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면 동료 디자이너에게 내 작업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거나 혹은 함께 작업해야 할 경우가 종종 생긴다. 같은 분야에 속하는 디자이너들조차도 다 같은 시각을 갖고 일하지는 않는다. 개인에 따라 개성도 다르고, 좋아하는 색상, 디자인 스타일 그리고 각자가 강조하는 포인트 또한 다르다. 정말 좋은 디자인이라면 아무런 이견이 없지만,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직 컨펌을 받기 전에 디자인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아닌 동료들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같은 디자이너일을 하는 동료에게 나의 디자인을 설득시키는 것이 사실 더 어렵다.
디자인에 대한 나의 고유한 철학과 신념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자칫 쓸데없는 고집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디자인은 이러한 점에서는 예술과는 확실히 다르다. 예술가와는 달리 디자이너는 회사에서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해야 하며, 동료 디자이너가 했던 일을 중간에 넘겨받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누군가가 디자인했던 것을 어디부터 바꿔야 하며, 어떻게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지와 같은 민감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는 누가 만들었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가장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누가?"가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예술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디자이너의 작업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본인의 작업물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히 크지만, 대체로 동료 디자이너의 작업은 진심으로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은 본인의 결과물에 대해 다 만족해할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디자이너들도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동료 디자이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시각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 A기 디자이너 B의 조언을 구한다고 해보자. 정말 좋은 조언을 해주는 디자이너 B는 A가 지금까지 했던 디자인의 방향을 해치지 않고서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 준다. 반면 B가 자기 스타일이 강한(또는 쓸데없이 고집 센) 디자이너라면, 모든 디자인을 다 자기 스타일로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같은 조언을 해준다. 예를 들면 B는, A가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았던 점에 대한 개선방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잘 풀리고 있었던 점까지 지적하며 본인의, 즉 B의 스타일대로 다 바꾸라는 식의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디자이너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본인과 다른 스타일의 디자인을 존중하는 것, 그 디자이너를 믿어주는 것, 그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협업하는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있어야 할 덕목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디자이너들은 의외로 시야가 좁다. 본인의 스타일이 이미 굳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하지 않은 스타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게다가 디자인적으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비유해보자면 누군가가 힙합 스타일의 옷만 입었는데 갑자기 정장을 입으면 어색하고 내가 아닌 것 같고, 또 멋있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정장이 멋진 게 아닌 것은 아닌데 말이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으려면 나를 믿는 만큼 나의 동료들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했던 작업을 동료에게 과감히 믿고 맡길 수 있는 것, 그 작업을 동료들이 완성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는 필수조건일 것이다. 단원들 각자의 기량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곡보다도 더 낫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최고의 연주자들의 집합인 오케스트라가 항상 최고의 음악을 생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모두가 다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료 연주자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다 나를 따라오기만을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사람의 연주만 튀고 다른 연주들과는 어우러질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나만 믿지 말고, 나와 함께 하는 동료들을 믿어보자. 그들도 나만큼이나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바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