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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나 Oct 12. 2023

2. 7년이라는 시간


소녀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운 좋게 몇 달을 앓아서 그간의 골칫거리였던 살이 빠졌다. 썩 보기에 나쁘지 않은 몸을 거울에 비쳐보며 자신감을 얻은 소녀는 오랫동안 기피했던 예쁜 치마를 입고 밖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길 위의 사람들은 그런 소녀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지만, 소녀는 그런 무관심이 이전까지 겪었던 경멸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화장하는 방법도 배웠다. 처음은 어머니의 화장품을 몰래 한움큼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칠했고, 그 다음은 수중에 있는 돈으로 최대한 싸고 양이 많은 것을 사서 발라 보았고, 그 후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해서 받아냈다. 혼낼 것이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드디어 나도 딸같은 딸을 키워보네!'하며 흔쾌히 용돈을 쥐어주었다. 소녀는 순간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어야 딸인가?'하는 불쾌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소녀는 처음으로 설렘을 느꼈다. 물론 모든 것은 부모님께 비밀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아신다면 집안이 발칵 뒤집힐 지도 몰랐다. 소녀는 손에 들린 핸드폰의 작은 화면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그 나이다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 그 문자 메세지의 발신인과 함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웃음은 사그라들었고, 소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랑을 하는 많은 이들이 으레 그렇듯, 그 사랑을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소녀는 자신이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의 반응에 대해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답 혹은 응수할 말을 생각하다 결심을 세웠다. 말하자!

"어머니, 나 할 말이 있는데."

"뭔데?"

"내 사실...여자 좋아한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난, 고성, 저주, 한탄. 그 무엇이 돌아오건 자신은 그것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예상했던 그 무엇도 아닌 단호한 부정이었다.

"니가 잘못 안 거겠지. 니가 무슨 동...뭐고, 그거. 동성애? 그런 거 아니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말고 가서 공부나 해라."

소녀의 인생 첫 커밍아웃은 '부정', 그 두 글자로 마무리되었다.


소녀는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고, 난생 처음으로 떼를 써서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은 해방감 뒤로 서늘한 상실감이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얻은 자유를 만끽하기에도 바쁜데 그 작은 감정을 깊게 고찰할 틈이란 없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귀가하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술과 담배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여자친구에게도 차인 스스로를 위로하는 위로주이자 지긋지긋한 집에서 나온 제한적인 자유에 대한 축하주였다. 부모님 몰래 배운 술에 절제란 없었고, 소녀의 첫 자유의 날은 술냄새와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로 가득 찼다.


소녀는 꽤 유명인사가 되었다.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덥수룩한 머리를 한 채 펑퍼짐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사람을 피해다니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화려한 염색 머리와 짙은 화장을 하고 입고 싶은 걸 마음껏 입으며 쾌활하게 웃는 소녀는 제 동기들보다 한 살 어린 나이임에도 곧잘 어울렸다. 이 쉬운 걸 여태 왜 못 해서 끙끙 앓고 있었는지! 소녀는 알 수 없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자신을 부르는 술자리에는 꼭 참석해서 짧은 관심과 호감을 즐겼다. 꼭 지금까지 참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소녀는 자신이 어딘가 망가져 있음을 깨달았다. 낯선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자신이 제일 잘 하는 것을 이제서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되짚어 보는 것. 소녀의 추측은 제법 그럴 듯 했다. 첫 여자친구를 사귀기 전, 잠시 사귀었던 연상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소녀는 얼떨결에 떠밀려 사귀게 된 연인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갈수록 익숙하지 않지만 달콤한 관심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인지, 어느 여름날 소녀는 첫경험을 강제로 빼앗겼다.

'아마 나는 그 때 이후로 몸을 주면, 상대가 날 더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됐겠지.'

소녀는 평범하진 않지만 그렇게 드물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폭력 피해자들 중 고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대부분의 피해자가 저렇게 사고하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쯤, 소녀는 몸을 좀 더 소중히 하기로 했다.


