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고생!(몽실, 네이버웹툰)
우리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 말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젊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 꼭 ‘젊어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기득권을 가진 선배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에게 업무를 떠 넘기면서, 또는 회사에서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의도로 이 말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나도 17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혹시 은연중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독자는 웹툰을 읽을 때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수용한다. 작품 속에서 같은 에피소드를 읽더라도 독자의 경험에 따라 또는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웹툰 속 감정과 뉘앙스를 다르게 해석한다. 웹툰 <사서고생!>은 MZ세대의 일과 연애,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고인물 직장인의 관점에서 <사서고생!>은 직장에서 실제로 벌어질 법한 에피소드를 MZ세대의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위에서 말한 속담처럼 젊어서 고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1. 현실을 재현하는 요소
직장생활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오피스물, 기업물, 재벌물 등으로 부른다. 오피스물은 주인공이 신비한 능력을 갖췄는지 여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회귀나 빙의, 환생 등으로 신비한 능력이 얻은 먼치킨 캐릭터가 서사를 이끄는 유형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 사장까지 올라간 주인공이 신입사원으로 회귀하여 인생 2회 차를 살아가는 <상남자>를 비롯하여 <재벌집 막내아들>, <신입사원 김철수>, <신입사원 강 회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주를 보는 신비한 능력으로 전지적 정보를 획득하는 <운명을 보는 회사원>도 비슷하다. 먼치킨 주인공은 자신에게 부여된 신비한 힘으로 불합리한 환경을 통쾌하게 극복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실에서 독자가 느끼는 불합리함이 개선될 여지는 없고 사이다만 남는다.
반면 주인공에게 판타지적 능력이 부여되지 않은 오피스물은 보다 현실감이 있다. 독자는 웹툰 속 주인공처럼 회귀할 수도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현실에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 아닌 사람이 훨씬 많다. 따라서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오피스물은 독자의 공감을 얻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주인공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미생>이나 방송 업계의 불합리한 문제를 다루는 <직장인 감자> 등이 대표적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1」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청년 세대의 비정규직 비율은 팬데믹 이전에 비해 증가, 청년들이 졸업 후 갖게 되는 첫 일자리의 질이 이전보다 하락했다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급여, 승진, 처우 등이 다르다. 오늘 다루는 <사서고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조금 변형된 형태로 다룬다.
대기업 서화증권에 입사하는 직원은 두 부류다. 정기 공채에서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하는 대졸 정규직원(이하 일반직군)이거나 비정기적인 고졸 공채로 입사하는 직원(이하 지원직군)이다. 지원직군은 일반직군의 업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며 일반직군에는 없는 ‘주임’으로 불린다. 일반직군이 승진하여 대리, 과장, 부장으로 올라가는 체계와 다르다. 같은 직군끼리 어울리고 서로 지나친 간섭을 피하는 것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일반직군과 지원직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주인공 은수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원직군으로 입사하여 차별적인 현실을 체감한다. <사서고생!>이 현실을 재현하는 요소는 신비한 능력이 부여된 먼치킨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MZ세대 지원직군 직원이 겪는 에피소드에서 비롯된다.
2-1. 직장에서 최고의 빌런은?
일반직군 신입사원 해영은 업무 처리가 서툴러 은수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는다. 그러던 중 은수는 거래처의 펀드 환매 서류를 제 때에 접수하지 못해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끼친다. 은수의 실수라기보다는 해영이 은수에게 제대로 서류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원직군 은수의 실수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독자는 조금 더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해영은 자신의 탓이라고 용기 있게 밝히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다.
작가는 내레이션을 통해 직장에서 최고 빌런은 성격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한두 번 실수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문제가 맞다. 얼마 전 타 부서 직원의 단순한 실수 때문에 우리 팀 여러 명이 오랜 시간을 들여 문제를 수습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실수에 경각심이 없던 이 직원은 그 후로도 잦은 실수로 여러 사람을 괴롭혔다.
