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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보다 자기계발서가 낫다고?

by 새벽숨


누군가는 말한다. 남의 삶에 관심이 없어서 에세이를 읽는 시간이 낭비 같다고. 나도 비슷한 마음으로 남보다는 지금 내 생을 어떻게 잘 사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결론 없는 이야기, 거창한 교훈이 없는 이야기에 관심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세이를 읽고 쓸 가치가 있을까? 정신 바짝 들게 해주는 자기계발서나 지식을 늘려주는 비문학이 훨씬 이롭지 않나?


이 질문에 다다랐을 때 김영하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 체험해보면서 내 삶을 더 특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와 비슷할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의 나보다 악조건에 처해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내는 과정들을 목도하고 나면 지금 내 삶이 그 정도로 힘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도 이겨냈으니 나 또한 그러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소설을 읽는 이유로 충분하다.


에세이는 어떤가. 소설이 주는 이로움과 비슷한데 실제이기에 화자가 놓인 상황이 소설보단 다채롭지 않고 그래서 소설보다 실재적으로 와 닿는다. 그래서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택했다. 타인의 삶을 간접체험하여 내 삶을 더 아껴보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에세이 읽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에세이를 처음 고를 때 골랐던 소재들은 ‘꿈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였다. 내 생 유지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남의 실패까지 관찰하고 싶진 않았다. 성공하고 도전을 주는 사람의 이야기여야 했다. 자기계발서 같은, 자서전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삶이 어디 그렇게만 진행되는가. 다수의 에세이를 읽어 가면서 만난 것은 다양한 삶이었다. 작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내가 접한 그의 마지막은 실패인 경우 어디선가 또 어떤 실패를 써내려갈지 모를 삶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된다. 끝내 그의 지금이 그가 바란 대로 되진 않았지만 누구 말마따나 걸려오는 전화 한 번에 달라지는 것이 인생인데 내가 남이 가꿔가는 인생을 함부로 평할 수 없다는 것. 실패가 그 삶 자체에 매겨진 점수는 아니라는 것. 그러니 나의 지금이 내가 바랐던 모습은 아닐지라도 앞으로는 어떨지 모른다는 것.


에세이의 또 다른 이로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 구조가 나와 같지 않음을, 철저하게 다를 수 있음을 알고 놀라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이 다름을 알려면 혼자 살지 않는 한 얼마든지 체험 가능하다. 하지만 그 행동이 어떤 생각에서 나왔는지, 그 생각이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는지 과정을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생각과 감정을 담은 에세이는 설명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리하여 내가 얻는 유익함은 이해의 범주가 넓어져 내 마음 또한 편안해진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의 많은 부분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나는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그래야 무게가 덜어지고 겨우 숨이 트인다. 하지만 끝내 헤아림에 실패했다면 끊어내고 싶어도 자르지 못하는 관계들을 짊고 끌며 허덕인다.


그러나 에세이를 읽다가 대차게 놀라면서 얻은 귀한 깨달음, ‘세상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당연함이 (물론 시간이 걸리지만) ‘내가 정상이고 쟤가 비정상이다’라는 생각을 녹인다. 물론, 그럼에도 이해 못할 상황과 사람은 넘치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뼈아픈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새겼고 되뇐다. 사실 이 하나만으로 에세이를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생각한다.


요즘은 날 도전하고 채찍질하는 이야기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동행하면서 내가 시도해 볼 사소한 행위들을 일상에 더해본다. 티백만 먹던 내가 찻잎을 우려내고,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창문을 열어 바깥 바람 한 번 맞는 나날. 어제나 그제나 똑같을 줄 알았던 오늘에 새로운 길이 트이는 계기는 생각보다 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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