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사무실을 둘러봐도, 텀블러 좀 사봤다는 친구의 집에 가도 하나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브랜드이다. 많은 제품 라인업 중 내가 구매를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은 스탠리 클래식 캠프 진공머그이다.


이미지 출처 스탠리 한국 공식 홈페이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354ml. 어디에 있든 커피 한잔을 내려 캠핑 감성으로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외관이다. 뚜껑에 구멍이 있지만 스탠리 답게 일정 수준의 보온/보냉 성능을 갖추고 있다. 트라이탄 소재의 뚜껑은 단단하면서도 고온의 물에도 BPA를 내뿜지 않고, 견고한 손잡이는 어떤 뜨거운/차가운 음료를 담아도 절대 놓치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내 손에 들려있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도, 사무실 책상에서 마시는 음료지만 아웃도어 감성이 솔솔 풍길 것만 같다. 본래 도시는 자연만큼이나 거친 곳이다. 빌딩 사이로 부는 비바람은 고어텍스 재킷을 걸치게 하고, 불쑥 튀어나온 보도블럭은 비브람 신발을 신게 한다. 산악인과 군인의 필수템이었던 플리스 재킷은 사무실과 대중교통의 유니폼이 되었다. 의복의 역사는 스포츠의 역사다. 한 때 턱시도가 운동복이었고, 수트가 그다음 시대의 운동복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퍼시스 책상과 시디즈 의자에 앉아 들고 마시는 스탠리는 현시대의 아웃도어이자, 미래의 클래식이다. 나는 그 감성을 이만원대의 가격에 맛보고 싶었다.


이마트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던 요 녀석


 사실 이만원 중반의 가격, 책상에서 커피랑 물 홀짝이는데 쓰기엔 뭔가 다소 아까운 면이 있다. 오랜만에 찾은 이마트 선반에는 네이비색 캠프 머그가 한 개에 25,900원이다. 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위쪽을 보니 비슷한 용량, 비슷한 사양의 락앤락 스테인리스 머그가 만원 중후반대의 가격이다. 이걸 살까? 아니, 이건 그 ‘감성’이 없다.


 한참을 고민하다 일단 물러선다. 미니멀지향자로서 조금의 양심은 있나 보다. 이 캠프 머그를 사면 현재 갖고 있는 텀블러는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다. 오래 쓴 티가 나서 누구 주기도 애매하고, 버리자니 너무 충실하게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돈을 들여가면서 물건을 하나 더 늘이기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집에 돌아와 쿠팡 앱을 켜본다. 스탠리 캠프머그를 검색해본다. 어라? 여기서는 만구천원대. 나는 네이비가 좀 더 맘에 들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밀리터리 느낌의 그린 색상. 거기에 로켓배송. 내일 새벽 도착 보장. 이것은 결국 사버리라는 계시인가? 나는 과연 새 머그잔을 또 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그래도 결국, 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사무실에 텀블러가 있고, 아직은 정말 멀쩡하기 때문이다. 입사할 때 받은 스타벅스 텀블러인데, 1년 반 이상을 매일 잘 쓰고 있다. 표면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부분들이 있지만, 견고하며 텀블러가 갖추어야 할 기본 이상의 보온/보냉 성능을 유지하고 있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검은색이며, 용량도 스탠리 캠프머그보다 큰 473ml이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갑갑할 때마다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만들어 먹는데, 한잔 제대로 만들었을 때 딱 이 텀블러에 맞는 양이 나온다. 아마 354ml의 캠프머그였다면 얼음을 절반은 줄였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더 큰 스탠리 머그는 상대적으로 투박해서 고려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업무 중 분노와 한숨에 비례하는 얼음의 양을 줄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갖고 있던 텀블러를 버리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런 상태에서 물건을 하나 더 늘이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잘 굴러주고 있는 나의 텀블러


 모든 물욕이 그렇듯, 생각에서 놓아주니 놀랍게도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지금의 텀블러가 더욱 소중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컵 하나 가지고 무슨 주접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인간은 하찮은 것에 더욱 몰두하는 법이다. 물욕이 샘솟는 한, 나의 [안 산 후기]는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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