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가진 예민함으로 생을 견뎌내는 능력이 갖춰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내게 살아가는 일은 늘 투쟁이었다. 감정적으로 예민하여 조그마한 슬픔과 기쁨에도 쉽게 눈물이 났는데 그걸 반복적으로 오래 봐온 사람들은 쉽게 질려 했다. 작은 말도 과장해서 이해하여 오해와 불안을 자초하는데 재주가 있다. 사람과 헤어지는 게 죽기보다 싫어 어떤 이별 앞에서도 오래 앓았다. 청각의 예민은 다른 감각보다 심하여 작은 소음에도 밤잠을 설친다. 학창 시절엔 누군가 펜으로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거나 시계 초침소리가 들리면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려 시험을 망쳤고 스트레스가 조금만 쌓여도 편두통이 오고 위장이 꼬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쉬기만 해야 했다.
“솔직히 사람 잘 못 믿죠. 나더러 예술가는 예민하니까 네가 그 애를 좀 받아주라고 했어요.”라고 안지도 얼마 안 된 친구가 말했다. 순간 기분이 순식간에 깊숙한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가까운 친구가 또 다른 나의 가까운 친구에게 “그 애는 남들보다 더 예민한 편인 것 같다”고 한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내 모든 게 발가벗겨진 기분까지 들었다. 누군가에게 넌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예민함은 내가 생각하는 치부였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나는 '받아줘야하는 사람'이 된건가 싶었다. 외면하고 싶었던 내 모습을 알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예민하다를 검색하니 이렇게 나온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생각보다 무척 긍정적인 뜻이다. 한데 예문을 보면 긍정적인 뉘앙스가 없다. 애가 병치레를 자주 하더니 성격이 예민해졌다. 요즘 그는 신경이 예민한지 걸핏하면 성을 낸다. 이런 문장들이다. 긍정적인 예문이 없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따라오는 이미지는 병적으로 유난스러운 거다.
그런 말을 내게 했던 친구와 다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서운한 일도 많았다. 사회 문제로, 감정적으로, 나의 우울로, 그 애의 무심함으로. 그럴 때마다 상황이 어떤지 바라보고 해결하려 하기보단 내가 예민하고 그 애는 무딘 탓에 벌어진 일들이구나 하고 한정시켰다. 예민해서 늘 미안했다. 내가 이런 사람인 걸 미안해하는 게 싫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결책은 내가 무딘 사람이 되는 것뿐인데, 그건 어려웠으니 관계에는 발전이 없고 나 자신도 힘들어지기만 했다. 예민해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 가라앉기만 했다. 십 대 이후 어렵게 극복한 뒤로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극한의 우울까지 경험하고 있었다.
아직 나의 예민함을 용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마주할 용기는 생겼다. 한때 나는 느림을 치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너는 느리니까 너”라며 매일같이 해준 말을 들은 뒤로 이젠 그 느림을 미워하지 않게 됐다. 나를 도와주고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처럼 예민함도 언젠가는 나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데 힘을 줄까. 생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까. 다가올 예민함의 능력을 조용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