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친절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여동생들에게
인스타나 유튜브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영상이 보인다.
만삭인 임산부가 운동화 끈을 매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혹은 외국인 학생의 가방에 '너네 나라로 꺼져'라는 종이가 붙어있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다가가서 운동화 끈을 매주거나 혹은 가방에 붙은 종이를 떼준다. 그 종이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외국인 학생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하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거나, "내가 대신 사과할께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영상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게 그 영상의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던 그 사람들은 본인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친절할까?
외국인 학생의 가방에 붙어있던 종이를 떼주는 아이들 중 정작 본인의 학교에서 학교폭력이나 왕따에 가담한 아이들은 단 한명도 없을까?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길에서 만난 외국인 학생에게도 비웃음을 날리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은 밖에서도 만삭의 임산부를 보고 못 본 체 지나쳐버릴까?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는 결혼지옥 프로그램을 가끔 보다가 놀랄 때가 있다.
타인에게는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 본인의 부인에게는 윽박지르고, 욕설을 하고, 심지어 물건까지 던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보게 된다. 부부 간의 갈등을 풀고자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마구 화를 내고 욕설을 하면서 "그러니까 왜 나를 화나게 해? 네가 날 건드리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내고 욕하는 건 네 잘못이야)'라고 아내에게 소리지는 남자, "내가 전에 싫다고 했잖아. 왜 또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라고 언성 높이는 남자.
TV 영상 속 그 남자들은 친구나 이웃 주민에게는 정말 싹싹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내와 말다툼을 할 때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욕을 하고, 주먹을 쥐는 것이다.
범죄심리학자가 쓴 <용서하지 않을 권리>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동용 동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외양만으로 악인지 선인인지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런 경험이 누적됨에 따라 아동은 겉모습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며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러한 착각은 성인기까지 유지된다.'
비단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범죄자들, 나쁜 사람들은 외양부터 평범한 사람과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인상부터 범죄자의 느낌을 풍기거나, 험악한 사람이 범죄자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쉽게 구별해내서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 범죄자들의 얼굴을 보면 너무나 평범한 내 이웃의 얼굴이고, 심지어 주위의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온 국민을 놀라게 했던 고유정 사건의 범인은 이웃들에게 온순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폭력자들은 밖에서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고 평소에도 폭력성향이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TV에 나오는 폭력남편의 이미지는 종일 소주병을 들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해보이는 남편이 부부싸움할 때 잠깐 거친 모습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가정폭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상대가 화나게 했다'라는 것은 절대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없고, 무엇보다 본인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성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미성숙함을 나타낸다. 가장 안전해야할 가정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가족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하는 것은 가정폭력이 맞다.
남들보다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족과는 감정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길가다 만난 타인은 나와 갈등이 생겼던 기억이 없으므로, 오히려 쉽게 친절과 미소를 베풀 수 있다. 반면 오랜 시간 함께하며 오해가 쌓이고 감정이 상하고 관계가 틀어진 가까운 사이에는, 타인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배려조차 인색해지기도 한다.
가족에게 막말하고 고집부리는 사람도 밖에 나가서는 남에게는 친절할 수 있다. 오히려 가족보다 남에게 더 자상하고 멋진 사람일 수 있다. 유튜브 영상에서 외국인 학생의 쪽지를 떼주고 위로를 건네던 착한 남학생이, 본인의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일 수 있다.
그러니 남에게 친절한 남자가, 가족에게도 항상 그렇게 친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연애할 때 좋은 감정에서 나온 태도와 말투가, 결혼 이후 수많은 사소한 일로 다툴 때에도 변함없으리라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