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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Jan 30. 2022

하루의 지속

알람이 울린다. 매일 똑같은 시간, 똑같이 울리는 멜로디는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잔잔하고 보드라운 음악이어도 마찬가지다. 매일 아침은 어김없이 충격이다. 물론 눈이 번쩍 뜨이고 곧장 전투 태세가 되는 날도 있다. 365일 중 한 11일 정도. 나머지 354일의 나는 패잔병처럼 몸이 무겁다. 밤새 꼼짝도 안한 모양인지 허리가 찌뿌둥하다. 눈꺼풀은 눈송이처럼 촉촉하게 내려앉는다. 후아아, 이것은 한숨이 아니다, 생각하며 한숨을 쉰다. 눈을 감은 채 하루의 일정을 셈해본다. 


 내가 지금 일어날 필요가 있나? 왜? 
어쩌면 침대 속 인간만큼 철학적인 인간은 없는지도 모른다.
중력을 거스르려면 우선 본질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왜 일어나야 하냐고. 


 회사에 적을 두지 않는 프리랜서는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장점 겸 극악무도한 약점이 있다. 물론 해야 할 일은 있다. 책상 위엔 어제 짜둔 완벽한 시간표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실수라는 걸 하는 종족이니까. 나는 이불 속에서 시간을 재편한다. 완벽한 줄 알았던 시간표에서 흠을 발견한다. 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차피 그 일은 하는데 30분 밖에 안 걸리잖아.


그러고 보니 악몽을 꾼 것 같다. 감은 눈꺼풀 위로 간밤의 잔상을 불러온다. 사람들에게 쫓기고 서로를 죽이고. 내가 죽였나, 아니면 죽을 짓을 했나. 뭐가 됐든 심각하다. 잠을 제대로 못잤구나. 스스로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얼마나 졸릴꼬. 


벽을 향해 몸을 돌린다. 굳어 있던 허리 근육이 비틀리며 기분 좋은 통증이 밀려온다. 기척을 알아챈 달이 어느새 침대 위로 뛰어오른다. 달은 여섯살 난 나의 고양이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고양이. 작은 발로 온몸을 바즈락 밟으며 꺙꺙 알람을 울린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고양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특급 꾹꾹이 마사지를 받는 동안 잠이 가신다. 기왕 잠이 깬 김에 몸도 일으켜보기로 한다. 마사지를 마친 달이 뛰어나가면 나도 이불을 젖히고 하나둘셋 일어난다. 셋 안에 망설이면 끝이다. 다신 침대 밖으로 도망치지 못한다. 


평소와 같은 아침 일과를 보낸다. 명상을 하고 감사일기를 쓰고 달에게 멋진 캔을 선물한다. 내가 마실 보이차도 끓인다. 이젠 몸도 생각해야 하니 공복에는 커피 대신 차를 마신다. 책상에 돌아와 앉는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엔 우선 책을 읽어야 한다. 이건 그냥 나만의 의식이다. 일단 책부터 읽기. 물론 안 읽을 때도 있다. 인간의 의식은 원래 오락가락이니까. 책은 재미있다. 놀라울 정도로. 너무 재미있어서 문자와 문자 사이에서 자꾸만 도랑에 빠진다. 한 페이지에 고정된 채로 구르던 눈알이 어느새 꿈벅인다. 졸음이 몰려온다. 그러게 아까 잠을 더 잤어야지. 섭리를 거스른 스스로를 질책한다.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목을 한바퀴 돌려본다. 잠은 그런 소극적 반항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보이차를 노려본다. 저 밍밍한 물 탓이다. 역시 커피를 마셨어야 하는 건데. 


결국 다시 침대에 눕는다. 어쩔 수 없다. 세상엔 무수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이토록 침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아이패드도 나와 함께 침대로 전락한다. 우리는 하루종일 떨어질 줄 모르는 좋은 친구다. 글을 쓸 땐 사이가 틀어지기도 하지만 유튜브를 볼 땐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된다. 빨간머리 언니가 나오는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대다 보면 전기장판에 달라붙은 몸이 뭉근하게 녹아간다. 꿈벅-꿈-벅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느려진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순간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꿈 속으로 기어간다. 아이패드도 풀썩 옆으로 쓰러진다. 흐릿한 시야로 벽에 붙은 달리의 그림이 들어온다. 황폐한 광야 위로 녹아내리는 시계가 그려진 그림이다. 꿈 속에서도 낯선 풍경. 나는 그림 속 시계처럼 흐믈흐믈 녹아간다. 


잠에서 깨고 나면 개운함과 죄책감이 골고루 베개 위에 뿌려진다. 시간을 확인한다. 세 시. 세상에서 제일 애매한 시간이다. 다시 한 번 후다닥 침대를 벗어난다. 아침과 다른 중력이 몸을 맞이한다. 나는 우주인처럼 둥둥 책상 앞으로 돌아간다. 더 미룰 시간도 없다. 아직 현실로 착륙하지 못한 감각들을 뒤로 하고 무작정 할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푹 빠져든다. 훌쩍 두 시간이 흐른다. 재미있다. 항상 할 때는 즐겁다. 하고 나서도 좋다. 하기 전만 지독하게 괴로울 뿐이다. 


샤워를 한 뒤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전날 원대하게 세워놓은 체크리스트에 몇 가지를 삭제하고 몇 가지는 은근슬쩍 내일에 넘겨준다. 너는 새로 태어나는거야. 오늘하고 달라야 해. 내일의 나에게 막대한 임무를 맡긴다. 스트레칭을 하고 만족스럽게 침대로 돌아간다.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건 침대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존재가 하나 더 침대 위로 뛰어오른다. 이만한 천국이 없다. 


내일 새로 태어날 나를 위해 오늘 나의 해체식을 거행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민하고 게을렀군. 마음에 든다. 그 와중에 할 일도 했네. 기특하다. 짧은 자괴감이 스쳐지나가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기분은 어떤가. 놀랍게도 좋다. 그거면 됐다. 그대로 사라질 것을 명한다. 탕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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