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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Jan 06. 2022

사회과로 착각하고 간 사회복지과

전공도 유행으로 선택했다.

한 해 걸러 들어간 대학에서 과를 선택함에 있어서 1순위는 무조건 취업이 바로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과가 당시 한창 취업률이 좋다고 홍보를 해대던 사회복지과였다.

그 당시 시민단체 일에 관심이 있었고, 아빠의 영향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았기 때문에 사회복지과도 그런 류가 아닐까 하고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복지과가 어떤 것을 배우고, 졸업 후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던 나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내가 원했던 공부를 하는 곳은 사회과에 가까웠지 사회복지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과도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인지 잘 모르겠다.)

비판적인 사고방식으로 이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꾸길 원했던 어린 날의 치기는 사회복지과와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프로정신도 없는 내가 무지하게 택한 사회복지과는 나와 맞지 않았다.

수업이야 그럭저럭 배우면 그만이었지만 기대감이나 욕심 따위가 마음에서 일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다시피 한 학교 생활이 충실할 리가 없다.

내 형편에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대학 공부를 열과 성을 다하지 못했다.

학과에 친한 친구들과는 5일 수업에 6일을 술을 마셨다.

물론 그 친한 친구들도 학과가 맞지 않고, 더 나아가 여대라는 특징 때문에 힘들어했던 이유로 같이 어울렸다.

시험기간이 되면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되돌아보건대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담당 교수, 학과의 운영, 과대와의 마찰, 학과의 분위기, 고등학교와 다름없는 교수들을 위한 불필요한 대우 등등 나는 학교가 불만 투성이었다.

대학이라 하면 자유의 상징이라 여겼던 나에게는 환상을 낱낱이 부서지게 해 준 경험이었다.

자퇴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다녔지만 겨우 2년만 다니면 되는 전문대학이라 학비 아까우니까 잘 참고 다녀서 학위 하나는 건져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나중에 편입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기관에서 실습을 하면서 경험을 했지만 역시 사회복지사 업무는 나와 조금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원했던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겠다는 욕심에 여름방학에 시민단체 취업공고를 찾아 먼 곳까지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면접은 당시 부산에서 봤기 때문에 거리나 교통비에 대한 걱정 없이 응시할 수 있었고, 다행히도 무리 없이 면접에 합격하게 됐다.

일을 시작하기 전 2주가량을 부산에 있는 시민단체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시민단체는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담당 간사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등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간단하게 밥 한 끼 먹을 겸, 조촐한 회식 자리를 갖게 되었다.

4명이나 되는 인원이 겨우 소주 1병과 5천 원짜리 전 하나를 놓고 2시간을 이야기했던 그 시간.

간사 한 명이 한 달 내내 야근도 심심찮게 하면서 버는 돈이 15만 원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그 얘기에 나는 마음이 요동을 쳤다.

물론 내가 일하기로 한 곳에서는 그보다는 많은 급여를 받기로 했지만 경력이 쌓인 들 나을 수 있을까 싶은 불안감이 먼저 생겼다.

그리고 실제 먼 곳까지 가서 자취를 하면서 시작한 일은 면접 볼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를 보인 사무처장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일을 하기 위한 업무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았고, 매뉴얼이나 업무 지시 등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있는 내내 담배만 피우며,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만 뿜어댔다.

첫 사회생활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고, 가전제품을 사고, 살림살이까지 챙겨 올라온 자취 생활에 쉽게 그만둘 수도 없어 너무나 슬펐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이 이어지던 와중에 노조 대표로 오랜 기간 역임을 하며 시민단체 일로 잔뼈가 제법 굵은 분이 과장으로 왔다.

그리고 그 과장님이 몇 주 지켜보면서 사무처장이 나에게 하는 태도와 무책임함에 결국 심도 깊은 회의를 했고, 사무처장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사무처장을 향해 시민단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했고, 임원들도 오셔서 이 일에 대해 사무처장을 비난했지만 모든 게 질려버린 내가 미련을 버리고 그만두기로 했다.

사무처장을 내보내고 함께 일해보자는 말씀들을 하셨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였고, 어린 나이로 인한 향수병까지 보태져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곳에서의 짧은 경험을 뒤로하고, 나를 데리러 온 아빠의 택시에 모든 짐을 싣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 과장님이 시민단체 행사나 시위 현장에 일부러 나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정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두 달의 짧은 기간 나의 부푼 꿈은 바스러졌고, 손해만 안았다.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에서 주인집에 월세를 주고, 1년 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에 위약금도 일부 줬고, 쓸데없이 산 가전제품은 고스란히 불필요한 지출로 남았다.

나의 여름방학은 좋지 않은 기억만 남겼고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그 일로 인한 심적 충격은 제법 오래갔다.

졸업이 다가왔을 때 사회복지시설로 취업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친구와 함께 일할 수 있었음에도 나는 시작하지 않았다.

경기도 어딘가에 있는 곳까지 가서 일한다는 것이 마음먹기 쉽지 않았다.

우리 집 분위기가 난장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 일하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이미 한번 실패하고 온 뒤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회복지사로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깜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모두 멀리 사회복지시설로 취업을 하며 떠났고, 나는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학위만 받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무능한 졸업생 딱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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