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카곶에서 만난 그녀
서른 살의 일 월. 앞자리를 갈아 끼우고 맞이한 새로운 10년의 시작. 나는 세상의 끝에 있었다.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 카몽이스 <우스 루지아다스>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대지가 바다로 향해 뻗은 모양에 호카곶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리스본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겐 이미 유명한 관광명소였다. 그래 봤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일뿐인데 ‘세상의 끝’이라는 판타지틱한 수식어로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곳이었다. 동쪽보다는 서쪽을, 시작보다는 끝을, 일출보다는 일몰을 좋아하는 나에겐 거추장스러운 포장지이기도 했다.
명소라는 게 대체로 기대에 비해 실망이 큰 편인 만큼 호카곶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절벽까지 드넓게 펼쳐진 언덕길에는 울퉁불퉁한 흙과 바위가 가득했다. 겨울이라 초록도 하나 없는데 구름까지 한가득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의 끝은 그야말로 회색지대였다.
세계 곳곳에서 ‘세상의 끝’으로 날아온 여행객들은 다소 당혹스러운 얼굴로 언덕 위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카몽이스의 명문장이 새겨진 기념비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사진을 찍고, 어... 또 서성이다가 어... 사진을 찍고 하는 식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여정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도록 붉고 화려하게 하루를 마무리해 줄 낙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한다니 꽤 낭만적인 일인 것이다. 하늘을 한껏 가로막은 구름의 비웃음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사실 그마저도 내겐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 해의 끝에서 태어난 나는 겨울이 익숙했고, 스스로 지은 두 번째 이름에 은밀히 숨겨둘 정도로 회색이 좋았다.
리스본에서 만난 T와 함께였다. 그와 나는 이른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근교 관광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호카곶에 온 참이었다. 언덕을 따라 걸어 올라 절벽 끝에 서니 시야에 온통 하늘과 바다, 바람으로 가득했다. 광활한 회색빛 풍경에 넋을 잃었다. 혼자 올 걸 그랬나. 짧은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바위 위를 엉성하게 걸어 다니다가 몇 번을 넘어질 뻔한 나를 묵묵히 잡아주던 천사 같은 팔 덕분에 후회는 곧 반성이 되었다. 인생을 끝내버리려고 세상의 끝에 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도 몇 번을 호카곶의 바위를 딛고 호랑나비 춤을 추고 있으려니 회색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T와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조금 멀찍이 걸어 나왔다. 평평한 바위틈을 찾아 엉덩이를 끼워 앉았다.
해는 구름 뒤에서 몸을 들추었다가 다시 감추며 조금씩 바다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파도가 쉴 새 없이 절벽을 들이받고 있었다. 아찔하면서 두려운 풍경이었다.
멍하니 그 압도적인 풍경을 바라보던 중에 T가 내 팔을 툭툭 쳤다.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끝나는 지점에 한 여자가 있었다. 보라색 스타킹에 버건디색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는 유독 은빛으로 빛나는 바위에 왕좌처럼 기대앉아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곧 오른 켠에 숨겨져 있던 와인병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나는 호카곶의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 왜 나는 와인 가져올 생각을 안 했지...?”
눈물 어린 자책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손이 쑤욱 나타났다.
“이거라도 피울래요?”
담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소중한 한 줌의 재를 입에 물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불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해는 어느새 코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바다에 닿기만 하면 순식간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였다. 세상의 끝이니 뭐니 해봤자 자연은 특별 대우를 몰랐다.
우리는 바다와 구름과, 그 뒤로 숨은 해와 바람을 마주한 채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한숨을 내쉬고 한숨을 들이켰다.
그때 멀리서 환영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나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우리를 향해 팔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왕이 인사를 하잖아? 나도 기꺼이 팔을 들어 그녀에게 흔들었다. 하이인지 헤이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윽고 해가 사라졌다. 옅게 남은 온기가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그마저도 곧 꺼질 터였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인생은 아직 끝날 기미가 없었다. 돌아가야 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아장아장 바위를 걸었다. 그녀의 은빛 바위가 가까워졌다. 뒷모습이라도 훔쳐볼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미소 짓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다시 그 마수 같은 손을 들어 우리에게 손짓했다. 왕이 부르잖아?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안녕.”
여전히 헤이인지 하이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다음 문장을 띄우지 않고 말없이 우리에게 와인병을 건넸다. T는 병을 받아 들고 잠시 멈칫하다가 되물었다.
“우리 방금 담배 피웠는데?”
입을 대고 마시면 냄새가 묻어 나올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괜찮다고 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옆에서 겨우 한 모금 조심스레 먹는 T를 두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응, 오늘 내 생일이거든.”
T와 나는 동시에 호들갑을 떨며 축하한다고 했다. 나도 와인을 받아 들었다. 두 모금을 꿀꺽꿀꺽 마셨다. 순간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려놨다. 나와 그녀는 머리카락으로 눈이 가려진 채 주섬주섬 병을 주고받았다.
저 멀리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힘겹게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가야 해.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말없이 우리를 바라봤다.
“안녕.”
“안녕.”
짧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마주하고 앉아 또 한 번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이곳에서 생을 끝내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생을 절벽에 던져버리고 파도가 건네는 다음 생을 들이켜는 것처럼 보였다.그래서 오늘은 다시, 그녀의 생일이 될 거였다.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입술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빨간 흔적을 혀로 더듬어 보았다.
나는 바위에 앉은 채 그녀와 서로 세차게 손을 흔들며 나누었던 인사를 떠올렸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그녀가 과연 무엇을 끝내고 무엇을 시작하려 했는지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