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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ad Feb 22. 2020

좋은 마무리



진짜 얼마 안남았어. 며칠 남았지? 요새 우리가 자주 주고 받는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머리를 굴렸다. 계획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법이고, 후회를 덜 하는 법이라 늘 생각했다. 흐르는 대로 시은과 함께인 나날을 보냈던 터라 막상 계획을 짜려니 뭘 해야 마무리를 잘 했다고 소문이 날 지 생각 나는 게 없었다. 미술관을 다녀오고 살사 학원을 한번은 가야겠다. 나머지 날들엔 어디를 가지. 역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연 온천이 유명한 똘랑똥꼬나 케레타로 사람들에게 여러번 추천 받은 테키스키야판을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카메라도 고장났고 몸을 움직여 그곳에 가는 노력에 비해 즐길 자신이 없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야하는 건 아니지만, 으레 그 노력에 응당하는 보상이 오길 바라는건 사실이니까. 멕시코에 처음 와서 힘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떠밀리듯 비행기에 타서 온 멕시코는 참 허전했다. 기댈 구석은 동생 뿐이었다.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고 아침마다 눈 떠서 우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그 애는 참 걱정 없어 보였다. 밤이면 나가서 펍에 가자며 매번 내게 약속을 받아냈지만 나는 빨리 들어와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멕시코에 와서 기대한 것 중 하나는 동생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거였는데, 나의 그런 마음은 동생의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내가 백만원이 넘는 비행기 표와 또 그만큼의 여행 경비와 두어달의 시간을 내서 왔는데 너는 내가 와도 하고 싶은 게 고작 그런거구나, 싶어 자꾸만 심술이 났다. 그게 우리가 함께 보내는 초반의 시간을 망쳤던 건지도 모른다.  

동생은 내 생각보다도 돌아다니는 걸 더 싫어했다. 싼 값에 빌려, 어정쩡한 침대와 채광이 좋지 않고 냄새나는 방에서 시은에게 나갈 생각이 깃드는건 열두시가 더 지나서였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시차적응을 하지 못해 새벽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그 애를 기다리는 일이 지루했고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직접 티는 못냈지만 아마 그 애는 눈치껏 알았고 내 눈치를 봤을 지도 모른다. 겨우 밖에 나가서도 성당에 들어가거나 박물관에 가는 일은 원치 않아 혼자 슬그머니 갔다가 다급하게 나와 만나는 일도 잦았다. 우리가 하루를 누리는 방법은 달랐던 것 뿐인데 내가 보기엔 그게 참 지루하고 게을러보였다. 그래서 따로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게 됐을 때는 쿠바에서부터였다. 인터넷도 전화도 되지 않으니 연락할 수 없어 늘 붙어 다녀야했다. 시은은 내게 맞추고 나는 시은에게 맞췄다. 누가 누구에게 더 맞추었는가 따진다면 나는 내가, 시은은 자기가 더 맞추었다고 이야기할 테다. 한 번은 둘다 크게 아팠고 나는 방에서 쉬기만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알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도 여행의 일부구나. 불안도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보통의 여행이었다. 무얼 해야한다는 강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시은의 여행을 닮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이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도시에 일주일을 있으니 자연스레 마음이 편해졌다. 어쨌든 내가 한국에서 떠나온 건, 좀 더 나은 하루 하루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여행이 뭔가. 궁극적으로는 좋은 음식 먹고 좋은 걸 보고 좋은 경험을 하고 싶은 욕심인건데, 그게 모여서 좋은 추억과 기억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의 지난 여행을 돌아 봤을 때 진짜 기억에 선명한 건 명소를 가서 대단한 걸 봤던 것 보다 동생과 지내면서 겪었던 사소한 일들이었다. 

멕시코로 돌아와서도 우리는 함께 다녔다. 여전히 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내 욕심을 멋진 장소에 가는 것보다 동생과 함께 하는 것에 더 두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와 둘 다 밍기적거리다가 겨우 씻고 잠에 들었다. 어디선가 사람이 윤택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여덟시간은 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찍 잠이 깨도 억지로 다시 눈을 붙이고 여덟시간을 채우고서 일어났다. 시은이 아직 자는 시간에 나는 숙소에 딸린 마당에 나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씻고 글을 쓰고 전날 찍었던 사진을 보다 보면 정오가 가까워졌고, 동생은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누워있는 동생을 기다리는 시간도 그 애를 보는 것도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오늘은 뭘 하지. 그러면 일단 맛있는 밥을 해먹자. 하면서 맥주 한잔이나 와인을 한잔 마셨다. 아침이면 기분이 저조한 나는 밥을 먹으면서 울기도 하고 오늘은 예민한 날인 것 같다고 시은에게 일러두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서 평범한 날들을 보냈다. 카페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시은이 다니던 학교에 가서 녹음을 하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보거나 영화관에 가서 스페인어 더빙으로 된 영화를 즐겼다. 우리는 전에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분명 아무것도 아닌 날들인데 둘이 있으니 더 재미난 게 분명했다. 

정말 며칠 안남은 오늘은 눈을 떠서 머리를 좀 많이 굴렸다. 미술관도, 살사 학원도 가야하는데. 대체 언제 가지. 오늘은 혼자 미술관에 가려했는데 이따 학교에 녹음하러 간다는 동생을 따라 가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시은과 함께 학교에 가서 그 학교에게 소소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또 며칠 안남은 날들의 아침엔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니 내일 아침에 미술관에 가도 좋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도 미루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으니 내 마음을 속이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보다 한 달 남짓 더 머무르다 한국으로 돌아올 시은도 어디 다른 도시를 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지내다가 가는 게 아무래도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이제껏 욕심 없이 지냈듯, 마지막도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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