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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거기 있어라 트루먼

트루먼의 사랑(2025)

by 향다월



트루먼의 사랑(2025)은 올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전' 항목 한국 작품들 중 하나인 김덕중 감독의 영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트루먼쇼의 설정에서 착안했다. 여자는 어느 날 웬 영어 방송이 들리자 사람들이 반복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 넘게 사람들은 눈을 병적으로 깜빡이며 하던 행동을 반복했다. 긁던 머리를 계속 긁거나 먹으려던 감자칩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등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다렸다. 그러다 박수소리가 들리면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괴한 목각인형들 사이에서 큰 공포를 느낀 여자는 자신이 영화 속 트루먼처럼 통제되는 세상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과 같은 트루먼을 찾아다니게 된다.


이 기현상을 '에러', 에러에 종속되는 사람을 '라이어'로 칭하며, 맥도날드 매니저인 현식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현식은 당연히 이를 무시했고, 9개월 후에 자신도 에러를 겪으면서 우연히 다시 만난 그녀에게 자신도 트루먼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여자 옆에는 다른 트루먼인 청년 경찰이 그녀의 남자친구로 서있었다. 셋은 삼각관계에 빠지는 동시에 거짓된 세상을 벗어나려 고군분투한다.



1. 트루먼으로 산다는 것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트루먼은 이방인이다. 세상은 별 다른 걱정 없이 잘만 돌아가는데, 본인들이 아니면 절대 공감받지 못하는 이질감을 안고 괴로워해야 하는 삶. 엑스트라를 많이 써서 연출해야 하는 다분히 영화적인 상상력이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타인의 행태가 더 엽기적일 뿐, 우리도 영화 속 트루먼들이 라이어들을 보듯이 타인을 바라보곤 한다.


다른 생각은 곧 다른 삶을 의미한다. 어떤 이가 일반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 없다면, 그가 아무리 일반적인 삶을 살려 노력해도 스멀스멀 퍼지는 찝찝함을 불식할 수는 없다. 보통 성공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특출 난 아이디어와 마인드로 세상을 본인에게 맞출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외국인에 그치게 된다. 그들이 하는 생각들이 번뜩이는 창업 아이템처럼 실용적인 경우도 드물 테니, 그들은 그저 불편하고 어색한 시간들을 수집하게 된다. 간헐적인 타협도 이질적인 감정 자체를 융화시키지는 못해서, 그 시간들을 이어 붙이는 지긋지긋한 접착제에 불과하다.


현실 속 트루먼의 감정선으로는 아직 일어서지 못한 예술 혼이나, 너무 방어적인 도덕론, 자신의 평범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의식 과잉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이 감정들은 라이어로 지칭되는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하등 필요가 없는,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헛고생이다. 원작 속 트루먼이 빼앗긴 '개인'을 세상으로부터 되찾는 모험가였다면, 영화 속 트루먼들은 세상에서 분리되었음을 맹신하는 불쌍한 개인들이다. 결국 영화가 돌려 말하는 '트루먼으로 산다는 것'은 지인들 입방아에 나름 자주 올라가는 유별난 인간의 속마음을 파헤치는 것이다. 그들은 불안하고, 보상 심리가 강하며, 가학적인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2. 너 트루먼이면 안되니?



트루먼들은 수소문 끝에 뉴질랜드에 세상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작 속 트루먼이 마침내 만지고 넘어간 하늘색 벽처럼, 그곳을 통해 진짜 바깥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여자와 현식은 나가야 한다고 뜻을 완강히 했고, 경찰 청년은 밖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나갔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모르니 더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즈음 여자가 현식도 사랑한다고 말하자 청년 경찰은 전혀 정상이 아니라며, 자신과 현식 중 확실히 선택하라고 한다.


미묘한 감정들이 부딪히는 와중에도 이들은 같이 잘 놀러 다닌다. 이들의 유대감은 강력한 반대급부다. 세상에 전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니 이들은 뭉칠 수밖에 없고, 여자도 그래서 쉽사리 남자를 고르지 못한다. 영화는 지금까지의 흐름으로는 청년 경찰이 아니라 현식에 무게감을 두었다. 현식이 청년 경찰을 처음 봤을 때 에러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었고, 셋이 병맥주를 들이켤 때 청년 경찰 혼자만 색이 다른 제품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라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준 청년 경찰을, 진짜 동반자인 현식의 등장에도 차마 끊어낼 수 없었던 거라 생각되었다.


