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 Anderson, 2007
사람마다 고집하는 것이 있다. 물질이나 물건일 수도, 어떠한 관계일 수도, 일방적이든 둘 이상이 공유하는 것이든 추억이나 기억일 수도 있다. 가끔은 고집하지 않는 것 자체를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고집하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주로 상실을 선행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이 동반하는 집착을 부정하거나 매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공감할 줄 아는 이라면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임을 인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삼형제는 서로에게 아주 숨김이 없다가도 전혀 솔직하지 못하는 순간을 반복한다. 왜 저러는지 알지만 왜 저러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소리를 치고, 지적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저지하지는 않는다. 또 상대를 완전히 버리지도 않는다. 그 시간 속에서 오가는,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이 즉각적이며 불투명하다. 그런 성질의 말과 행동들은 지켜보는 자로 하여금 점점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이제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지켜보게 만든다.
'왜 저러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았던 그들의 행동은 거의 유일하다. 강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던 순간이다. 모래 알갱이처럼 한데 섞이지 않고 온갖 종류의 감정을 숨기기만 바빴던 형제들은 아버지의 가방과 선글라스를 일제히 내던지고 거센 물살 속에서 서로의 손을 붙든다. 각자가 너무나도 다르며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모닥불을 피우고 깃털을 날리는 장면에서 극대화되던 그 부분이 급박하게 흐르는 강물을 타고 갑자기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내내 맨발로 다니는 잭이 물가에 올라가서 아이를 받아 올리고, 자기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피터가 목숨을 바쳐가며 끝까지 아이를 구하려 하고, 한쪽은 고급 구두에 다른 쪽은 허름한 가죽신을 신은 프랜시스는 중간에서 뭍으로 나가지도 물에 함께 잠기지도 못하고 잭과 피터의 중간을 오간다.
사실 이와 아주 유사한 일은 아버지의 장례식 날에도 있었다. 카센터에 갔다가 억지로 망가진 자동차를 끌고 나가려던 때, 도로에서 사고가 날 뻔해 상대 운전자를 윽박지르던 장면이다. 이때의 삼형제는 누가 뭐래도 셋이 같은 편이었다. 어쩌면 미처 구하지 못한 아이의 장례식에서 삼형제가 떠올린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라 그날 같은 편이 되었던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제의 아버지는 과거에 있다. 망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반면 겨우 만났나 했더니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 또 훌쩍 어딘가로 떠나 있는 형제의 어머니는 미래에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저마다 하나씩 들고 있었던 깃털을 이번에는 셋이 함께 하나만 들고서 의식을 치른 것은 완벽한 해결책을 줄 줄 알았던 어머니가 떠난 후의 일이다. 모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달라진 것 역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셋이 함께 기차에 오르려면 손에 든 가방을 버리고 서로의 손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떠나가는 기차는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일생의 시간과도 같다. 마지막에 삼형제는 일생의 같은 공간에 흔쾌히 머무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흘러나오는 샹송의 가사처럼 '당신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당신과 대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마음대로 멈출 수 없고 눈 깜짝할 새에 놓치기도 하며 가까스로 잡아 탄다 해도 쫓겨나버리는, 하지만 어떻게 생긴 객실이든 같은 속도로 전진하는 '기차'에 다시 뛰어오르며 당신과 친해지기 위해 대화할 기회가 삼형제에게 생겼다. 이들은 웨스 앤더슨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극적인 사건과 유머, 시각적 아름다움을 동반했지만 영화 바깥의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 기차에 타고, 내리고, 다시 타면서 같은 객실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삶이 그렇다. 사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