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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May 20. 2022

보영 │ 포기할 수 없는 순간

브런치가 이어준 '보영 언니'와의 인터뷰 비하인드

여성 인터뷰 프로젝트 '끗질'

"언니도 언니가 필요하니까"

끗질은 중장년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여성 인터뷰 프로젝트다. 시즌1에서는 4050 언니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단행본에 실릴 인터뷰 전문 외에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언니들을 만나는 과정을 담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릴레이 연재로 소개한다.





브런치의 순기능


브런치는 내게 고마운 플랫폼인 동시에 애물단지였다. 한바탕 퇴사 에피소드(<퇴사는 별책부록>)가 메인에 걸리고 구독자가 늘었지만, 연재를 마친 뒤엔 또다시 글감을 찾아 헤매야 했다.


끗질을 기획해 멤버를 모아 인터뷰를 준비하고, 강사로서 서울 구석구석의 학교를 돌아다니면서도 본령은 글쓰기에 두기로 결심했다. 브런치에 올리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만큼 좋은 글 창고도 없었다. 그러나 글이란 아주 가끔씩 마음이 맞는 괴팍한 쌍둥이 언니 같은 것. 내킬 때만 가끔씩 끄적이며 브런치 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브런치 구독 알람이 떴다. 구독자는 간헐적으로 늘고 있었기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왠지 눈이 갔다. 김보영. 평범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필 사진 속 은은히 번진 미소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생각하며 그의 브런치에 닿았다. 구독자 이천... 오백 명...?! 예상치도 못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1년 동안 겨우 그러모은 소중한 구독자의 20배가 넘는 수치였다. 아니, 이런 유명 작가가 어쩌다 누추한 내 브런치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눈동자를 바삐 굴려 작가 소개를 읽었다. 기함할 만한 숫자보다 내 눈을 더 오래 붙잡아 둔 건 바로 세 줄로 된 짤막한 소개글이었다.


1급 사회복지사로 '특수 학교 경력 7년', '장애 아이 육아 경험', '장애인 시설의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는 장애가 있는 자식을 키워 온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사회복지사로서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실천가였다. 기타 이력도 근사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오디오 작가. 다양한 분야에서 개개인의 영향력이 배가 되는 시대에 걸맞은 진정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이기도 했다.  


세 편의 브런치 북에는 그가 엄마이자 자식, 그리고 사회복지사로 살아온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장애 아이를 키워 낸 경험, 되돌아보는 부모의 마음, 장애인 탈시설을 외치는 목소리까지. 유려한 글솜씨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글에는 고통의 여정을 지나 평안함을 찾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과 진솔함이 있었다.


나는 그가 겪은 고통에 감응하여 눈물을 흘리고 동시에 그가 외치는 묵직하고도 확고한 목소리에 감화되었다.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고 나니 끗질이 떠올랐다. 마침 인터뷰이를 찾아야 했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떡하지. 벌써 찾아 버린 것 같은데.


홀로서기의 달인.





브런치 신께 비나이다


우리가 찾아낸 많은 언니들 중에서도 보영 언니(그는 이미 내게 '언니'가 되어 있었다)는 당당히 최종 인터뷰이 후보에 올랐다.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제안 메일을 썼다. 연락은 어렵지 않았다. 브런치에는 '작가에게 제안하기'라는 유용하고 신뢰 충만한 버튼이 있었으니까.


사람은 평생 가 본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할 수 있다고 하던가. 언니를 향한 내 마음이 그랬다. 나는 부디 언니가 이 간절한 마음을 알아 주기를 바라며 브런치 신께 기도했다(나는 종교가 없다. 종교가 없어서 가능한 일이다. 아무 신에게나 구걸하기). 


언니,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초조함이 찾아왔다. 메일이 언니에게 무사히 도착했을까? 브런치 시스템이나 네트워크 문제로 오류라도 생기면...?! 이처럼 의심 많은 이들을 위해 브런치에서는 '작가님께 제안이 잘 도착했습니다'라고 확인 메일을 보내 주었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겁쟁이가 아니었다. 언니가 메일을 못 읽거나 안 읽을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했다.


꼬박 하루가 지난 뒤 언니에게 답장이 왔다. '브런치 김보영입니다' 제목을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두근 울렸다. 까 봐야(?) 승낙인지 거절인지 알 수 있겠지만, 왠지 느낌이 좋았다. 메일을 열었다. 내용은 단 세 줄. 언니의 답장은 짧고도 강력했다.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하시는 인터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010-XXXX-XXXX

아 우리 언니, 화끈하잖아.





언니와의 인터뷰 ㅡ 포기가 안 되는 순간


언니와는 비대면과 대면으로 두 번 만났다. 문자를 주고받다가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보고, 직접 만나 손을 잡는 과정 하나하나가 연애하듯 간질거렸다.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다가가는 일이었다. 흰 눈 쌓인 겨울 아침의 고요함과 정적, 반가운 소란 같은 것.


언니는 내 손가락을 이끈 프로필 사진 속 모습처럼 다정한 미소와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준비해 간 꽃다발과 엽서를 건네주었다. 감동하는 언니의 모습에 벌써 허벌눈물샘이 꿈틀댔다. 이를 악물었다. 인터뷰 시작 전부터 언니한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어...!


인터뷰 중 환히 웃는 보영 언니


희경과 함께 진행한 인터뷰는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울컥하는 순간을 몇 번 집어삼키고 프로답게(?) 활짝 웃으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이미 브런치 글도 다 읽고, 사전 인터뷰를 1시간 30분이나 해 놓고도 여전히 언니에게 듣고 싶은 게 많았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동권 보장 시위가 있었다. 여론은 갈렸지만, 덕분에 장애인의 존재가 그나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 역시 그전까지는 크게 고민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관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관할 수 없었다. 상관없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우리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예요. 사람은 모두 다르게 생겼고, 누군가는 장애가 있기도 하죠.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함께일 수밖에 없어요. 비장애인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가요. 하다못해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오롯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사는 거지요. 장애인도 마찬가지예요. 필요한 도움이 조금 다를 뿐이죠.


나로선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언니는 술술 말했다. 무언가 쉽게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오래도록 체득한 고통과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였다. 부드러운 미소 속 절대 부서지지 않을 듯한 단단함은 그 결과물이기도 했다. 언니는 지나온 인생에 어떤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까. 대놓고 물어보았다.


포기하지 않은 거요. 포기를 원했던... 간절했던 순간은 정말 많았지만(웃음), 끝까지 참고 매달린 것. 그리고 이렇게 살아남은 것. 이건 되게 자랑스러워요.

저는 포기를 잘하는데요, 나의 실없는 소리에 언니는 자신도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고 언니는 다시 미소 지으며 부드럽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다 보면 한 번은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고.


보영 언니가 아들에게 받은 편지 뭉치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아침에 내린 비로 촉촉해진 거리를 걸었다. 나에게도 포기가 안 되는 순간이 올까. 그건 언제일까. 묻고 나니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저히 포기가 안 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걸려 있기 때문이지 않나.


상념이 뻗어 나갈수록 막막해졌다. 발치에 닿던 시선을 드니 손에 쥔 우산이 보였다. 언니가 놓고 간 우산이었다.


그렇지.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지.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포기하지 않아야지. 끝까지 참고 매달려 봐야지. 살아남아서,  


살아남아서 웃어봐야지,

보영 언니처럼. 





(보영 언니와의 인터뷰 전문은 7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되는 끗질 인터뷰집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이 정보]

보영 언니의 브런치


[끗질 뉴스레터]

격주 화요일마다 끗질의 활동과 인터뷰 이야기를 담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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