소녀는 제법 건전한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알게 된 연상의 남자. 모델 일을 하고 싶어 서울로 곧 올라갈 거라는 그 말이 조금 슬펐지만, 애시당초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일방적인 감정이었기에 응원하기로 했다. 추운 겨울날, 서울로 가기 전 마지막 술자리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소녀는 옷과 화장을 조금 더 신경 써서 꾸미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낯선 남자만 네 명, 여자는 소녀 한 명 뿐.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서 통성명도 하고, 잡담도 나누며 술을 마시던 소녀는 자신이 꽤 취했음을 느꼈다. 먹은 것을 게워내면 억지로라도 더 마실 수야 있겠지만, 마지막 인상이 토하고 난 다음의 얼굴이라니 좀 끔찍할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인사는 내일 아침이어도 될 것이다. 소녀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소녀는 지난 밤의 모든 것을 후회했다. 멍한 얼굴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 잔뜩 번진 화장, 아무렇게나 헤집어진 옷.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사그라들고 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소녀는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다.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종일 굶은 속에 시큼한 위액만 올라와 목이 붓고 피가 섞인 검붉은 덩어리가 올라와도 소녀는 멈추질 않았다. 머리가 핑 도는 지경이 되어서야 의미없는 행동은 끝이 났고, 소녀는 떨리는 다리를 애써 누르며 일어나 온 몸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소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어떡해?"

"---"

"몰라, 모르겠어. 나 진짜 집에 얌전히 들어왔단 말이야."

"---"

"근데 집 문을 여니까...뒤에서 누가 밀치고 들어와서..."

"---"

"하지 말라고, 도와 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도 안 도와줬어. 아무도 안 왔어."

"---"

"생리 중이라고, 제발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

"몰라, 중간에 기절했나봐. 눈 뜨니까 아침이었고...하루종일 울다가 밤새고 전화한 거야."

"---"

"미칠 것 같아...임신할 리 없다는 거 아는데, 근데 어느 순간 내가 내 배를 때리고 있었어."

"---"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해."


소녀는 휴학계를 신청했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을 그 집에서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 한 채로 있으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전등을 끄면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괴로웠고, 문틈이 작게라도 있으면 그 사이로 낯선 손을 불쑥 튀어나와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뭘 먹어도 다시 토했고, 잠들면 그 일이 반복될 것 같아 기절하듯 쪽잠을 자는 게 전부였다. 아주 적은, 미미한 가능성으로라도 임신을 할까 두려워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배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멍하니 있다가 눈물이 툭 터져 숨죽여 오열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오직 자신과 친구 한 명만이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아시기라도 하면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소녀의 마음 속에는 더럽고 역겨운 비밀 한 덩어리가 자리잡게 되었다.


소녀는 운동을 다니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약해서가 아닐까? 어릴 때 왕따를 당한 것도, 남들한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토하는 것도, 가끔 미친 듯이 우울해지는 것도, 그리고 그 끔찍한 일을 당한 것도 전부 내가 약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근처 체육관에 등록해서 꾸준히 나갔다. 물론 여러 번 자퇴한데다 이번엔 휴학까지 한 딸이 못 미더워 불편한 눈치를 주는 부모님도 이유 중 하나였다.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는 소녀는 이번엔 꼭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다녀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생각하면서.


소녀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괜찮을지도 몰라. 체육관에서 만난 그 사람은 소녀의 손에 직접 붕대를 감아주면서 어떻게 해야 손이 덜 아픈지, 어떻게 해야 붕대를 잘 감을 수 있는지 따위를 알려주었다. 소녀는 그쯤 되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로 호의에 약하구나.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퍽 괜찮았다. 연상임에도 존댓말로 자신을 존중해주고, 듣기에 부끄러운 애칭으로 불러주는 이 사람이라면 소녀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팔과 등에 문신이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지만, 뭐 어떤가! 문신은 자신도 언젠가 꼭 하고 싶었고, 오토바이도 자유로운 사람같아서 멋있어 보였다. 갓 성인이 된 소녀에겐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소녀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로 괜찮다고! 소녀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뺨을 맞은 날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소녀는 홧김에 집을 나왔고, 남자와 같이 동거를 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둘 다 가진 것이 없어 아파트 옥상이나 공원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지만, 곧 모텔 달방에서 살 만한 돈을 구하게 되었다. 아끼는 물건을 팔아 달방을 마련한 남자는 심기가 불편했는지 몇 달이나 소녀에게 화를 냈고, 화는 곧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녀는 얼떨떨했으나 곧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절절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를 용서하게 되었다. 다신 그러지 않는다고 했으니, 괜찮을거야.