성격이 나쁜 사람은 당연히 직장에서 빌런이다. 성격이 착하지만 맡은 일을 제대로 못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직원도 다르지 않다. 사실 나 역시 실수하면서 성장했다. 신입사원 시절에 저지른 실수로 타 부서 직원에게 불편을 끼쳤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직장에서 최고의 빌런은 성격이 나쁘면서 자신의 업무를 책임감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2. 을의 숙명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고객 앞에서는 을이다. 증권사 직원을 괴롭히기 위해 고의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는 고객들이 있다. 이들을 소위 ‘갑’이라고 부른다. 돈을 내고 사는 것은 상품이지 상대를 막 대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을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란다. 을의 숙명이다. 물론 갑과 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갑이 아닌 을로 보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을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지키면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멘탈을 잘 유지하는 것도 을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갑질 거래처, 무례한 손님, 진상 민원인 등을 만나면서 멘탈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롤플레잉 기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자신이 연극에서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배우는 연극이 끝나면 자신으로 돌아온다. 다음 연극에서는 또 다른 역할을 연기한다. 업무 스트레스는 개인의 삶에 영향을 제한적으로 미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의 부정적인 요소가 업무에 영향을 덜 미치게 된다. 오후 6시가 되어 사원증을 가방에 넣으면서 “연극 끝! 나는 이제 글을 쓰는 평론가로 돌아간다.”를 외치면서 퇴근한 적도 있다. 정신 승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상 고객의 갑질을 버티며 아직도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3. 어디까지 맡아서 일을 해야 할까?
지원직군 주임들은 맡은 일이 아니면 작은 일도 칼같이 선 긋는 쪽, 또 다른 하나는 어느 정도의 업무는 유연하게 서포트하는 부류로 나뉜다. 은수는 안 해도 되는 일까지 도맡아서 ‘사서 고생’하는 직원으로 야근을 해서라도 일반직군 직원들이 업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런 선한 의도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자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는 황 대리 같은 사람도 있다. 은수의 서포트를 받지 못하는 일반직군 직원은 불만을 느끼고, 그 일반직군 직원을 서포트하는 지원직군 역시 자신과 은수를 비교하는 시선 때문에 불편해한다.
은수는 선한 의도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넘어 다른 사람의 업무도 대신 처리했다. 그러나 업무를 대신하다가 사고가 터지면 선한 의도는 가려지고 나쁜 결과만 남는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작은 일도 칼같이 선을 긋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업무는 유연하게 서포트하는 것이 직장생활을 하기에 무난하다.
은수가 가진 마인드는 정말 훌륭하다. 다만 조금 더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자기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도 많다. 주로 과장급 이상이 그렇다. 자신이 할 만한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무리한 요구는 적당히 쳐내는 것도 필요하다. 선을 넘는다고 생각되면 부서장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위에서도 웬만하면 다 안다.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으면 묵인하려는 관리자가 문제다.
3. 오피스물은 댓글도 다르다
웹툰의 특징 중 하나가 댓글 시스템이다. 댓글 창은 작가와 독자, 또 다른 독자를 연결하는 공론장이다. 베스트 댓글은 다른 독자의 지지를 받으며 상단에 노출된다. 학원물에 단순히 독자의 호불호를 판정하는 댓글이 많다면, 오피스물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베스트 댓글이 상대적으로 많다. 학원물에 비해 오피스물의 독자층은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학원물이나 로맨스판타지 등에서는 보기 어려운 댓글이 오피스 물에 많다. 물론 단순한 호불호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관점으로 다른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독자가 표현한 댓글은 은수를 지지하는 동시에 웹툰을 읽는, 댓글을 읽는 또 다른 독자를 위로한다.
4. 사서 고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얼마 전 ‘조용한 퇴사’가 유행인 적이 있었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퇴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무 시간만 채우면서 소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 업무능력은 형편없는데 자신이 일을 잘한다고 착각하는 후배가 한 명 있었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은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다. 편협한 사고방식과 좁은 시야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만 그렇게 행동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주변 분위기를 흐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였다. 애정을 가지고 여러 번 돌려서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손흥민 선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핫스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손흥민 선수는 토트넘을 위해 뛰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해 경기를 한다. 열심히 노력할수록 본인의 몸값이 올라간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뛰는 셈이다.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회사에서 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역임했던 최인아 작가는 “애쓰고 애쓴 건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 내 안에 남아 있다.”며 경험에도 밀도의 차이가 있음을 주장한다. 똑같이 10년을 일했을 때 처음 2~3년은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만 5년 차부터는 슬슬 차이가 난다. 능력은 거기서 거기다. 일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경험과 인사이트로 축적되며 눈에 띄는 격차를 만들어낸다.
<사서고생!>은 MZ세대가 겪을 법한 실제적인 직장생활을 웹툰으로 담았다. 은수가 하는 사서 고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무엇보다 은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사서 고생하는 것은 바보 같아 보이지만, 은수가 일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은 경험과 인사이트로 축적되며 밀도의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 확신한다. 조용한 퇴사를 하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 선택도 존중한다. 반면 직장에서 성장하고 싶다면 은수처럼 일해보는 것은 어떨지, 은수처럼 일했던 고인물 직장인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은수가 직장에서 사서 고생하는 만큼 앞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지금만화 23호(2024.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