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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23. 2021

칼발이라 다행이야

양말 세 개를 신고도 운동화를 신을 수 있으니까.

칼발이라 다행이야. 

 출근길에 한 옷가게에 들러 양말을 샀다. 오랜만의 상점 나들이라 분위기가 퍽 낯설었지만, 그래도 직물의 두께를 꼼꼼히 확인하며 골랐다. 세 켤레를 사서 한 켤레는 가방 안쪽에, 나머지 두 켤레는 바깥쪽에 넣었다. 두 켤레는 출근하자마자 개봉할 예정이었다. 

 근무지에 도착하자, 먼저 출근한 동료들이 각종 방한 용품을 몸에 두르고 있다. 눈빛이 사뭇 비장하다. 우리는 짧게 인사하고,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저 오늘 양말 세 개 신을 거예요. 두 개로는 안 되겠어요. 

양말 세 개 신으면 신발에 발이 안 들어가지 않아요? 

제가 워낙 칼발이기도 하고, 운동화도 약간 넉넉하거든요. 

부럽다. 저는 발볼이 넓어서 그렇게 신고 싶어도 못 신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칼발임에 감사했다. 나는 이미 신고 있던 양말 위에 두 겹을 덧대었다. 그리고 양말 세 개로 덮인 발을 억지로 얇은 운동화 안에 낑겨넣었다. 알맞게 들어맞는 포근한 착용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육중한 겉옷을 벗고 얇은 방한복으로 무장한 우리는, 작은 문 두 개를 통과하여 임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얇은 플라스틱 비닐로 만들어진, 우주복 같이 생긴 옷을 입기 시작한다. 그 이름은 '레벨 D 방호복'이다. 그렇다. 나는 선별 진료소 간호사다.




맹위를 떨치는 한파 속 선별 진료소

 전날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부터 기록적인 한파가 온다고 했다. 틀린 뉴스이기를 내심 바랬는데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야외의 온도계의 눈금은 '-16'을 가리키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나서자 순식간에 껴입은 옷 틈새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별 진료소에서 내가 하는 일은 검사를 보조하고 소독하는 일이었다. 검사자는 여전히 적지 않았다.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손 소독을 하는데, 차가운 손소독제가 닿을 때마다 표피가 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발은 양말이라도 신을 수 있지만 라텍스 장갑을 최소 두 개 이상 껴야 하는 손에는 방한 용품을 두를 수가 없다. 검체 채취를 보조하는데 꽁꽁 얼어 감각을 잃어버린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손만 얼면 차라리 나을 텐데, 괴기한 서울의 기후는 각종 소독제마저 얼려버렸다. 난롯가의 명당자리는 각종 소독제가 차지했다. 그 녀석들이 없으면 코로나와 싸울 수 없다. 그 앞의 소독제를 들고 와 부스를 소독하고 잠시 놓아두면, 곧 용기 안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며 살얼음 끼는 게 눈에 보였다. 덕분에 짬이 날 때마다 난로 앞에서 검사 부스까지 왔다 갔다 하며 열심히 배달했다. 잘 얼지 않는다던 젤형 손소독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별 진료소에 엘사가 왔나 봐요.

보이는 것보다 코로나가 가까이에 있음.

선별 진료소의 일은 시작보다 끝이 더 고되다. 밤이 되어갈수록 날은 더 추워지기 때문이다. 시작한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발끝이 얼어가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한파니 북극 한파니 하더니만, 양말 세 개로도 부족한 걸까. 동료들도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덜덜 떨리는 몸뚱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힘겹게 일하는 게 눈에 밟혔다. 그래도 불평하거나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전후좌우 주변 어딘가에 생존해있을 코로나 바이러스를 척결하고 무사히 검사를 진행한다. 나는 일하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다시금 상기해본다. 힘들지만, 망연자실하기보다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내일은 양말 사이에 핫팩도 넣어야지, 하는 자잘한 생각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파는 검사자들도 대기 줄에서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지만, 적어도 내가 그날 마주친 사람 중에는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를 걱정해주었다.

아이고, 추운 날 고생해서 어떻게 한담. 정말 수고하십니다. 

누군가는 검사를 하고 나서 정신없는 사이에도 잠시 멈춰 서서 말을 이어나갔다. 

의료진분들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본인도 힘든 상황에서 타인을 걱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선별 진료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확진되면 어떻게 될까? 자가 격리하는 동안 회사는, 일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나 때문에 회사 동료나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면 어떡하지?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 속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검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의료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은 그러니까,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 그들의 말 마디마디가 하나의 큼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파는 며칠 위세를 떨다가 금세 저물었다. 나는 여전히 선별 진료소에서 일한다. 겨울은 춥지만 나는 밤새 언 몸을 녹이고 다음 날 또다시 출근하여 겹겹이 양말을 신는다. 두터운 양말 사이에 조그마한 핫팩을 붙이며 생각한다. 어쩌면 염원을 담은 주문 같기도 하다. 우리는 오늘도 코로나 종식까지 한 발자국 가까워진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타의에 의한 백수가 되고 싶은 나는 간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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