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키드 런치(1992)
네이키드 런치(1992)는 윌리엄 버로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다. 원작소설은 마약과 성관계를 포함한 자극적인 주제와 컷 앤 페이스트 기법의, 이야기와 묘사가 뒤죽박죽 섞인 난해한 문체로 인해 매니악한 입지가 굳건했고, 그로테스크한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크로넨버그는 이 작품을 비교적 친절하게 영상으로 담았다. 그럼에도 일반 관객들 입장에서 너무나 난해한 영화라는 사실은 불식할 수가 없었다.
살충 구제원인 윌리엄 리는 원활한 작업이 불가능했다. 아내가 살충제를 마약처럼 자꾸 주사기로 꽂아서 약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점점 정신을 놓던 아내는 리의 작가 친구 둘과 셋이서 부적절한 시간을 보내고, 퇴근한 리는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다가 아내에게 '윌리엄 텔 게임'을 하자고 한다. 아내는 곧바로 유리컵을 머리 위에 올리고 웃으며 리를 기다린다. 리는 실수로 유리컵이 아니라 아내 머리를 쏘게 되고, 집을 나와 도망치던 중 '인터존'이라는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갈 표를 얻게 된다. 거기서 비밀요원이 되어 환상적이고 쾌락적인 인터존의 어둠을 파헤치게 된다.
리는 요원으로서 '보고서' 작성을 요구받게 된다. 마약에 중독되어 전용 타자기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작성하는 리는 창작 과정 전반에 대해 고통받는 작가를 의미하고, 영화는 메타적인 위치를 띄게 된다. 그래서 가뜩이나 환상과 현실이 섞이고 설명도 부족한 이야기가 '창작자들의 이야기'라는 영역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불쾌한 따돌림을 조장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을 한 글자도 읽지 않은 내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창작의 개념과 최대한 거리를 둔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창작통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
리는 인터존에 가서 검은 고기에 대해 조사하게 된다. 검은 고기는 거대한 지네를 갈아 만든 가루로, 거기서 유통되는 중독성 강한 마약이다. 리 입장에서는 조사 및 보고해야 할 인터존의 악이지만, 동시에 이 마약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검은 고기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영감이라 부를 수 있는, 쾌락에 불과한 자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작가들이 영감이라 부를 뿐이지, 우리 모두가 느끼고 기억하는 삶에 대한 단상이다. 우리가 산출하는 단상들은 대게 부정적이고, 비애적이다. 특히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벌레는 살면서 드는 비뚤어진 마음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현실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리의 아내는 살충제를 팔뚝에 꽂으며 카프카 하이, 즉 카프카적 절정이라는 표현을 썼다. 당연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언급한 것이다. 변신 속 그레고르는 멀쩡히 가정을 지탱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거대한 벌레가 되어 버리고, 가족들에게 외면 비슷한 보호를 받다 결국 손님에게 받은 부상으로 죽어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벌레가 되어버린 사실은 환상 같은 봉변이지만, 결국 영화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이미 벌어진 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말도 안 되고 억울한 일이 벌어졌더라도, 본인에게 일어난 일이며, 그걸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건 작가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해당되는 숙명이고, 작가는 그저 더 적나라하게 심취하여 작품을 낳을 뿐이다.
작중 작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유한 타자기를 사용한다. 이 타자기들은 평소에는 평범한 타자기지만, 사용자가 자신의 내면에 파고들 때면 기괴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흉측한 벌레가 되어 사용자에게 말을 건네며, 사용자가 애써 묵인하려 했던 생각들을 작성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라고 강요한다. 이들은 보고서 완성을 독촉하는데, 여기서 보고서란 작가 내면의 그 어떤 거짓과 장식도 없이, 본연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타자기의 변신은 우리가 살면서 느낀 비뚤어진 마음의 변심을 상징한다. 결국 영화 속에서 타자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성찰이라고 볼 수 있고, 괴물들이 극단적인 형태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성찰과는 반대의 결과를 갖는다. 우리가 사색을 하면 살면서 겪은 불쾌한 일들을 정리, 분류하고 건강한 결과로 정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불건전한 환경 속에서 마약에 빠져 침잠하게 되니, 안 좋은 생각은 더 안 좋고 엽기적인 쪽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방향성은 훨씬 순진하다.
리가 인터존의 다른 작가의 집에 찾아가는데, 그 집의 안사람은 자신의 아내와 똑같이 생겼고 이름도 같았다. 그녀와 끈적한 대화를 하며 그 집에 있는 타자기를 사용하는데, 그 타자기는 점차 여성의 신체로 변신한다. 가정부에게 외도를 들키자 타자기는 팔다리와 머리가 없는, 여성의 성적인 부분만 남은 흉물이 되어 파닥파닥 거리며 절정한다. 이는 리가 그 여자에게 느낀 정욕이 반영된 것이다.
후에 그 집주인과의 마찰로 인해 자신의 타자기가 부서져 수리를 맡기게 되는데, 머드웜포라는 사람 대가리를 닮은 타자기가 탄생한다. 이 타자기는 사용자가 아가리에 손을 넣어 이빨을 키패드처럼 쓰는 구조인데, 타자기가 작성자의 글이 마음에 들면 대가리에서 촉수 비슷한 게 튀어나와 즙을 흘린다. 그 즙은 환각작용을 하며, 다른 타자기와 다르게 변신하면 팔다리가 전부 달린 온전한 사람의 형체를 띤다. 영화에서 자아를 가지는 타자기라는 아이디어는 작가의 고독을 조련하는 역할을 한다. 글을 쓰며 자기 자신에 침식되다 보면 끊임없는 불안과 의심에 빠지게 된다. 그 감정선은 자신의 생각이 허접하지 않을까, 그런 자신도 자신의 삶도 의미 없는 헛짓거리가 아닐까 하는 공포다. 그래서 작가들은 자신의 글을 숨기는 한편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머드웜포는 이 갸륵한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타자기로, 벌레로 변하는 타자기보다 어투도 더 다정하고 대화도 잘 통한다.
