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지 않을 대화
팝콘처럼 톡톡 터져 나온 수국에 둘러싸여 걸었다. 물망초처럼 청초한 파란빛의 수국도, 현란한 자줏빛과 진한 보랏빛의 수국도 있었다. 비가 지나간 모양인지 축축하게 젖은 길을 걸으며 카메라에 N의 뒷모습을 담았다.
N과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서로가 서로의 단짝이 될 것임을 알아보았다. 17년 전 수학여행으로 한 번, 12년 전 겨울방학에 한 번 제주에 함께 온 적이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10대 20대 30대의 제주를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아담한 체구에 쫑알거리기 좋아하는 N을 동생처럼 여겼다. 챙겨줄 게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귀여운 수다쟁이 친구는 혼자 성큼 어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운전도 곧잘 했다. 어른 친구 덕분에 나는 조수석에서 편안히 제주 섬을 한 바퀴 돌았다. 할 일이라고는 쉼 없이 조잘거리는 N의 말에 80% 정도 대꾸해주며 농을 던지거나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바다를 마음껏 누리는 일이었다.
한여름에 제주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수국은 실제로는 더욱 풍성했다. 여름의 제주 숲은 한겨울이나 늦가을보다 흙내음을 더욱 짙게 퍼뜨렸다. 한낮의 바다는 눈부시게 찬란했고, 긴 낮을 보내고 저녁이 될 무렵이면 평온하게 찰싹대며 더위를 식혔다.
첫날 여행을 마치고 고등어회를 포장해 숙소에 돌아왔다. 재작년에 맛있게 먹었던 집이라 N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N은 한 점 먹을 때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맛있다. 맛있어.”
“그럼 한 잔 마셔.”
둘이 여행을 온 것도 거의 10년 만에 일이었다. 멋모르고 스니커즈만 신고 한겨울 눈 쌓인 한라산을 올랐던 여행도, 여름밤 술을 먹다 충동적으로 기차를 타고 다녀온 정동진 여행도, 바다까지 10분 거리라던 펜션 소개글 때문에 강원도 시골길만 한없이 걸었던 여행도 모두 N과 함께여서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이었다.
우리의 2박 3일 제주여행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여느 때처럼 영원하지 않을 거였다. 도망쳐왔고 다시 돌아가야 할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과거의 어떤 순간들처럼 혹은 그 어떤 순간과도 비슷하지 않은 모양으로.
열일곱 우리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그때보다 더 힘겨운 나날이 이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고, 스물 하나 우리는 세상 바깥으로 버려지지 않으려 무진히 애를 썼다. 스물 다섯 우리는 각자의 우울로 깊은 겨울잠을 잤다. 서른을 넘겨도 인생은 여전히 퍽퍽하고 야박했다.
제주의 바다가 어둠에 잠기면 우리는 낮에 나누던 발랄한 농담 대신 그동안 밀린 조금은 묵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등어회와 배춧국을 싹싹 긁어먹고도 술이 조금 남았다. 술에 약한 N은 어지럽다며 침대에 누워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왜 그럴까. 도대체 왜. 왜 그렇게 남한테 못되게 굴까.”
기억 속 N의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가 겹쳐 울린다. 우리는 서로 답을 모르는 채로 질문을 던졌다. 허공에 마구마구 던졌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놓고 가려고 열심히도 내뱉었다. 여기 두고 갈 테니 나를 쫓아오지 마. 질문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그라들겠지 바라는 마음으로.
“그냥 살자.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에 감겨들며 내가 중얼거렸다.
“자는 거야?”
“... 아니...”
“자지 마! 나랑 밤새 얘기해야지!”
내 몸을 세차게 흔들며 투정 부리는 N의 말도 제주도 밤바다에 삼켜졌다. 나는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입 안에 웅얼거리며. 아직 못 뱉은 말들이 많은데. 인생은 고통에 앞서 졸린 일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쾌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았다. 밤의 이야기는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다시 농을 주고받으며 해변도로를 달렸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적막이 지난밤의 말들을 소화하곤 했다. 아무래도 다 버리고 가는 건 실패인 것 같아. 나는 N을 보며 눈으로 말했다. N도 나를 보고 웃었다. 눈썹은 찡그린 채 촉촉한 눈으로 웃었다.
“조심히 가.”
“다음에 또 언제 봐?”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공항에서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입을 내민 채 투정을 부리는 N을 두고 내가 먼저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영원하지 않은 여행의 끝이 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대화도 막을 내렸다.
비행기에서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40대가 된 N과 제주에서 만나는 꿈. 또 어마어마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제주 밤바다에 숨기고 돌아가는 꿈.
영원하지 않아서 꿈꾸어 보는 아주 작고 아주 위대한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