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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Jan 02. 2022

2021년 회고를 시작해(3)

가을과 확장

나는 언제나 가을이 좋았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이 계절이 언제나 가장 진한 풍경을 선물했으니까. 많은 것을 비워내고 새롭게 채우기 시작한 봄과 여름이 지난 뒤 찾아온 가을에는 본격적인 내딛음이 있었다. 그 걸음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 채 나는 일단, 걸었다. 



일하는 자아


학교와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강사가 되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반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의 새로운 직업이자 일은 때론 버겁고 진땀이 나기도, 막막하기도 했다. 잘하고 있는 건지 불안했고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게 아닐까 좌절하기도 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 그렇겠지만, 어린이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어른과의 만남, 소통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욱 큰 부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뭐 도망갈 순 없었으니 계속했다. 수업은 정말 매 순간 새로웠다. 매번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곤 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갔다가 에너지가 다 소진된 채로 돌아오기도 했고, 무거운 발걸음 질질 끌고 갔다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돌아올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매일에 성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회사 다닐 때와는 다른, 어떤 개운함이 있었다. 매일이 도전이고 기회며 성취였다. 부족한 것 투성이이었지만 관대한 어린이들에게 기대어 매일 성장하는 일이기도 했다. 




문화예술과 함께,


책방에서도 여러 일을 하며 보냈다. 워낙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고 있던 곳이라 내게 맡겨진 업무도 여러 차례 정리가 안된 채 왔다가 사라지고 바뀌길 반복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책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주 작은 이야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렇게나 크고 빠른 세상에서 책 한 페이지에 한없이 머물러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일 말고도 홀로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전시와 공연을 보았다. 산책을 위한 완벽한 계절이니만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아름다운 날들은 정말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지만 그 따스함과 보드라움은 손바닥 가득히 남았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빛낼 수많은 생각과 감상, 미소와 눈물들이. 




가을의 바다


10월엔 생애 첫 서핑을 하러 양양에 다녀왔다. 친구와 술을 먹다가 충동적으로 한 결정이었다. 출발 전까지 여러 번 망설였으나 다녀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정도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온 여행이었다.


막연한 환상만 가지고 있던 서핑을 처음 해본 것도 좋았으나, 그냥 바다에 둥실 떠있는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바다 한가운데 서퍼들과 함께 모두 같은 방향으로 서서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던 순간, 쉼 없이 다가오는 파도를, 모두 제각각인 파도를 셈하며 기다리던 순간. 처음으로 깊은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보드 위에 올라 파도를 타는 건 찰나였다. 서핑의 대부분은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내 몸을 저 멀리 날려줄 딱 맞는 파도를 기다리며, 한 번도 기다려본 적 없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며 바다의 끝을 바라보던 시간은 아마 영영 잊지 못할 풍경이 될 게 분명했다.


그 밤에도 어김없이 해변을 걸었다. 밤바다는 소리만으로 압도적인 무언가였다. 아주 두렵고 신비로운 세계였다. 나는 파도 앞에 서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별에 숨어 있던 쪽지를 하나 발견했다. 아주 먼 미래에서 온 이야기가 귓가에 닿았다. 파도 소리가 내 비밀을 지켜주었다. 


나는 그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내 안에 파도를 가득 담아 돌아왔다. 




시와 만남


목이 시릴 정도로 추워진 늦가을엔 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일주일 중 하루, 2시간 남짓한 시간이 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소설이든 인문서든 철학이든, 장르 구분 없이 책과 텍스트, 이야기를 사랑하는 내게 시는 난제였다. 


처음 써보는 시, 수업의 이름이 그랬다. 처음이라니까 괜찮겠지, 아무것도 몰라도.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시는 막연히 느끼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혼자 읽을 땐 난해해서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함께 읽고 나누니 반짝반짝 빛을 내며 가슴에 박혔다. 그 조각들이 마음을 툭툭 건드려 울렁울렁했다. 좋은 울렁임이었다. 보이지 않던 세계를 바라보는 울렁임. 


시를 읽다가, 어설프게나마 한 행을 써보다가 나는 문득 내가 시와 닮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던 어떤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수업에서 만난 인연들도 잠깐이었지만 강렬하게 남았다. 위드 코로나로 영업제한이 풀린 때였던지라 아주 오랜만에 새벽까지 술잔을 함께 나누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다른 어떤 접점도 없이 오로지 시로 만난 사람들이라는 점이 어딘가 모르게 현실감각을 앗아갔다. 평소 밤 11시를 넘기지 않고 잠드는 내가 새벽 2시에도 말똥말똥 웃었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별것도 없는 만남이었는데, 그래서 특별했다. 


시는 정말, 마법 같고 악마 같구나. 




완전 다른 길목에 들어섰다는 감각


여름에 쓴 소설이 꼴 보기도 싫은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는 동시에 글태기가 왔다. 뭘 얼마나 썼다고 글태기가 오냐, 싶지만 뭐 내 그릇이 고만한 걸 어떡해. 


새로 자극을 주려고 글쓰기 모임을 찾다가 덜컥 블로그 글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모임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벼운 커뮤니티였고 프로젝트였다. 매주 2개의 포스팅을 올리고 사람들과 나누는 게 다였다.


이웃들이 한 번에 와장창 늘어난 덕분에 주춤해가던 내 블로그에도 활기가 돌았다. 서로의 투데이, 조회수를 올려주며 댓글과 좋아요를 남기는 이웃들이 생긴 건 아무리 별 거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눈에 보이는 특별한 성과였다. 게다가 그들이 그저 그런 이웃이 아니었다는 반전 덕분에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배가 되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들이 어디 다 숨어 있었지, 싶을 정도로 모두 심하게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다들 엄청난 거야, 하면서.


글을 나누는 건 자신의 일부를 나누는 일이기도 했다. 일상을 소소하게, 생각을 소박하게  풀어놓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그들과 일원이 되기 시작했다. 만남은 현실 세계에까지 조금씩, 조심스럽게 확장되어 갔다. 


시간이 묵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게 이 사람들은 그랬다. 가을엔 알 수 없었다. 그땐 막 씨앗을 심고 있을 때니까. 가벼운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흥미로운 스침이라고 생각했던 인연이 자리에 남아 손을 내밀고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기 시작한 건 겨울이 다 되어서다. 


그러나 가을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내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는 걸.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걸. 나의 가을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커다란 수확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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