어느 해변에서 셋이 텐트 안에서 술을 먹는데, 현식이 연적인 청년 경찰을 동료로 인정하는 말을 하자 청년 경찰은 낯간지러워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그때 에러가 발생했는데, 현식이 에러에 종속되는 일이 발생하고, 청년 경찰은 에러라면서 텐트에 돌아오게 된다. 관객이 기존에 알고 있던 트루먼의 개념이 흐트러지는 시퀀스다.


이에 여자는 자신이 청년 경찰을 구해줬던 것처럼 자신도 현식을 구해줄 것이라며 둘이서 뉴질랜드로 떠나게 된다. 트루먼과 라이어의 정서적 밀착이 등장인물만 바꾸어서 재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행보는 단순한 쌍방 구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완전한 반대 개념이었던 트루먼과 라이어의 연결은 그 개념들을 현실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일으켰다. 아무리 인간의 생각을 이분법으로 나누어도,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당연한 진리. 영화 속에서는 자명한 기준으로 취급되던 '에러'도 법칙의 성질을 잃으면서 각 트루먼들은 그들끼리의 상호작용에 휘둘리게 된다. 결국 트루먼들은 세상과 자신을 판단한 것처럼, 가까운 사람도 판단하게 되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등장인물이 트루먼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관심을 거두고, 본격적으로 메시지를 향해 나아간다.



3. 왜 하필 사랑인가



청년 경찰은 한국에 남았다. 본인의 선택으로 추정되고, 그래도 괴로워한다. 청년 경찰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진다. 남성 친구, 여성 친구랑 같이 셋이서 가지는데, 이들은 쉽게 표현하면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 별 것 아닌 주제를 깊게 파고들어 으스대거나 깨어 있는 척을 하는데, 이 모습이 현실에 존재하는 흔한 트루먼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좋게 말하면 뇌를 활발히 쓰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사회성이 다소 부족한 말 많은 인간들. 이들은 갑자기 빠진 멤버를 대신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뽑는 기준으로 미학, 경제, 정치에 얼마나 조예가 있는지, 각 항목들을 누가 심사할지 같은 것들을 정하고, 후보로 온 사람을 뒤에서 평가하는 등 거만한 모습을 보였다.


청년 경찰은 CCTV 근무 중, 예전에 트루먼이라는 이름을 간판 삼아 모임을 운영하던 모임장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예전에 트루먼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이야기가 돌았었고, 알고 보니 떠나려는 트루먼과 뉴질랜드 쪽 사람들을 이어주는 브로커 같은 사람이었다. 청년 경찰은 떠난 둘의 근황과 구체적인 진실을 알기 위해 모임장을 추적해 추궁한다. 역시 영화는 이 인물이 트루먼인가, 거짓 세계를 구성하는 흑막인가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냥 새로운 여자다. 모임장은 어느새 가까워져 청년 경찰의 모임에 초대된다. 술에 취해 잠에 든 청년 경찰을 뒤로하고, 나머지 모임 멤버 둘과 모임장은 핵심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자 멤버가 청년경찰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자 모임장은 그에게 반했고, 그를 망가뜨릴 거라고 이야기했다. 모임장은 청년 경찰이 헛된 기대를 전혀 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저 살아갈 수 있게 성격을 개조할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에러가 난무하는 납득되지 않는 현실일지라도, 트루먼과 라이어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에 헛똑똑이 모임 멤버들은 딱히 거부감을 표하지 못하고 건배를 한다. 그들도 내심 아는 것이다. 트루먼 같은 사람을 자처하고 있지만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은 반대라는 것을. 인정 욕구, 선민의식에 매몰되는 것은 결코 지속 가능한 삶이 아니니까.



우리들의 고집은 가끔 독이 된다. 독이 되는 고집들이 모여 모래성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게 쌓이면 아집이 된다. 우리는 트루먼을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 고통받을 걸 알아도 평온한 자신의 삶을 안쪽에서 흔들어버린다. 왜 제목이 하필 트루먼의 '사랑'일까? 너무나 개인적인 아집으로 트루먼이 되어 버리는 것인데 말이다. 사랑은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지만, 그 전제는 만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존재와 자신의 생각, 자신을 둘러싸는 사물들도 적절한 강도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트루먼도 라이어도 아닌 그냥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결국 제목의 사랑은 세계관으로 빚는 인생관이다. 세상 속에 있는 자신과 화해해야 종류를 불문한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플롯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보면 영화 속 사랑은 성애의 영역이지만, 영화가 내포하는 삶의 항상성에 대한 경각심은 사랑을 관점의 영역에 집어넣는다. 카뮈가 역설한 부조리의 개념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에러들을 덤덤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거친 박수 소리에 괜히 부들부들 떨거나 기세등등해지지 말고, 행복한 이방인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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