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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Mar 26. 2021

유한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

넷플릭스 숨은 명작 [더 디그]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디그The Dig]는 우선 제목에서 기묘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품이다. 어떤 수식도 없이 그냥 '땅파기'라고만 읽히는 이 지극히 담백한 제목에서 어떤 감정이나 드라마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디그'가 그냥 삽질이 아니라 유물 발굴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물음표는 남는다. 고고학이라는 소재만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르는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고고학과 극영화가 연결되었던 마지막 레퍼런스는 '인디애나 존스' 정도였다. 주인공이 학자의 탈을 쓴 모험가가 아니라 정말 진지한 고고학자여서는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설정과 배경이 추가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에서 파헤쳐지는 고분이 속한 땅의 주인은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 분)라는 사람으로, 그는 위암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그가 고용한 발굴가 배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은 경험은 풍부하지만 고고학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외골수 기질의 전문가다. 한편 영화의 배경은 1939년 잉글랜드 동남부의 서퍽이라는 지방으로, 유럽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2차 대전의 포화에 휩쓸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땅이다. 자칫하면 6세기경 잉글랜드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잿더미가 돼버릴지 모른다. [더 디그]의 연출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 '땅파기'에 생각지 못했던 드라마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프리티와 브라운의 작업은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브라운은 일손이 부족한 다른 현장의 스카웃 제의를 받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프리티의 현장이 훗날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로 알려지는 고대 지도자의 거대한 배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대영박물관 소속의 발굴팀이 뒤늦게 현장에 찾아온다. 자격을 갖춘 고고학자인 필립스(켄 스톳 분)는 프리티와 브라운의 안목이 옳았음을 인정하면서도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서사의 중심에 놓이는 주제는 대개 '인간승리' 내지는 '불굴의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세간의 무시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어디에도 승자는 없어 보인다. 프리티는 사랑하는 아들을 둔 채 죽어가고 있으며, 브라운의 업적은 2009년이 될 때까지 고고학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프리티의 사촌 로리(조니 플린 분)는 발굴 현장에서 만난 페기(릴리 제임스 분)와 사랑에 빠지지만, 곧 공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모든 인물들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고민한다.


이 지점에서 유물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속성은 등장인물들의 번민과 조응한다. 영화 속 봉분의 주인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영원히 남기기 위해 거대한 배 무덤을 만들었다. 공사를 위해 수백 명이 동원되었을 무덤의 규모는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려주지만,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많은 맥락들은 먼지로 사라지고 금속으로 된 것들만이 남아 그의 정체를 가까스로 추정할 수 있게 할 따름이다. [더 디그]는 아름다운 잉글랜드의 전원을 배경으로, 유한한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담담하게 묻는다.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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