소녀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돈도 없어서 계속 싸우는 것이리라. 소녀는 가사원에 등록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달방이나 가사원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소녀는 묵묵히 일했다. 끝없는 설거지, 쉴 틈 없는 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받는 만 원 몇 장. 그 돈의 반은 모텔에 내고, 반은 끼니를 해결할 라면을 사서 돌아갔다. 비록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이라지만 수고했다고 안아주는 남자만 있다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소녀는 가족이란 어떻게 정의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병실에 누워 말없이 천장을 보는데 꼭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의사는 염분 과다 섭취와 영양실조라고 말했다. 소녀는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전보다 야위었음을 알 수 있었다. 먹는 밥이라곤 일하러 나간 식당에서 주는 부실한 밥 한 끼, 혹은 일 쉬는 날 먹는 라면 한 개 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장에 결석이 생겨 치료하려면 70만 원 정도를 내야 한다는 말에 소녀는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새벽 내내 배를 부여잡고 구르고 울던 걸 생각하면 얼른 치료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하루에 10만 원도 못 버는 자신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고, 소녀는 결국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소녀가 예상했듯 돌아오는 건 욕설과 고함이었고, 십 여 분 내내 모진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치료비를 받을 수 있었다.


소녀는 팔에 남은 푸른 멍자국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물든 멍, 그 옆에 노랗게 흐려지고 있는 멍, 그 옆에는 아직 빨간 손자국, 그 옆에 또 파란 멍. 소녀는 헛웃음이 나왔다. 같이 산 지도 어느덧 몇 년이 되어갔다. 집도 여러 번 바뀌었다. 좁고 더러운 원룸에서 깨끗한 원룸, 그리고 조금 넓은 옥탑방, 지금의 방 두 칸짜리 집까지. 그리고 그 시간동안 소녀는 삼 일에 한 번 꼴로 멍이 생겼다. 사소한 말다툼은 곧잘 폭언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졌고, 그 끝은 꽤 높은 확률로 폭력이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괜찮을 거야.


소녀는 스스로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했다. 몇 번이고 헤어지자 해도 남자는 소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떤 말로도 남자를 설득할 수 없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리모컨, 물병, 청소기, 빗자루, 벨트, 휴지, 라이터, 컵, 그릇, 락카, 키보드, 렌치. 눈에 보이는 물건이 무엇이든 쥐고 때리거나 던졌다. 소녀는 이제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는다. 그저 그간 익힌 생존법대로 빠르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면서 울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살려주세요,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미안해, 안 그럴게,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내가 멍청해서 미안해, 내가 모자라서 미안해,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그만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소녀는 어리숙한 사람을 연기해야 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귀여운 옷을 입고, 남자가 좋아하는 높은 목소리를 연습하고, 남자가 좋아하는 혀 짧은 소리를 내고, 남자가 좋아하는 옅은 화장을 하고, 남자가 좋아하는 밝고 구김살 없는 여자를 연기했다. 소녀는 그렇게 좋아하던 책을 이제 읽지 않는다. 소녀는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들과 이제 연락하지 못 한다. 소녀는 그렇게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이제 남자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직접 욕해야 한다. 소녀는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이제 모든 걸 끝내고 싶어한다.