하지만 모든 작가는 혼자다. 치료적인 대화를 하는 마음 맞는 사람도 결국 타인이기에 앞서 말한 작가의 스트레스는 바퀴벌레처럼 없앨 수 있는 불편함이 아니라 온갖 비명을 지르는 우리의 장기들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머드웜포는 사색을 방해하고 삶을 나락으로 보내는 목소리 달콤한 악마에 불과하다. 나중에 머드웜포가 하달한 임무 때문에 괴물에게 잡아 먹힐 뻔한 리는 분노해 그 타자기를 인터존의 요원에게 건네버린다.
비관론자의 오명을 안고, 삶은 거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영화는 이를 기정사실 삼았다. 그렇기에 영화는 벌레 같은 현실에 치이는 인물들을 노예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너무나 순수한 악을 설정했다. 리가 맡은 임무의 최종적인 목표는 어떤 박사를 잡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인터존과 다른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며 마약을 통해 사람들을 가축화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검은 고기를 대거 유통해 약쟁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상술한 대로 검은 고기는 우리들의 비뚤어진 마음이기에 박사의 범행은 그 마음들을 악화해서 노예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 거지 같고 안 좋은 마음을 품어도,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벗어날 때도 많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하니까. 약에 빠져 행동이 과감해지면 보통 모든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지만 되려 극적인 해결책을 도출하기도 한다. 박사는 검은 고기 사업은 너무 정치적이라 접고 다른 아이템을 찾았다고 리에게 말한다. 박사는 이 예외적인 인간의 억센 강함을 정치적이라 표현하며 더 강한 감옥을 찾은 것이다.
박사는 머드웜포를 양식해 여러 마리를 기둥에 거꾸로 묶어놓고, 사람들을 그 대가리 촉수에서 흐르는 즙에 중독시켰다. 박사는 달콤한 쾌락을 미끼 삼아 노예 공장을 만들었다. 노예 같은 삶을 사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아서 아예 삶을 거세한 노예로 만든 것이다. 영화 속 박사는 흔히 말하는 빌런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상징적인 기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삶의 필연적인 괴로움을 외면하고 회피하면 어떻게 되는지 영화는 여러 번 역설했다.
영화는 인터존이라는 공간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인지, 작가의 내면인지, 아예 환상 속 공간인지 헷갈리게 연출했다. 그러다 명료하게 힌트를 주는데, 리가 미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작가 친구 둘을 등장시킨다. 둘은 리가 걱정되어서 왔고, 같이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한 원고를 건넨다. 네이키드 런치라는 제목의 소설이고, 작가가 리라고 적혀있지만 리는 그 글을 쓴 기억이 없었다. 셋은 담소를 나누다 헤어진다. 친구들은 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길 바라지만, 리는 이 글을 완성하면 제때 돌아오겠다고 하며 인터존에 남는다. 이로써 인터존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네이키드 런치는 현실의 과업을 상징한다. 자기가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는 그 글을 완성하는 것은 알쏭달쏭한 현실에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박사는 리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리는 그 박사에게 사로잡힌, 아내를 꼭 닮은 그 여자를 풀어달라고 한다. 이후 리와 그 여자는 아넥시아라는 마을로 차를 몬다. 리가 박사의 동업 제안을 수락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리는 네이키드 런치를 완성하지 못했고, 현실을 저버렸다고 이해할 수 있다. 국경선에서 만난 경비병들은 리가 작가라고 설명하자 의구심을 품는다. 작가임을 증명해 보라고.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말은 삶과 진실되게 대치하는, 인터존에서 허우적대는 노예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뜻이다. 이에 리는 새로 아내 삼은 그 여자에게 윌리엄 텔 게임을 제안한다. 그 여자도 전처랑 똑같이 웃으며 유리컵을 머리 위에 올리고, 리는 똑같이 그녀의 머리를 맞춰버린다. 이에 놀란 리를 보며 경비병들은 아넥시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작가로서 인정해 준다. 네이키드 런치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반강제로 현실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현실은 상식적이지 않다. 벌레 타자기는 리가 아내를 쏘게 프로그램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윌리엄 텔 게임에서 아내를 쏘게 된 건 실수조차 아닌 조종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윌리엄 텔 게임을 시작한 것조차 선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흐름이 상식과 설계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직시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올바론 형태이며, 행복한 상태라는 것이다.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왕처럼 살려고 하면 노예가 된다.
리에게 아내와 아내를 닮은 여자는 뮤즈다. 뮤즈는 예술을 견인하는 영감의 중심으로, 삶을 이끄는 원동력을 뜻한다. 그리고 그 뮤즈는 살다 보면 자주 바뀐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수미상관은 반복이다. 이 우스운 반복이 삶의 진실이라는 뜻이다. 윌리엄 텔 게임을 원했으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라. 너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희구한다면 총알의 눈치를 보지 마라.
나는 이 영화를 창작자만의 이야기라고 보지 않았다. 창작자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관찰을 더 많이 하는, 똑같은 삶의 노예이니까. 우리가 갈아먹는 벌레들이 부디 아름다운 타자기가 되기를 바란다. 뱃대지로 짓거리는 징그러운 벌레도, 머리로 사정하는 머드웜포도 아니기를 이 영화는 토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