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통영에서 만난 바다

by 새벽나무

더 이상 찬란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바다였다. 통영에서는 어딜 가도 바다, 바다, 바다였다. 이순신 공원은 잠깐의 오르막만 오르면 사방이 바다로 가득 찼고, 미륵산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한려수도를 내려다보려고 오르는 곳이었다. 달아 공원에서도, 하다못해 동피랑과 서피랑에서도 내려다 보이는 건 줄곧 바다였다.


사흘 내내 청아했던 하늘에서는 한낮의 해가 구름도 없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양이 쉴 새 없이 뿜어내는 빛은 파도를 만나 자잘하게 부스러졌다. 우리는 그 빛을 코 앞에서도, 먼 산 위에서도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길을 거닐면서, 언덕길을 오르면서, 모래를 헤치면서 조잘조잘 내뱉던 말소리도 종적을 감추었다.


침묵의 시간은 그 여행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수많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일상에서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함께 밥을 먹고 길을 걷는 서울에서는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소음이 쏟아졌다. 겹치고 겹쳐져 원래는 어떤 소리였는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소음이었다. 우리는 그 소음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소음을 이겨내려고 또 다른 소음을 만들어냈다. 대화는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대화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이의 틈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통영의 태양과 바다 앞에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어떠한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침묵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듯이. 침묵 속에서 우리는 햇빛과 파도와 바람이 빚어주는 이야기를 그저 듣고 있었다. 길을 떠날 필요가 없다면 원 없이 머무르고 싶은 이야기였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랬듯 순식간에 우리를 스쳐 지났다. 태양은 스리슬쩍 바다의 경계선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갔다.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우리는 먹먹함을 털고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 어색하게 다시 말문을 뗐다.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더듬더듬.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바보같이 웃었다. 찰나 동안 우리는 바다였고 바람이었고 모래였다. 신발에 가득 담아가는 모래만큼 우리는 한 줌의 우리를 그곳에 놓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침묵은 우리가 변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