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봤고 늙어가는 나이니까요.
국민작가라는 별명을 붙여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많은 독자층과 유려한 글솜씨를 가진 박완서 작가.
1931년생 박완서 작가가 1970년에 등단했으니 나이 40세에 처음 작가로 등단한 것이다. 내가 20대에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글이 참 편안하게 읽힌다'고 감탄한 것과 동시에, '40대에 등단하다니... 대단하다'라고 놀란 기억이 난다. 20대의 시선에서 보자면, 40대는 본인만의 일과 분야가 확립된 안정기라고 생각되었기에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평생 책읽기를 좋아했다.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자녀가 많은 데다 넉넉치 않은 형편이라 집안에 책이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에 친구 집에서 며칠동안 지내며 위인전을 비롯한 전집 몇 개 시리즈를 다 읽어치웠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면서 며칠 내내 책만 잃었다. 친구 부모님께 미리 허락을 구한 것도 아니고, 책을 읽다보니 밥 먹을 시간이 되어서 같이 밥 먹고 잘 시간이 되어서 그 집에서 같이 잤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가 얼굴도 두꺼웠네'라며 웃음이 나지만, 그 때는 며칠동안 한쪽에 책을 쌓아두고 하루종일 책을 읽었던 기억이 행복하게 남아있다. 집안에 책이 많지 않아서 장점도 있었다. 내가 읽을 책이 많지 않아서 대신 언니들 책, 아빠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덕분에 초등학생 수준의 책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어렵고도 다양한 수준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평생 그렇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나 남다른 표현과 어휘로 멋진 글을 풀어내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일상이 새로운 이벤트와 경험으로 가득찬 사람도 아니었다.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멋진 표현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만드는 재주도 없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누군가는 무심히 보아넘기고, 누군가는 통찰을 얻기도 한다. 똑같은 시간과 사건을 겪으면서도 더 많은 걸 보고 느끼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온 시간과 경험치가 비례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람들은 인생의 길이만큼 경험치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40대가 될 즈음이면 인생의 큰 사건이라고 할 만한 입시, 취업, 결혼, 육아, 때로는 이혼까지... 많은 일을 겪었을 나이이다. 인생에서 경험을 쌓을만한 절대적인 시간도 충분히 가졌고, 또 굴곡이라고 부를만한 많은 사건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40대는 그만큼 풀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어떤 이야기든, 누구의 입장이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이전에 비해 넓어진다.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하고 여러가지 일을 겪다보면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사람과 여러가지 입장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릴 때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여겼는데, 나이가 들면서 항상 옳는 것도, 정답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견해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지'라며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진다.
앞서 이야기한 경험의 양이 개인적인 에세이나 수필 같은 글쓰기에 유리하다면, 공감의 깊이는 이를 확장시킨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자신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남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 등에 대해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의 깊이가 깊어지는 한편,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향도 다채로워질 수 있다.
40대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시기이다. 물론 여전히 회사일을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아직도 손이 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던 예전에 비해 일이든 사랑이든, 가정사든 조금은 익숙해졌을 나이가 40대이다. 하루종일 육아에 매달렸을 시기도 지나, 이제는 나를 위한 시간을 하루에 몇 분이라도 혹은 주말에 몇 시간이라도 낼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한 새로운 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에 정말 좋은 나이가 아닐까 싶다.
또한 40대쯤 되면 새로운 도전이 좌절되더라도 조금은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실패 한 번에 좌절하고 방황하던 20대를 지나, 이제는 실패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연륜을 갖췄으니 역설적으로 막 도전해봐도 되는 시기인 것 같다. (물론 나이가 든 만큼 책임도 커졌으니, 감당할 수 있는 위험 부담 내에서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