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파스타와 빨강버스, 여왕을 위하여

스페인 속 영국, 지브롤터에서

by 새벽나무

맛깔나보이던 겉모습과 다르게 파스타에선 그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면발을 끊어 입 안의 남은 것만 삼킨다. 실망시키지 않는 ‘영국 요리’에 피식 웃음이 난다. 포크를 내려놓는다.


물로 입을 헹구며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본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이서인지 영국인들이 먹기에도 영 맛없는 곳이어서인지 얼핏 보기에도 빈 테이블이 많다. 그나마 있는 몇몇 테이블에서는 배 나온 금발 남자들이 맥주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에게도 음식은 뒷전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 중 한 명이 맥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다.


맥주를 먹다니.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맥주라니.


와인을 마셔야지, 이 사람들아. 아니면 적어도 샹그리아라도.

아, 영국은 영국이구나, 싶다.


지브롤터로 오는 길은 험난하진 않았지만 조금 외롭고 외진 여정이긴 했다. 어제 오후 숙취에 찌든 몸으로 기차를 타고 또 버스를 한 번 갈아타서 도착한 건 작고 고요한 호텔이었다.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방문을 열던 순간의 감동을 되뇌어본다.


2주 만에 호텔이었다. 호스텔과 한인 게스트하우스의 좁고 딱딱한 침대에서 늦은 시간 들어오는 룸메이트들의 고성과 함께 하던 순간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뽀송한 침구에 쾌적한 욕실이라니. 이 모든 게 다 내 것이라니. 감격에 겨운 채 침대에 코를 박았다. 그대로 3시간. 눈 떠보니 어느덧 방 안의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가벼운 저녁을 먹었다. 그곳에도 손님은 나 혼자였다. 구운 생선요리를 시켜 맥주 한 잔을 곁들여 먹었다. 서버가 한쪽 구석에 서서 나를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방에 올라와 샤워를 했다. 뜨끈한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샤워기 호스로 나오는 물줄기를 온몸에 마사지하듯 한참을 어루만졌다. 씻고 나오니 금세 노곤해졌다. 낮에 3시간을 잤는데도 잠이 모자랐다. 다시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눕힌 채로 아주 격렬한 잠을 잤다.




어젯밤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몽롱했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는데 영국 땅을 밟고 있다니 모든 게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스페인 땅끝에 위치한 영국령 반도인 지브롤터는 ‘스페인 속 작은 영국’이라는 깜찍한 닉네임에 어울리게 여권에 도장을 쾅 찍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로 통하는 마법의 문을 연 듯한 곳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오니 빨간색 2층 버스가 휙 하고 나를 스쳐 지난다. 미리 환전했던 파운드가 얼마 남았는지 지폐를 셌다. 아직 케이블카 시간까진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셨다. 다행히 커피는 맛있는 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려진 지폐를 주고 동전을 돌려받았다. 사실 카드를 써도 될 일이었지만 일부러 유로를 파운드로 환전해서 현금을 썼다. 스페인에서만 거의 3주를 머무르는 여행이었다. 다신 쓸 일 없는 파운드였다. 고의였다. 그래야 이 반나절의 기억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서.


작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길을 올랐다. 시가지와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날카롭게 깎은 듯한 바위산이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고,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빛이 찬란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아프리카 대륙이 보였다. 지브롤터는 실제로 모로코에서 유럽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경로였다. 관광지보다는 경유지 같은.


가이드의 봉고차에 올라타 산의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찻길 양옆으로 무언가 팔딱팔딱 뛰며 쫓아왔다. 차를 세운 가이드는 핸드폰을 뺏기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을 거듭한 뒤에야 차 문을 열어주었다. 뒷자리에 앉아 내릴 순서를 기다리며 먼저 내린 사람들의 감탄 섞인 비명을 들었다.


차에서 내리자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내 앞을 스쳐 지났다. 햇빛에 적응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리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원숭이가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악당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원숭이 한 마리가 한 백인 여성의 어깨에 올라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나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한발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안녕.” 소심하게 인사도 했다.


겨우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났을 즈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깎아지른 바위산 너머의 바다.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은 우리나라 통영의 한려수도 같기도 했으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통영의 산과 섬은 모두 동글동글한데 지브롤터는 일단 뾰쬭뾰쬭하다. 한눈팔았다간 졸지에 절벽으로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약간 비현실적인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봉고차 경적 소리가 불쑥 끼어든다. 내려갈 때가 되었구나.




봉고차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케이블 카를 기다렸다. 다시 작은 영국 마을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제 묵은 호텔에 맡겨 둔 캐리어를 찾아 다음 도시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었다. 지브롤터와의 짧은 만남은 여기까지, 헤어질 시간이었다.


버스 타러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지브롤터의 마그넷과 엽서를 사기 위해서였다. 보통 도시도 아닌 작은 마을에는 마그넷도 그다지 예쁜 게 없었다. 나는 유니언 잭과 빨강 버스로 알록달록한 마그넷을 지나 뾰족한 산과 그 아래 오밀조밀 모인 원숭이가 있는 마그넷을 골랐다. 엽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브롤터는 영국이지만, 영국이기 전에 지브롤터니까.


계산을 하기 위해 지폐를 세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불쑥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중국과 일본을 거치지 않고 정확하게 돌진한 질문에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국에 갔었거든, 몇 년 전에.”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잔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어차피 지브롤터를 떠나면 쓸 일도 없는 동전이었다. 그가 냉큼 내 손에 카운터에 있던 껌 하나를 쥐어주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언젠가 한국에서 스페인 속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 그에겐 스페인에서 왔냐고 물어야 할까, 영국에서 왔냐고 물어야 할까. 뭐가 되었건 나도 몇 년 전에 지브롤터에 가보았다고 얘기해야지.


정류장에 2층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뛰어서 버스에 올라탔다. 다시 간소한 출국장을 지나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버스가 바닷길을 따라 서두르는 동안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지브롤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