소녀는 병원을 다녀왔다. 병원비도 아깝다며 제대로 데려간 적 한 번 없던 남자는 홧김에 던진 키보드가 소녀의 뒤통수에 맞아 피가 줄줄 나자 허겁지겁 병원으로 향했다. 소녀는 처음으로 많은 피를 보고 덜컥 겁이 났으나, 우습기도 했다. 처음으로 배를 발로 힘껏 차이고 난 다음날 검붉은 피를 하혈했을 때는 별 것 아닌 일 취급하더니, 직접 눈으로 피를 보니 불안했는지 가증스러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우스웠다. 더 웃긴 일은, 뒤통수가 다 아물어 갈 즈음, 남자는 다시 물건을 던져 소녀의 이마에 또 피를 낸 것이었다.


소녀는 집이 싫었다. 긴 시간동안 쉴 틈 없이 일해 처음 노숙할 때와는 달리 방이 네 개나 되는 깔끔한 복층 집에 월세를 내며 살고 있지만 소녀에게 이 곳은 집이 아닌 감옥이었다. 일하는 내내 녹음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 통화한 것들 모두 녹음해서 남자에게 들려줘야 했다. 어쩌다 한 번 부모님에게 연락이 오면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추궁당하고 꼭 어머니나 아버지 성함 석 자를 붙여 욕을 해서 남자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소녀는 비웃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보다 더 한심한 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도망치려 해도 부모님이 피해 입을 것을 걱정해 도망칠 수도 없는, 목줄 달린 짐승같은 자신의 처지를.


소녀는 집이 그리웠다. 넓지 않아도 좋으니 따듯하고, 평화롭고,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 그리웠다. 그림이 그리고 싶은 소녀를 환쟁이라고 비꼬지 않는 집이 그리웠다. 자해한 흔적을 알아채고 얼마나 힘들고 서러웠느냐고 안아주는 집이 그리웠다. 문득 이유없이 눈물 흘리며 소리를 삼키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와서 등을 토닥여주는 집이 그리웠다. 자고 있을 때 대뜸 배를 맞아서 깨지 않아도 되는 집이 그리웠다. 말싸움이 크게 번져 가차없이 맞지 않아도 되는 집이 그리웠다.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 그리웠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조롱당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 그리웠다.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라고 비난당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 그리웠다. 그런, 꿈 속에나 있어서 가 본 적도 없는 집이 그리웠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소녀는 이제 맞는 게 익숙해졌다. 허나 맞는 게 익숙하다고 해서 아픔을 느끼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나아진 점이 있다면, 한 번 누군가에게 지적당하고 나서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피해서 때린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가끔 보던 SNS도 삭제해버렸다. 자신은 여전히 그 날, 그 시간에 멈춰 있는데 친구들은 벌써 멀찍이 달려나간 것이 밉고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자신을 되짚어 보려다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다.


그만 때려.


그만해.


제발 그만해.


너무 아파.


차라리 그냥 죽여.


제발 죽여줘.


내가 그렇게 잘못한거야?


...


소녀는 도망쳤다.


소녀는 새벽 2시, 어둠 속에 숨어들었다. 챙긴 거라곤 남자가 찢어버린 옷들 중 간신히 멀쩡한 상의와 바지, 패딩, 고양이 뿐이었다. 핸드폰은 진작에 남자가 부셔버렸고, 신발도 다 낡고 헤진 슬리퍼였다. 제 한 몸 챙기기에도 급급한 소녀는 아무리 홧김이어도 고양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남자의 성격 상 소녀가 멋대로 데려온, 심지어 눈 한 쪽이 없는 어린 고양이를 돌봐줄 리 만무했다. 소녀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패딩으로 덮으며 초여름 새벽에 땀을 뻘뻘 흘렸다. 제발, 제발 조용히 해. 착하지, 우리 아가. 엄마가 너는 꼭 지켜줄게. 괜찮아, 다 괜찮아 질거야. 이제 안 무서워 해도 돼.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 너는 살릴게. 소녀는 고양이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와 오토바이에게서 숨어가며 계속해서 걸었다. 남자가 검은 차를 타고 쫓아와 머리채를 잡을 것 같았다. 남자가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와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소녀는 그렇게, 희미한 마지막 희망에게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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