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V 156
잠자리 침대에서 아내에게 무심한 듯 말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에게 선사한 뜻밖의 선물, 바흐의 아리오소 BWV 156 서곡을 듣고 난 후였다.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며 들은 이 곡 앞에서 나는 말 그대로 넋을 잃었다.
“너무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 온갖 문제로 뒤덮인 하루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평안해졌고, 문득 내 마지막도 이런 음악과 함께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 아름다운 선율의 정체를 파헤치다가 기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곡이 본래 칸타타의 서곡인데, 그 칸타타의 제목이 ‘나는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았네’라는 것이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가? 내가 죽음을 앞두고 듣고 싶다고 생각한 곡이, 알고 보니 정말로 죽음을 앞둔 자의 기도를 담은 음악이었던 것이다. 근데 죽음 앞의 노래가 장송곡같이 우울하지 않고 이렇게나 아름답게 들렸던 걸까?
칸타타의 시작가사는 처절하고도 숙연했다
테너 솔로:
나는 이미 한 발을 무덤에 디뎠네.
병든 몸이 곧 그 속으로 떨어질지 몰라.
사랑의 하나님, 주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나이다.
그러니 내 마지막이 평안하게 하소서.
소프라노 합창 :
주여, 제게 은혜로 대하소서.
이 고난 가운데 도와주소서.
제가 주께 간구하오니 외면하지 마소서.
제 영혼이 떠날 그날,
주여, 그 손으로 받아주소서.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나이다.
주여, 주의 뜻대로 저를 이끄소서—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오직 당신만이 저의 갈망이옵니다.
저를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은혜 안에 저를 지키시고,
나머지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인내심을 주옵소서.
당신의 뜻,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죽음 앞의 절망적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바흐는 주현절 셋째 주를 위한 곡을 작곡했다. 주현절(主顯節)은 영어로 Epiphany라 불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세상에 드러난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다. 이 절기의 성서 본문 중 하나는 마태복음 8:1–13으로, 예수님의 치유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는 두 가지 장면이 담겨 있다. 먼저,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고침을 받는다. 이어 가버나움에서는 한 이방인 백부장이 하인의 치유를 간청하며, 단지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그의 큰 믿음을 칭찬하시고 즉시 하인을 고쳐주신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뿐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방인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바흐는 어떻게 이런 절기의 메시지를 음악으로 표현했을까? 어떻게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고통,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길어올릴 수 있었을까? 바흐의 음악은 그 해답을 들려준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죽음을 이겨낸 믿음에서 비롯된 평안, 고통의 심연에서 피어난 소망이 담긴 음악이다.
바흐는 열 명이 넘는 자녀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는 깊은 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절망보다는 평안을 노래한다. 그 평안은 현실을 회피하거나 값싼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의 바닥을 통과하며 건져올린 진짜 아름다움이다. 그의 음악은 마치 고통의 깊은 광산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보석과 같다.
바흐가 표현한 그 궁극의 아름다움은 아마도 예수의 순종 속 죽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엔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 위의 죽음은, 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고, 인류를 향한 깊은 사랑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눈물,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숨결,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통과한 구원. 이 모든 것은 순종에서 시작되었다.
그 순종은 어둠 속에서도 소망을 심었다.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며, 절망의 자리는 부활의 가능성이 움트는 밭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비극을 품되, 그 안에서 가장 깊고 온전한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바흐의 음악이 인간의 죽음을 평안으로 승화시켰다면,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운명을 생명으로 바꿔 놓은 영원한 선율이 되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껴안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 끝자락에서 소망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노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들린다. 바흐의 음악은 그렇게 시대를 넘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속삭인다.
이제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단지 정서를 순화하거나 교양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위대한 음악가들이 선율 속에 담아낸 하나님의 진리를 함께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논리로, 어떤 이는 삶의 고난으로, 어떤 이는 음악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그중에서도 바흐의 음악은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이, 그의 선율 속에 조용히 담겨 있다. 그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영혼을 두드리고 있다.
내가 들은 버전은 임윤찬이 연주한 BWV 1056의 2악장 라르고다. 이곡은 연주곡으로, BWV156의 서곡을 재활용하였다. 한편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가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아름다움을 그리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바흐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깊은 깨달음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음악을 들으며 생각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를.
여보, 나 죽을 때 이 노래 틀어줘.
나의 비장한 선언에 아내는 조금의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어 뭐라고? 안 들렸어"
아래는 내가 들은 버전.
https://www.youtube.com/watch?v=ZpmXt_igIN4
이 버전은 소리가 더 약한 것도 있지만 위의 버전보다 뭔가 아쉽다. 왜그럴까?
https://www.youtube.com/watch?v=ztenRBYT8GI&list=RDztenRBYT8GI&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